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도, 진리도 ‘대중’의 것이다"
        2011년 03월 13일 01: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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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이 <한겨레> 칼럼을 통해 조국 교수와 오연호의 ‘진보집권플랜’을 비판한 이후, 소위 진보딱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손호철 교수가 <프레시안> 기고를 통해 이 논쟁에 가세했다. 이 논쟁은 전반적으로는 실망스러운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건더기에 해당하는 논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건더기에 해당하는 핵심 논점만을 뽑아보면 두 가지가 추려진다. 첫째, 선거연합에서 ‘진보적 가치’가 반영되는 것이 가능한가. 둘째, 도대체 ‘진보’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김규항, 손호철 ‘조건부 연정 찬성론’ 동의한 셈

    그런데 사실 진중권-김규항-손호철의 논쟁에서 이들은 이미 선거연합의 입장과 기준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김규항과 손호철 교수는 진중권이 제시한 ‘기준’에 모두 동의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살펴보자.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지, 그 연합에 딱지나 갈아붙이는 것은 확실히 아니리라.” (진중권, 「철인좌파의 딱지치기」 중에서) 

    “나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선거연합을 찬성한다….내가 문제 삼는 건 선거연합 자체가 아니라 지금 진행 중인 선거연합이 과연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선거연합인가 하는 것이다….현재의 선거연합은 ‘정권교체’만 강조될 뿐 정작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물리적 방안이 없다.” (김규항, 「난감한 풍경」 중에서) 

    “나아가 그 같은 진보의 가치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현재 논의되는 다양한 연합 중 어떠한 연합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를 논의해야 한다.” (손호철,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 중에서)

    진중권은 총선과 대선에서 선거연합의 불가피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진보의 가치’를 더욱 반영하는 것이 핵심임을 지적했다. 그런데 김규항도 ‘진보의 가치’를 반영한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는 손호철 교수 역시도 동일하다. 그렇게 볼 때, 김규항-손호철 교수는 양자가 공히 ‘조건부’ 연정 찬성론자임을 밝힌 셈이다. 

    다만 해당 논점에 국한해서 보자면, 남는 유일한 쟁점은 선거연합을 하면서 소위 ‘진보의 가치’가 반영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이다. 이제 이에 대해 살펴보자. 

    ‘상층 정치연합’은 ‘기층 정치연합’이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대선후보는 전국연합과 정책연합을 했다. 그런데 김영삼 후보에게 200만표 이상의 차이로 졌다. 당시 민주당은 대선 패배의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전국연합과의 정책연합을 꼽았다. 그 이후 민주당은 자신들의 ‘오른쪽’ 정치세력하고만 정치연합을 했다. 익히 알다시피 97년에는 김종필과 DJP연합을 했고, 2002년에는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정세균 대표의 신년 연설을 통해 진보정치세력에게 지방권력 연립정부를 제안했다. 그런데 많은 진보파들은 이 제안의 의미를 간과했는데,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제안은 매우 ‘역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1992년 이후 18년 만에 민주당이 자신의 ‘왼쪽’ 정치세력에게 정치연합을 제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97년 김종필과의 DJP연합은 당연하게도 ‘권력분점’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사전에 공개된 각서나 합의서는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권력분점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의 경우 나중에 불발되긴 했지만 ‘권력분점(=가치분점=정치분점)’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왜? 그것이 ‘정치의 ABC’이기 때문이다. 

    정당간의 ‘상층 정치연합’은 본질적으로(그리고 필연적으로) 지지기반인 ‘기층(유권자) 정치연합’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일정부분 ‘가치’가 관철되는 정치연합일 수밖에 없다. 이는 정치적 필연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함부로’(!) 정치연합을 제안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당이 18년 동안 자신의 왼쪽 세력에게 정치연합을 제안하지 않고 오른쪽 세력에게만 제안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김규항-손호철 교수가 이렇게 자명한 사실을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그저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는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국민적 상식만 갖고 있으면 이해 가능하다. 예컨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단독으로 당선되었을 경우와 DJP 연합으로 당선되었을 경우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지론도, 민주대연합도 없다 

    진보파는 비판적 지지론을 경계한다. 연합정치 혹은 연립정부는 新비지론 혹은 新민주대연합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모두 마이너적 피해의식이 아닌가 우려되는 발상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비판적 지지론의 본질은 ‘그냥’ 민주당을 찍는 것이다. 비판은 말로만, 혹은 마음속으로만 하고 찍을 때는 그냥 민주당을 찍는 것이다. 당시에는 진보정치 세력이 ‘실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진보정치세력이 실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실체가 5~10%의 표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비지론도 민주대연합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 거론되는 연합정치 및 연립정부론은 비지론과 무엇이 다른가? 다르다. 핵심적으로는 ‘권력분점론’이라는 점이 다르다. 마치 김대중과 김종필의 정치연합이 그랬듯, 권력을 분점한다는 점에서 비지론도 민주대연합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연합정치에 대한 보다 정확한 명칭은 ‘민주(Democracy)-진보(Progressive)대연합’이 되는 셈이다. 97년 대선에서의 DJP 연합에 빗대어 표현하면 ‘DP 연합’인 셈이다.

