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아저씨들의 몽매한 논쟁"
    2011년 03월 15일 12: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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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병천이 "진보도, 진리도 ‘대중’의 것이다"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 대한 비판이다.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당초 논쟁은 볼썽사납게 시작됐다. 진중권의 ‘철인 좌파의 딱지치기’라는 비아냥거리는 논조의 글이었다.

볼썽사납게 시작된 논쟁

이 글은 몇 개월 전 김규항과 진중권 사이의 논쟁을 지켜봤던 사람들에게는 ‘제 2라운드’의 서막을 알리는 격이었지만 사회적으로 꽤나 큰 발언력을 갖는 ‘진보논객’의 글로서는 함량미달의 조롱으로만 채워진 글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인데, ‘김규항은 진보정당운동에서 한 게 뭐가 있냐. 나는 나름대로 진보정당 운동 엄청 열심히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지가 뭐라고 “진보” 딱지 맘대로 붙여대고, 남들은 아니라고 훈수두냐. 재수없다.’ 이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김규항이 <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만화잡지를 만들어온 것을 애써 폄훼하며 “고래와 권세와 영광이 아저씨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비아냥거린 것 아니겠는가. 유치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에 대해 다시 비난을 쏟는 건 쓸모없는 짓이다. 그러려니 하면 그만이다. 한편 이 논쟁에 대한 반응이 표면적이고 실시간으로 나타나는 트위터나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는 정치적 스펙트럼 사이의 입장 차이를 막론하고 꽤 많은 지탄이 올라왔다.

진중권이 논쟁을 거듭하면서 생긴 감정의 앙금을 ‘배설’하는 것 이상의 논지를 갖추지 않은 채 그 특유의 조롱으로 빈정거리기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또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왜 갑자기 조국의 ‘진보집권플랜’에 동참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인정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떡밥을 물고 김규항이 ‘진정한 의미에서’ 투항 혹은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저 진보 아저씨들 간 논쟁이 얼마나 몽매한 수준에 함몰되어있는지 알 수 있는 ‘숨겨진 대전제’가 존재한다. 이 논쟁의 당사자나 이 논쟁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불행한 이유는 이 숨겨진 대전제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규항과 손호철의 한계

진중권에 대한 반박글 ‘난감한 풍경’에서 김규항은 이른바 ‘민주대연합’ 혹은 작금의 ‘선거연합론’이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등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에게 흡수통합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상층단위에서 공학적으로 선거연합의 함수에 녹아들어가는 게 진보세력에게 전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한다. 손호철의 글 역시 구구절절하고 장황하긴 할지언정 이런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김규항과 손호철은 인정투쟁에서는 다소 설득력이 있을지언정 전술적으로는 일정한 모순을 갖고 후퇴하고 있는데, 그 스스로도 “나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선거연합을 찬성한다.”라는 전제를 밝히며 2000년대 사회운동의 전개 양상과 좌파 정치의 쇠락에 대한 설명 없이 자기 논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도 ‘제 1항’은 숨겨져 있다. 아무 매개 없이 선거연합론이 재개되고 있는 양상에 대해 돌아보지 못하는 태도다. 이런 논리는 소위 개혁진영의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들이 그냥 고집만 부리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에 일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진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대관절 누가 ‘진보’인지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이건 말 그대로 끝나지 않는 인정투쟁에 불과하다. 지식인들이 사회운동의 고난들과 얼마나 유리되어 논쟁하고 있는지, 또 정세분석에 있어서 얼마나 관념적인 수준에서 머물러있는지 알게 한다.

