• "왜 일본인들에게 ‘위로'를 건네는가"
        2011년 03월 17일 08: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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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옆 호떡 집에서 불이 났다. 당장은 놀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우리 집으로 불길을 옮겨 붙으면 어떻게 하지, 옆 집 때문에 우리 빵집 장사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다가 이제 오갈 데도 없고 먹고 살기 어려워진 옆집 식구들 처지가 눈에 밟힌다.

    우리 집 아이랑 같은 반이라는 옆집 아이가 미처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원체 옆 집이 부자였으니 당장은 굶겠냐만은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녁에 밥을 먹는데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옆집이 원래 악질 순사 집안이었다고, 그래서 그동안 상종도 안했는데 지금은 불쌍하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 집에 살고부터 담장 문제로 번번히 부딪혔던 것이 떠오른다. 그 때 아들 녀석이 말한다. 우리 집은 안전한 거냐고,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다음 날 아침, 가게 문을 여는데 불난 집 앞에 황망히 서 있는 옆집 식구들이 보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지금까지 나온 말들을 모아보면 이렇다. 일단 마을 사람들처럼 돈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자는 것이 한 편이다. 그런데 호떡 집 불났으니 빵집 대박 나겠네라는 소리도 들린다. 원래 신앙에 문제가 있어 천벌이라도 말도 있다. 거기다 도로 문제며 담장 문제며 사사건건 동네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던 것을 떠올리며 내심 쌤통이다라는 마음도 비친다.

    진보신당 서울시당이 15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인, 힘내라’라는 촛불 추모집회를 한 것은, 그 옆집 사람에게 "기운 내세요"라는 말을 건넨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해서만 건넨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우리 식구에게도 전하고 픈 말이기도 했다.

       
      ▲촛불 추모집회 모습(사진=진보신당 서울시당) 

    2.

    촛불 추모집회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몇 가지 아픈 지적들이 있었다. 하나는 모금도 하고 있는데 굳이 촛불집회까지 해야 하냐는 정도의 문제를 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장 우리 안의 문제도 시급한데 그런 문제에 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여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맞다. 정부에서도 구호인력을 보내고 각계의 모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마 진보신당 당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도 ARS 전화번호를 눌렀거나 계좌 이체를 했을 것이다. 복구에 드는 막대한 비용과 당장 살 동네가 사라진 사람에게 매우 값진 도움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도움 가운데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보라. 당장 삼성전자니 현대자동차니 그동안 일본과 경쟁 관계가 있던 산업 부문의 주가가 올랐다는 소식이 들린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의 수장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데서 온 천벌’이라는 말을 했다. 한 유력 정치인은 숫제 우리나라에 피해가 없는 것은 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보였다.

    더구나 이번 피해로 긴급 재정투여를 하기로 결정한 일본의 조치에 대해 ‘안 그래도 마땅한 내수가 없었는데, 이번이 일본 내수경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분석에서부터 ‘일본판 뉴딜’이라는 수식어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금언인 양 회자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위기를 겪는 사람’과 ‘기회를 잡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경제적인 총량으로 바뀌어버린 위기는 철저하게 일본인들의 재앙과도 같은 고통을 이후의 경제적 이익으로 삭감될 수 있는 무엇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통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적인 극한 상황에 대해 위로와 공감이라는 감정적인 방식보다는 합리적이고 계산가능한 이성적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일본 지진을 둘러싼 상황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가깝게만 보더라도 한미FTA 역시 경제적 총량을 더하고 빼는 방식의 타당성을 가지고 추진해왔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문제도 그랬다. 구제역 문제 역시 ‘청정지역’ 증명이라는 수출 구비 서류 하나 때문에 방치되고 곪아갔던 것이 아닌가.

    말이야 거창하지만 사실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준비한 촛불 추모제는 경제적 이해타산,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넘어서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웃 집의 고통에 대해 그 자체로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경제적 이해타산의 방식을 돌아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십년간 반목하고 있는 역사의 부침을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서툰 첫걸음이 되기도 바란다.

    3.

    우리 안의 문제부터 돌아보라는 말은 아프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했음에도 능력의 부족 때문에 마치 아무 일도 안 한 것처럼 보여서 아프다는 것이다. 핵발전 문제를 넘어서서 일반적인 핵 이용과 관련하여 가장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던 정당이 바로 진보신당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 방폐장 문제에서부터 어떤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도 이와 같은 원칙을 버린 적이 없다. 안타깝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입장은 유지되었다.

    당연히 당면한 우리의 핵발전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우리 안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피해 당자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보신당 서울시당만 보더라도 에너지 괴물인 서울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이런 고민은 작년 지방선거 당시 공약으로도 제안 된 바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채찍질은 더욱 분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능력의 부족 때문에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마치 위로, 애도에도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 불편하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일의 선후 관계를 따라서 이것이 안되면 저것이 안되고,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저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단계를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촛불추모집회를 제안하면서 ‘핵발전’ 문제의 대안 모색을 제시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심권에서 발생할 지진과 같은 재해에 대해 어떤 대책이 수립되고 있고 그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정책 검토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 앞서 가장 아픈 대목은 "너네가 언제 정신대 할머니들에게도 이만큼의 관심을 보인 적이 있냐"는 질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반성한다. 그 반성의 의미는 우리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은 해도 해도 과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백번 인정한다. 그런데 그토록 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이 정작 ‘할머니들의 일본인 애도’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걸까.

    혹시라도 피해당사자가 애도를 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이 아니길 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만행이 나치 독일의 책임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독일인들의 책임이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는 일본인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일본 정부와 군수 재벌을 향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지진 피해에 따라 고통받고 있는 일본’인’을 위로하는 것은 일본’국’을 위로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준비한 피켓에는 ‘힘내라 일본 민중’이라는 말이 쓰여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일본 땅에서 피해를 본 일본인들에게 건네는 말이지 일본이라는 국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정신대 문제가 모든 일본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 아니라면, 정신대 문제를 들어 일본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되는 셈인데, 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4.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이들은 진보신당 서울시당이 당원들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업의 내용을 알린 수준이다. 작년에 있었던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이나 각종 장기투쟁 사업장에 함께 하는 수준과 비교한다면 말이 안되고 그럴 여력도 없다.

    다만 지금 이 국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하나로 ‘애도의 방식’을 제안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애도의 방식을 통해서 일본의 피해 민중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싹트고 있는 불안과 걱정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하자고 이야기한 것 뿐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정치적 타산은 ‘진보신당 서울시당’이 이런 애도를 표한다는 입장의 제출로서 정치적 행위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와 함께 핵 발전에 대한 입장과 정부의 핵에너지 육성 정책에 대한 저항 역시 조직될 것이다.

    지금은 당장의 경제적 이해득실, 역사적 은원 관계를 넘어서서 당신들의 고통이 우리도 아프다라는 공감을 공개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이성이 압도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개입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집행부가 바뀌는 과정에서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한계는 있지만, 피해 일본인에 대한 애도와 핵 발전 문제에 대한 실천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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