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경한 댓글에서 '무기력'을 본다
        2011년 03월 15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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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진보-야’에 게재되었던 <면목동 내 친구, 결혼하고 중국 간다 : 한국살이, 힘들어…그래도 샤넬백은>에 대한 의견들을 읽어보았다. 의견들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되어 있다. ‘비정규직 대졸 노동자’나 현재의 ‘청년 세대’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라는 옹호론과 그런 ‘속물성’의 합리성을 이야기하거나 그것들을 ‘비정규직 불안여성노동자’들로 엮어서 이야기하는 게 어이가 없다는 반론 정도인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좀 더 확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이야기를 좀 더 전개해보자.

    명품백 논쟁 댓글들

    ‘500만 원짜리 샤넬백’과 그에 준하는 ‘지방시백’을 사는 것에 ‘합리성’을 부여한 것이 문제였다. 경제적 인간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관점에 설 때 자신의 소득수준에 맞지도 않는 ‘명품백’을 구매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모두 다 알법한 사실이다.

       
      ▲샤넬백 

    게다가 ‘결혼’을 하면서 갖춰야할 기초적인 것들, 예컨대 집과 살림살이를 구매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명품백이라는 ‘떡고물’에 더 집착하는 것은 분명 몰상식한 일이기조차 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 돈이면”하는 합리적인 댓글들이 따라붙는다. ‘흠’의 댓글이 그러한 종류이다. 건전한 ‘재정 관리’를 위해서 대출을 끼지 말고 가진 돈에 맞게 빌라를 권했다는 ‘합리적’ 대안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명품백’을 사는 ‘속물근성’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아니 당연하다. 이 ‘황당한 것들’이 문제가 된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태도들이 하나의 입장을 따르고 있으며, 그 입장이 좌파들을 옴짝달싹 못하고 고루한 ‘꼰대’들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들의 전통적인 ‘변화/혁명/변혁’의 테제들이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그 모순 하에서 많은 노동계급의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진행되고 그 모순이 정점에 달했을 때 변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사회경제적 최종심급’은 가장 상위의 위치에 존재한다. 이 이론은 여러 가지 부침을 겪으면서 ‘신자유주의’라는 체제에 맞춰져서 얼개를 만들었다. 노동계급이라는 것이 정규직 여부, 학력, 성별과 연령, 인종 등에 따라 분할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하위에 있는 ‘불안정 저학력 20대 지방 출신 여성 노동자’가 가장 심각한 ‘빈곤층’으로 전락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좌파들이 길을 잃는 곳

    아무리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워킹 푸어’의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한 개념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명품’은 꿈도 꾸지 못하는 ‘불안정 노동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가장 가난하다.

    ‘500만 원짜리 샤넬백’은 꿈도 꿀 수 없고 직업도 불안하고, 결혼도 꿈꾸기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그 벌이에도 ‘지름신’을 감당하지 못해서 카드를 긁고 ‘크레딧 푸어’가 되는 ‘불안정 노동자’도 있다. 소비를 위해 ‘성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한 욕망은 실질적인 자신들의 ‘물적 토대’와 정확하게 대응할 수 없고 늘 넘친다. 덕택에 미끄러질 것이다. 이 역시 모두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들 자체는 사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자본의 마케팅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많은 좌파들은 길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우울한’ 상황에서 ‘변혁’이 곧 바로 도출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변혁’은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들이 좌파들에게 주는 생각은 ‘변혁’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곧 바로 ‘필연성’으로 연역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필연성’에 입각한 ‘변혁’이 구체적 장소들에서 도무지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하면서 현상을 면밀히 살피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현상을 바꾸기 위해 개입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역사적 필연’을 기다리는 방식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첨예해졌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 위기는 그 반영이다.” 이러한 입장들 중 마지막 방식은 문자 그대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의 세태를 욕하는 수준에서 멈출 따름이다. 가장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강경한 댓글엔 무기력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세 번째의 방식이야말로 가장 ‘냉소주의’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무엇을 해도 안 될 것이라는 방식과 동전의 앞뒤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체제 재생산’에 기여한다. 쉽게 말해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과 적절한 수준에서의 ‘개입’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는 좌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성’을 넘어서 구체적인 양상을 보려는 시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명품을 지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속물주의’라면서 비난하거나, 그들을 위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하냐며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그들의 그 ‘황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묻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는 좌파들은 <소비의 사회>나 <유한계급론>에 나오는 소비욕구에 대해서 머리로 이해하지만, 그걸 몸으로 구현하는 ‘일반인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는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들이 갈망해마지 않는 ‘신음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모습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태도들이 등장한다. “‘진짜’ 불안정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는 방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일부 좌파들이 생각하는 대중의 표준이 되려면 신자유주의에 ‘신음’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좌파’라는 메시아만 오매불망 찾고 있어야 하나? 끝도 없이 투사하고 난데없이 실망하거나, 현실과 상관없이 낙관한다. 내가 ‘강경한 댓글’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기력’이다. 그 무기력에 지루해진다.

