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답게 살려면 모난 돌이 되자"
        2011년 03월 11일 09: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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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은 있는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소위 ‘상식’이 꼭 사리에 맞지 않은 하나의 경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와 같은 류유의 속담들이 나온 역사적 배경이야 십분 이해가 돼요. 한반도에서는 – 매우 아쉽게도 – 민이 관에 대해서 완승을 거둔 적은 없었어요.

    사리에 맞지 않는 ‘상식’

    왕조, 즉 ‘관’ 조직의 교체 경험도, 외세의 영향에 기댄 급진적인 개혁의 경험(해방 직후의 이북 지역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요)도, 1987년과 같은 미완의, 아주 미완의 혁명의 경험도 있지만, ‘민’은 그래도 한번도 ‘완승’을 거두지 못하고 만 것에요.

    기존의 서열들이 잘 해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범상'(犯上)을 생각하기가 두렵고, 범상할 것 같은 ‘모난’ 성격이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거기에다 여태까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실제로 살아온 환경이란, 도시화 이전의 엄격한 장유유서 질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마을 사회나, 도시화 이후 개발독재의 문화 정책에 의해서 장유유서 식의 위계를 엄격하게 잡은 학교나 직장 등의 ‘조직’들입니다.

    ‘조직형(型) 인간’의 최고의 덕목은 "둥글게 둥글게 행동하기"죠. 물론 후배나 부하에게는 꼭 둥글게 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2008년6월에 <이코노미21>에서 나온 한 직장인 여론조사의 자료에 의하면 약 60%가 ‘후배 군기잡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했어요.

    그 군기잡기의 형태들은 선진화돼가는 대한민국의 문화 다양성만큼이나 제각기 다양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야구방망이로 때리기나 운동장 돌게 하기, 무릎꿇리기 등은 현대판 ‘천민’, 즉 저학력 육체노동자나 여성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국한되는 듯하고, ‘양민’, 즉 고학력 남성 사원 사이에서는 주로 ‘버럭 화내기’ 정도로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부하에게는 둥글게 하지 않아도, 이 조직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들은 상사에게는 정말 비교할 수 없이 둥글게 대합니다. <이코노미21>의 같은 기사에 의하면 직장인 96%가 상사의 사적인 부탁까지도 들어준다고 하네요. 커피 심부름은 기본이고, 상사가 강추하는 보험에 가입하거나, ‘가족에 거짓말 대신해주기’까지 별 문제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상사하기 참 좋은 나라, 대한민국’, 국제홍보의 좋은 거리일 것입니다.

    개인적 경험

    그런데, 이렇게 둥글게 사는 것은 정말 심신 건강에 좋은가요? 솔직히, 제 개인적 경험으로 봐도 꼭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상사에게 습관적으로 미소를 짓고 ‘절대적으로 비위에 거역하지 않는’ 언행으로 일관하는 것은 당분간 득이 될는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심한 상처를 남겨 평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죠.

    제 경우를 소개하자면, ‘평생’까지는 다행히 망가지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둥근 처신으로 심한 심적 외상을 입긴 했습니다. 약 13년 전에, 국내 한 사립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을 때에 그 대학의 ‘만능’ 총장과 관계가 있다 싶은, 즉 ‘권세’를 부릴 만한 위치에 있었던 같은 과의 한 교수는 제게 – 본인이 총장의 요구로 번역했어야 할 – 문건의 로역(露譯)을 시켰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씀입니다.

    저는, "나중에 총장이 직접 부탁했으면 하겠다"라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 때 시킨 대로 했습니다. 왜 그렇게 순종했을까요? 혁명 정신을 거의 잃어, 관료화, 소시민화돼버린 말기의 소련에서 ‘집단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공포를 익혀서 그런 것이었을까요?

    ‘권세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바닥 닦는 걸레쯤으로 취급하곤 했던 그 당시 그 직장의 일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좋지도 않았던 그 직장마저도 잃어 다시 급격한 자본화로 엉망진창이 된 러시아로 쫓겨나면 가족이 다 풍비박산될 것 같은 원초적 공포심 때문이었을까요?

    이유는 복합적이었겠지만, 결과는 좌우간 비참했습니다. 그 뒤로는 그 에피소드를 자꾸 떠오르게 되었고, 그 때마다 자신의 나약한 비겁함에 대한 자기혐오를 느끼곤 했습니다. ‘둥글게’ 하다가는 전형적인 ‘심적 외상’을 입은 것이죠.

    비정규직 교수들의 악몽

    사실, 제가 본 피해(?)는, 어떻게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심부름부터 논문대필까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수많은 동료 비정규직 교수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걸레 취급’을 받아온 그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악몽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을까요? "둥글게 둥글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신을 얼마나 파괴했을까요?

    한 가지 오해를 미리 방지해야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절대 다수의 일반 중생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의'(矣)자 하나 잘못 뺐다고 해서 밥줄인 신문 기고를 단연코 포기한 단재 선생님이나, ‘돌집'(일제 총독부)를 상대하느니 배급을 그저 포기하고 말년에 영양실조로 천천히 죽어간 만해선생님과 같은 ‘모난 위인(偉人)’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단재나 만해처럼 비타협적 ‘개인 반란’을 잃으키자면 일단 아사(餓死) 쯤을 각오해서 해야 하는데, 이는 범상한 중생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단재나 만해는 사표(師表)지 현실적 모델은 – 아쉽게도 – 되기가 힘들죠.

    그런데 ‘개인 반란’은 어렵더라도, 착취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둥글게 둥글게" 굽실굽실했다가 나중에 화병이 쌓여서 일찌기 건강을 잃어 고통스럽게 죽어나가는 것보다 집단 행동이라도 벌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직장단위 별로 비정규직들끼리 "충성 경쟁을 포기한다"고 서로 서약하고, 관리인들에게 공과 사의 철저한 분리, 사적인 착취의 근절을 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난 돌이 담 쌓기 좋고 예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 교육일 걸요.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적당히 모난 돌이야말로 담 쌓기에도 좋고 예쁘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즉 ‘상황 파악/대처 능력’과 아울러 강직함, 그리고 인간적 존엄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은 좋지 않겠습니까?

    아주 미안한 이야기지만, 궁극적 차원에서 본다면 "둥글게 둥글게 산다"는 것은 노예로 살다 죽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생적으로 노예가 아니기에 이렇게 자신의 존엄성을 죽여가면서 산다는 것은 결국 불필요한 고통의 길일 뿐입니다. 인간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주로 하는 참다운 교육을 통해서 이 고통들을 방지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책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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