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들 '결혼파업' 돌입했나?
        2011년 03월 09일 07: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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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혼에 대한 젊은 좌파 남자들의 대화는 십중팔구 미궁으로 빠진다. ‘반동’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 남자들이 기본적으로 엥겔스의 1884년(『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 출간된 해-편집자) 문제 제기를 따라야 한다는 강박을 염두에 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현실정치에 대한 굵고 짧은 초식이 난무하던 남탕 술자리가 이윽고 진상으로 접어드는 단계에 항상 "전 애인" 이야기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술자리의 끝부분

    이른바 ‘붉은 고전’으로 더 이상 자신의 경험을 변호할 수 없을 때, 그리고 때마침 섭취한 알콜의 양이 치사량에 도달할 때쯤, 이들은 앞을 다투어,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도, 고백조로 연애부터 출산을 아우르는 결혼에 대한 자신의 한탄을 털어놓고 있지 않는가.

    이 무소불위의 화두가 등장하면 좌중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갑자기 우울한 모노톤으로 바뀐다. 어떤 이들은 엄습하는 분위기를 진정시키려고 술잔을 쥐는 빈도를 높이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좌파로 살 것인가 남들처럼 결혼할 것인가” 같은 햄릿의 고민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이처럼 결혼 문제는 언제나 좌파 남자의 허를 찌르지만, 화려한 초식으로 장전한 그들이 유독 결혼 문제에서만은 젬병인 건 어제 오늘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2.

    서른 줄의 젊은이에게 결혼 자체가 부담인 세상인 건 사실이다. 특히 생계에 빠듯한 임금을 받는 불안정노동자에게 결혼식과 예물, 집, 육아는 카드 리볼링이나 각종 사금융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로 이해되거나 애당초 포기한 사치일 뿐이다.

    제 아무리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대해 초단위로 고심하는 좌파라 할지라도 개인의 생존문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의 관계란 개인의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렇게 관계를 통한 상실감의 회복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면, 이상화된 관계를 갈구하면서도 실제로는 불평등하고 폭력적으로 왜곡된 일시적 관계를 과도하게 생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노동해방 이후에나 결혼?

    물론 이 문제가 원천적으로 후기 자본주의의 속성이 빚은 구조 때문에 보편화된 것이며, 결국 좌파정치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분석을 내리는 것은 유의미하다. 문제는 상황이 이러다보니 젊은 좌파 남자들이 그러한 ‘근본 문제’의 해결을 이유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애계획을 ‘노동해방’이나 ‘자본주의 철폐’ 이후로 미뤄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묵직한 슬로건이 항변하는 문제가 풀리면 결혼과 출산, 육아 같은 문제가 자동으로 풀린다고 생각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다양한 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는 운동이 같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애당초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거나, 그 판에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석연치 않다는 것은 좌파가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나?

    3.

    반면, 작년 여성의 날 메인 아젠다는 ‘출산파업’이었다. 신체에 대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로막는 장벽과 결혼과 출산/육아에 필요한 분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출산이고 뭐고 다 멈추겠다는 것이 기본 골격이지만, 이 선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출산과 육아가 여성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활동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역할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밀라노나 워싱턴의 우파들마저도 낙태가 저소득과 관계가 있다며, 낙태 반대 보조금을 지불하는 결정을 내릴 만큼 외국에서는 출산을 사회적 문제로 이해하는 기본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도 보편적 복지를 단숨에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무상급식에서 육아가 갖는 사회적 계급의 교차로가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 아닌가.

    출산파업과 결혼파업

    현대사회의 결혼과 출산이 기본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매년 30만 쌍 이상이 결혼을 하고, 여성 1명 당 1.2명을 출산하는 나라에서 좌파가 결혼이나 가족문제를 부수적인 위치에 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성들의 출산파업 얘기를 두고 보면, 남자들도 결과적으로는 이미 ‘결혼파업’에 돌입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그 파업현장에는 파업구호나 파업 슬로건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호 없는 파업은 강제로 실직해 망연자실한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법이다.

    하기야 잘 살펴보면, 슬로건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파업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은 없고, “자본주의 반대”와 “이명박 반대” 구호만 가득 차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반MB 전선’에 대고는 밤새워 비판할 수 있지만, 자신의 결혼과 육아에 대해서는 뭘 요구해야 할지, 또는 어디에 요구해야 할지 도통 모르는 이 사람들이 술을 진탕 퍼마시고 나서야 자기도 결혼하고 싶노라고 고백하는 예비 아빠들인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좌파 아빠가 되기 위한 준비로 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설마 마음 속으로 ‘출산 파업’ 같은 건 여자들이 도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이지, 아니겠지?

    4.

    파업은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멸지향적’ 운동방식이다. 강렬한 파업은 운동의 선명한 기억을 남기지만, 항상 파업하는 현장이란 존재 불가능하고, 평생 파업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처럼 결혼과 출산에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결혼파업’은 한시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다.

    파업에 사회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알랭 리피에츠의 주문처럼 새로운 정치적 구호를 도입하고 사용하는 ‘사회적 생산’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게다가 결혼과 출산은 근본적으로 타나토스(죽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에로스(생성)을 지향하는 삶의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70년대부터 ‘사회적 육아’ 개념을 도입하는 등 인식의 수준이 우리와 사뭇 다르긴 하지만, 스웨덴은 남성의 육아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일가족 양립정책을 노사정이 합의함으로써 이 문제의 해법을 마련한 경우다.

    어설픈 소리 늘어놓을 시간에…

    거의 모든 사회가 출산과 육아를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부 육아휴직의 일부를 아버지가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여 아버지의 육아 참여를 강제하는 ‘아버지의 달’을 도입하는가 하면, 여전히 남성에게 임금이 높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부부 중 임금이 낮은 사람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때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 문제를 최소화시켰다.

    가족 내 성별분업과 가사노동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은 보편적 복지가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완전고용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적극적인 의제화와 정책적인 조치의 요구로 가사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본질적으로 해소한 스웨덴의 사례는 결혼문제를 여성의 문제에 가두지 않고, 출산과 육아에서의 남성의 책임과 참여에 대한 접근법을 환기시킨다.

    “난 나중에 요리도 하고, 청소도 잘 해주겠다”는 어설픈 소리를 늘어놓을 시간에 요리나 청소를 열심히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좌파답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말이다.

    5.

    언젠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몸을 얹게 될 좌파들을 전제로 쓴 글이지만, 그들만이 이 내용의 대상은 아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금욕주의로 가버리거나 프리섹스만을 줄창 외치며 기혼자나 가족관계에 관심없다는 걸 쿨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혼인을 비롯한 가족제도 자체를 없애야 할 인습으로 보는 일부 좌파들은 사회적 가족을 들여다 보며 결혼을 비롯한 가족제도가 개인의 신념에 기초한 선택사항일 뿐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웰컴 투 더 리얼 월드”라는 인사를 보내는 게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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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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