    일부 좌파들의 꼰대질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본주의가 시작한 이래로 대중들은 늘 그랬다. 그들이 기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대 학출 노동자들이 이미 현장에서 겪었던 일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학출 노동자들의 집에 있는 ‘노동계급 부모’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자화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침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화이트 데이’이다. 자본의 마케팅 전략이 만들어내는 ‘상혼’에 물들어 있는 ‘젊은 황당한 녀석들’은 없는 돈을 짜내서 ‘츄파춥스’와 여러 가지 종류의 캔디, 초콜릿을 사고 연인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전형적인 ‘과시소비’의 일종이다.

    또 예수의 생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연인들은 ‘과시소비’를 계급과 상관없이 진행할 것이다. ‘가족’의 재생산과 아무런 상관없는 결혼식에 ‘예단’을 하고, ‘혼수’를 갖추고, 주위 사람들이 하면 ‘명품백’도 그 목록에 들어갈 수도 있고, 실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계급적 부의 수준’과 큰 상관관계 없이도 작동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그들이 투표를 하기도 하고, 촛불집회에 ‘하이힐’을 신고 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좌파들이 오매불망해서 찾고 있는 ‘대중정치’의 그 ‘대중들’이다. 그 대중을 움직이려면 어떻게든 그러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 조직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일부 좌파들이 하는 일은 그들에 대한 ‘꼰대질’밖에 없는 것이다. ‘개독교’는 욕하면서 동시에 ‘개독교’가 가지고 있는 윤리는 좌파들도 공유해버린다. 소비와 노동에 대한 ‘도덕주의’. 덕택에 ‘틈새 공간’이 막혀버릴 수밖에 없다.

    다른 방식의 운동에 대한 요청

    대중의 욕망이라는 ‘막대기’를 ‘구부릴’ 좌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내가 보기엔 1990년대의 ‘문화운동’ 진영의 자유주의적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상상력의 분출이 멈춰버린 지금이 더 문제로 보인다.

    이러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적’ 욕망들을 대안적으로 점유해볼 수 있는 ‘상상력’의 여지는 도처에 깔려있다. 예컨대 그런 소비에 대한 ‘사적 욕망’들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갖가지 ‘~ 데이’를 모조리 ‘휴무일’로 지정하는 투쟁을 하면 어떠한가?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그것은 ‘진보적 흐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노동시간의 축소와 휴무일의 확장을 통해 ‘노동의 유연화’에 대응하는 ‘노동과정의 유연화’, 즉 비정규직을 축소하는 흐름을 만들고 파트타임 정규직을 늘려 ‘일자리 나누기’의 구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리고 생산자와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협동조합’ 형태로 만들어진 상품들의 ‘선물주기’를 확산하는 흐름을 좌파가 주도적으로 끌고 간다면? 물론 이러한 ‘사회적 경제’, ‘생협’, ‘사회적 기업’ 등에 내포하는 ‘자유주의적’ 난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마냥 ‘반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반대’의 주체들의 ‘귀환’만을 기다릴 것인가?

    주변화된 푸어들이 양산되고 있고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방식의 ‘문화적’이든 ‘사회적’이든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속물주의’의 범람은 좌파의 ‘다른 방식’의 운동에 대한 요청이다.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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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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