    ‘진보 형이상학’ – 김규항/손호철 교수의 인식론적 공통점

    진보딱지 논쟁의 두 번째 논점은 ‘진보’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김규항과 손호철 교수의 인식론적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리버럴(개혁)은 리버럴(개혁)이고, 진보는 진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감히) 영역을 넘어오거나 상표권을 도용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김규항과 손호철 교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양자 공히 진보 개념을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올려놓는다. 그러나 진보는 ‘역사적’ 개념이며, 동시에 ‘상대적’ 개념이다. 

    먼저 진보는 ‘역사적’ 개념이다. 예컨대, 1776년 『국부론』 집필을 통한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테제는 당시 절대 왕권의 독점에 맞서며 중소상공인의 이익을 옹호한 ‘진보적’ 주장이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노동귀족으로 불리던 숙련공의 배타적 작업장 권력에 맞서며 반(半)숙련공의 취업기회 및 임금을 확대했던 1900년대 초반의 포디즘의 도입 역시도 당시에는 ‘진보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물론 아담 스미스 주장과 포디즘은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한 이후에는 ‘보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또한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기도 하다. 반제-반미주의와 공산주의적 기치를 내세웠기에 이념적 스펙트럼상 ‘왼쪽’(=좌파)라고 볼 수 있는 김일성-카다피가 더 진보적일까? 아니면 독일 기민당 등의 유럽식 자유주의 및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더욱 진보적일까?

    이는 정치적 가치판단에 따라 논쟁적이겠지만, 스펙트럼의 위치로만 보면 유럽식 자유주의가 김일성-카다피보다 더 오른쪽이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은 유럽식 자유주의(및 사민주의)가 더욱 ‘진보적’이라고 본다. 

    ‘학문적 진리’와 ‘정치적 진리’의 구분 필요

    위에서 지적한 것은 김규항-손호철 교수의 진보 개념이 갖는 철학적 문제점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점의 진짜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점은 김규항-손호철 교수 모두가 공히 진보 개념을 둘러싸고 ‘학문적 진리’와 ‘정치적 진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설령 그들의 진보 개념이 맞을지라도 변함이 없는 것인데, 대의정치 및 선거라는 공간의 인식론적 특징은 진리 판단을 ‘학자=인텔리=철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대중=국민=유권자’에게 위임한다는 것이다. 즉, 진리 판단의 최종 주체는 ‘대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핵심에 관한 문제이며, 정치전략 수립의 인식론적 근간을 이루는 문제이다. 

    전자는 진리를 독점하려고 하며 결과적으로 국민대중에게 ‘가르치려고’ 하게 된다. 이는 인식론적 필연이다. 반면, 후자는 잠정가설(=정견=정치적 신조)는 분명히 갖고 있되, 진리 판단의 최종 결정권을 대중에게 위임한다. 그렇기에 후자의 집단은 선거 결과에 복종하고, 선거를 정견의 실험공간이자 동시에 성찰의 공간으로 사고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김규항-손호철 교수는 ‘인텔리적 진리관-인텔리적 정치관-인텔리적 진보관’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 한국 진보운동권들의 다수가 갖고 있는 정서적-인식론적 특징이라는 점이다.

    가까운 예로, 2010년 지방선거 참패의 원인이 ‘선거연합’을 부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사후적으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진보신당은 이를 문서를 통해 ‘공식화’하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이것은 솔직하지도 못하고, 성찰적이지도 않으며, 오류를 인정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러한 진리 판단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자세야말로 진보정당이 오늘날 고작 ‘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론적 근본 지점이다. 이와 같이 진보파가 ‘진보 개념’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려 들면 들수록 ‘국민대중’(=혹은 민중=혹은 노동계급)의 진리 판단 권한을 무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국민대중과 민중과 노동계급이 그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인식론적 본질 

    사실은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론 역시 ‘플라톤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에게 정당은 플라톤이 말한 ‘철인 정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지점은 김규항-손호철 교수와 유사한 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정당은 좋은 정치에 선행한다”라는 테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 그리고 그와 학문적 입장을 같이하는 그룹의 정당정치론은 김규항식 인식론과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유권자 및 선거에 대한 ‘책임과 반응’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정당과 리더(=정치지도자)를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행위주체로 보고 있되, ‘최종 결정권’은 선거에서 드러난 유권자의 판단(=민심)에 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책임과 반응’이다. 

    한국의 진보파는 오랜 세월 소수파의 역사를 살고, 그리고 역사적-이념적으로 레닌주의적 유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위’를 자임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이다. 이제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를 단지 ‘투쟁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보다 ‘철학적-인식론적’ 영역에서 심화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진리 판단의 최종 결정권자는 유권자=대중=민중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철학적, 인식론적 본질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레닌이 즐겨 인용했던 괴테의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푸르른 것은 저 생명의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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