요컨대 ‘진보’라는 이름을 획득하는 것이 좌파정치의 향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 진보정당운동 초기에 획득한 ‘진보정당’이라는 이름에는 일종의 일시적인 이니셔티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민 대다수가 “진보나 보수나 다 똑같애.”라며 정치 전체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진보’에 대한 인정투쟁은 결국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는 진화론적 역사의식의 잔여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역사관에 기초할 때 우리는 아주 종종 단선적이고 단계론적인 이데올로기 안에 매몰되고 만다. 모든 것에 대해 단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진보정당운동마저 아무리 신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더라도 ‘전술 효과’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것이 결국 이명박이라는 대괴수를 몰아내고 ‘역사의 진보’라는 대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를 조금씩 개량시키다보면 결국 역사는 진보하고,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수정주의적 입장을 개진했다. 이것은 서유럽에 사민주의 정당운동의 역사를 낳았다. 그러나 근래에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스탈린은 레닌 사후에 권력을 거머쥐고 신경제정책을 잇는 대대적인 계획경제를 전개했다. 이른바 노동자 생산력 향상을 위한 노동강도 강화를 꾀하게 된 것도 이때인데, 왜냐하면 사회주의 조국인 ‘소비에트연방’이 자본주의 진영의 ‘미제’보다 발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역사의 진보’를 생산력 발전으로 증명해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낳은 것은 저 유명한 관료주의와 경악스러운 노동자운동 통제이다. 요컨대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는 기묘하게도 진화론적 역사관을 공유하며 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가지 흐름이 우리에게 대체 어떤 희망적 전망을 보여주고 있는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이런 진화론적 역사관에 대해 비판하며 사회변혁이란 “역사라는 기차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물며 ‘진보’라는 명명을 굳이 고집할 필요있는가? 물론 지금 이 지면상에서 ‘진보’의 폐기를 전면적으로 요청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인정투쟁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짓인지 자각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진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한 김규항과 손호철, 그리고 최병천까지 이어져 온 인정투쟁이 오늘날 진보신당이 감당하고 고민해야 할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최병천의 ‘진보론’

굳이 플라톤이나 아담 스미스, 포디즘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사실 최병천이 ‘포디즘’을 들먹인 건 대단히 경악스런 예였는데, 그는 ‘포디즘’이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효과’를 발휘했던 것처럼 말한다. 아무리 진보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한들, 포드주의적인 노동자 통제 강화가 ‘나은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극악의 착취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효율과 생산성 고취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최병천의 정치를 근본부터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김일성-카다피와 독일 기민당을 비교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논거이다.

독일 기민당은 서유럽 선진국에서 공공연히 우익정치를 펼치는 부르주아 정치집단이고 김일성이나 카다피는 주변부 후진국가에서 공공연히 독재와 학살을 자행하는 지배계급인데, 이 둘을 비교하는 게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가 갖고 있는 진화론적 역사관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저씨들의 노이로제

진중권에 대해서는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이미 저 산으로 넘어간 듯하다. 지난 시기 진중권은 끊임없이 극우적 풍경들에 전투를 걸며 한국사회 대표적인 논객으로 자리잡아왔다. 그는 스스로 ‘상식’의 자리에 가부좌하고서 극우와 극좌 양극단을 비판하는 ‘균형감’(?)을 보여주며 자기 전투를 전개한다.

이는 합리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대단히 유리하고 ‘상식적인’ 전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 이데올로기의 지형에서 이것이 대체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고작해야 그는 독일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며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이한 반공주의가 공공연히 노출된다는 점이다. 이건 공히 ‘정치’의 몰락에 대한 징후처럼 보인다. 어떤 사안에 대해 급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모든 태도에 대해 진중권은 노이로제적 반응을 보인다. 소위 논객이나 급진적 정치분파들이 공히 급진적 입장을 견지하면 주사파를 까듯이 까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청소노동자들의 ‘파업’과 ‘점거’에 대해 그것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까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론과 테제적 입장들에 대해서는 ‘극좌’라고 비판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낸다는 건 이율배반적이다.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나 빈민들은 국가의 법이라는 경계 안에 머무르며 투쟁하기는 거의 하늘에 별따기와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합리적인 독자들이 보기엔 그런 교과서적 입장 견지가 무척이나 합리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 위치는 온전히 자기 정치가 아니라 철저하게 ‘실용주의적 노선’을 따른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전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를 견지한다. 여러 면모에서 그는 거의 실용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어떤 국면에서 ‘실리적 판단’은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실리’가 ‘좌파’가 가장 낮은 수준에서 공유하는 대의적 차원의 정치적 입장마저 쉽게 기각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과거 베른슈타인을 위시한 일련의 독일 사민주의자들이 결국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참전으로 입장 선회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1980년대 이후 유럽의 사민당 지도자들이 결국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당의 입장을 선회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아주 쉽게 노동유연화나 이라크전쟁 파병과 같은 노선에도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주도해왔던 저 신자유주의 세력과 ‘동침’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애써 좋게 말해서 ‘민주세력’으로 불러주는 저 실용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을 말이다.

민주당과 국참당은 변했는가?

물론 최근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스탠스가 그들이 결국 과거 집권 10년을 반성적으로 평가하고 ‘진보’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태도 변화를 두고 침소봉대하는 건 곤란하다.

여전히 전반적인 입장 변화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민주당식 복지국가의 구상은 이른바 ‘일하는 복지’라는 과거의 신자유주의-노동복지 구상과 큰 차이를 갖지 않고 있다. 요컨대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그대로 두면서 저임금노동으로 내몰리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복지’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빌려 보다 더 ‘싸게’ 고용하겠다는 것 아닌가.

과거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이 보여준 복지국가 정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최근에 “증세없는 복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한미FTA의 원안은 옳다”?

한미FTA에 대해서는 어떤가. 며칠 전 있었던 야4당 정책연구소와 한겨레경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한미FTA에 대한 진보개혁진영의 선택’토론회에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은 이명박 정부가 체결한 한미FTA 재협상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노무현 정권 시절의 원안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명박 정부가 체결한 재협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한미FTA 체결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국민참여당은 “대외 시장개방 노력을 옹호하며, 일관성 있는 통상개방 정책”이 입장이라고 밝히면서 FTA 원안에 대해 찬성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과거 이들이 광우병 소고기 촛불시위 국면에서 보인 태도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지 드러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진보진영 일각에서 ‘민주당’이나 ‘유시민’이 변하고 있다, 라며 애써 박수를 쳐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있고, 이곳 <레디앙>에 기고되는 글 몇몇에서 그런 흐름이 보인다. 황당무계할 지경이다. 아주 순진하게 속아주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는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보진영은 왜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는가

2011년 소위 진보진영은 왜 갑자기 ‘민주대연합’이라는 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는가. 이들은 이명박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대의’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이명박을 무너뜨리는 건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정치와 어떤 대의로 무너뜨리는가가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만약 사회운동적 대의를 망각하고 민주당이 과거 집권 10년 간 보여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견지한 채 ‘연합’하게 된다면 그들은 민중운동판을 볼모로 삼아 이 땅의 사회운동의 역사 전체를 투항시켜버렸다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만약 주지한 바와 같이 ‘민주당’의 변화라는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테제를 우회한 껍데기뿐인 수사의 ‘변화’라면, 대체 ‘그 연합’을 통한 ‘집권플랜’이 누구를 위한 집권이란 말인가. 이건 거의 사기 수준에 가깝다. 변화의 의지와 반성조차 없는 이들이 절대적인 다수파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어들어가자는 것이니 말이다.

최병천은 이런 생각이 “마이너적 피해의식”이라고 말한다. 여지껏 <레디앙>에서 들어본 말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규정이다. 이건 마이너적 피해의식이 아니라 명확한 상황 판단이다. 이런 절대적 조건을 깨뜨릴 묘수도 내놓지 않고 자기 강변만 늘어놓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본을 망각한 아저씨들의 선거 망상

2008년의 촛불시위, 그리고 이후에 발생한 용산 철거민 투쟁과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투쟁,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무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인 주요한 투쟁들의 연속된 패배 속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의 아저씨들은 먼 산만 쳐다보고 있다. 일찌감치 2012년 총대선 정국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12년의 정치 일정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중대한가와는 별개로 현시기 진보신당의 누구도 오늘날 사회운동, 노동자운동에 주어진 중대한 과제들을 공세적으로 돌파해내는 대안을 제기하고 있진 못하다.

오늘날 저 민주당발 ‘연합론’에 휩쓸려가고 있는 최병천이나 이창우, 넓게는 진중권이나 이수호 같은 이들을 보노라면 오히려 2000년 이후 노동자운동, 민중운동의 거듭된 패배와 쇠퇴로 쌓여온 것에 대한 반영이 느껴진다.

노조운동과 진보정당의 지속된 패배와 쇠퇴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정당운동이라든지 지역에서부터 전개되는 사회운동적 지역운동 따위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들은 손 놓아버리고, 선거 국면에 편승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야권연대’를 우선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거의 지 버릇 개 못주는 축에 가깝지 않은가.

통합파도, 독자파도 없다

얼마 전부터 <레디앙>이나 당게와 같은 진보신당의 공론장에서는 진보신당 당원을 통합파와 독자파로 나누는 경계가 생겼다. 2012년 총선, 대선이라는 사전 국면에서 진보신당의 미래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나누는 기준선이다.

그러나 지난 몇 개월간 나는 꽤나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소위 통합파도, 독자파도 뚜렷하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통합파로 분류되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독자파의 판단 기준에도 조금씩 다른 선들이 있다. 또 누구하나 자신이 통합파이네, 독자파이네 라고 말하기는커녕 그런 규정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생각과 뜻이 같다면 연합하고 함께 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언제나 ‘통합파’이다. 그러나 지금 시기에 어떤 효과를 낳느냐가 문제시될 뿐이다. 통합파/독자파라는 부당 대립이 누가 더 급진적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구분은 당연히 아니거니와 항간에 떠도는 다소 설득력 떨어지는 낭설들처럼 통합파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종북’이거나 ‘개량’은 아닐 것이다.

다만 논쟁을 하더라도 의미 있게 전개하지 못한 채 온갖 인정투쟁에만 매몰돼 진짜 자신의 위기가 무엇인지는 진단하지는 못하고 있는 게 진정한 문제가 아닐까? 오늘날 진보정당운동의 위기, 넓게는 남한 전체 민중운동진영의 위기는 왜 발생했는가? 그리고 그 위기의 양상 속에서 ‘선거연합’ 논쟁에 휘둘리는 것이 과연 ‘사회운동’을 진전케 하는가?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해볼 문제다.

최병천의 오류

최병천은 소위 독자파를 엘리트주의자들로 규정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그는 아주 충실한 최장집 독자 행세를 하며 구구절절 똑같이 읊어대고 ‘운동권’이라는 유령을 소환해 몽매한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전개한 모든 도식들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몽주의자, 엘리트주의자는 바로 최병천이다. 첫째로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과 국가권력의 총공세를 능동적이고 정세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제 민중운동진영이 2000년대 내내 패배를 거듭했고 이에 따라 전체 운동의 쇠퇴 속에서 진보정당 역시 위기에 도달했다는 점을 애써 생략하고 있다.(이는 김규항이나 손호철도 마찬가지다)

하기에 다시 아래로부터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적 지역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이들에게 "운동권이야!"’라는 굴레를 씌우기로도 할 태세로 말한다. 그러나 얼마 전 전국 정세를 휘어잡았던 장본인은 바로 홍익대의 청소노동자들이 아니었던가.

지난 겨울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젊은’ 하청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던가. 또 바로 지금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 고대·연대·이화여대의 청소노동자들, 그리고 홍대 앞 두리반과 일산의 철거민들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플라톤의 진리? 정치의 진리?

최병천은 중학교 도덕교과서에서처럼 ‘플라톤=철인정치’라는 우스꽝스러운 공식을 빌어 “좋은 정당은 좋은 정치에 선행한다.”라는 최장집의 정치공학적 테제를 소환한다. 이에 앞서 그가 전개한 논리들에서 우리는 정치 자체의 ‘위기’가 만연한 오늘날, 정치에 대해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진리’라는 것이 마치 ‘학문적 진리’와 ‘정치적 진리’로 철저하게 양분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학문 자체를 사장화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다. 그에게 더 이상 인문학이나 철학, 정치경제학 비판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문의 진리가 별도로 존재하니 말이다. 그런데 플라톤을 소환했던 그의 결론으로 되돌아가보자. 플라톤의 진리는 왜 최병천식의 ‘정치의 진리’와 구분되지 않는 거지?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심지어 영화배우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는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에 서서 진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플라톤주의적인 ‘헌신’을 추구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플라톤의 근본적 관심사는 “사유와 사유 대상 간의 내재적 동일성, 병존성, 그리고 그들 간의 존재론적 양립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이지, 전자의 후자에 대한 초월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최병천으로 돌아오자면 그는, 정확하게 “철인정치=플라톤” 혹은 “최장집주의” 등을 빌어 이 유사-철학으로 ‘철학’을 도덕교과서처럼 자기 수사로 이용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정치적 진리’는 실용주의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플라톤주의’를 ‘진리-공정’과는 완전히 분리하는 것인데, 이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플라톤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망상에 빠진 사민주의자의 결격

따라서 우리는 ‘인신론적으로’ 크나큰 결격을 지닌 것은 다름 아닌 최병천 자신임을 확인하게 된다.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내쫓김 당한 노동자·빈민·농민·여성이 오늘날 어느 처지에 놓여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오늘날 진보정당(소위 진보세력)의 위기가 어느 지점에 노정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듭 지난 시기 왜 남한 민중운동이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우경화되어 왔었는지를 뼈저리게 살펴봐야 한다. 오늘날 대학에서건, 일터에서건 모두들 벼랑 끝에 내몰려 고통 받고 있지만 누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가. 혹은 누가 ‘진보정치’에 호소할 수 있는가. 대중운동의 붕괴가 드러내는 오늘날 사회 전반의 ‘악무한’ 상태를 보노라면 운동에서의 퇴각이 얼마나 큰 불행들을 낳는지 느끼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다시’ 복원하는 것 말고는 대안을 찾을 수 없다. 만약 진보정당운동이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진보정당이 가장 또렷한 자세로 지역에서부터 풀뿌리 지역운동을 전개하고 사회운동적 전망 하에서 지역 노동자운동을 전개할 때이다.

하청노동자들, 해고된 노동자들, 실직 상태의 청년들, 빈곤의 나락에 빠진 무수한 시민들은 무언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이들에게 저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후퇴한 정책들’을 ‘실용적인’ 대안이랍시고 늘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들 자신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다른 세계’를 담대하게 제안할 것인가.

“영원한 나무”를 위해

이쯤에서 우리는 최병천이 말미에 인용한 괴테의 잠언을 다시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 레닌은 2월혁명 이후 형성된 이중권력 상태에서 ‘낡은 볼쉐비즘’을 폐기할 것을 요청했다. 한편 플라하노프와 멘쉐비키 당원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반발하고 있었다. 이때 레닌이 괴테를 인용했던 것이다.

그로서는 부르주아계급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계급 ‘대안적 삶’이라는 “영원한 나무”를 가꾸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대중운동’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대중의 정치적 자주성을 부르주아 의회공화국보다 더 빨리, 더 잘 실현시킬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오직 노동자 민중의 자발적인 대중운동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음을 반증하는 요청이다. 많은 의회주의자들이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조금씩 천천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는 2월 혁명 당시 플라하노프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철학을 공유하는데, 자본주의의 한 시기가 끝나가는 지금 그 모든 진화주의자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는 말할수록 잔소리다. 요컨대 상기한 ‘진화론적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다시 벤야민을 인용하자면) “역사라는 기관차에 브레이크 가하기”를 선택했다.

자. 이제 다시, 최장집주의라는 관념론적이고 실현불가능한 ‘정당정치 입론’에 갇혀 오늘날 민중들이 처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자유주의 정치분파와의 동거라는 망상을 꿈꾸는 최병천에게 괴테의 잠언을 되돌려줄 때이다.

“나의 친구 이론이여, 그대는 ‘잿빛’이나, 생명의 영원한 나무는 푸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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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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