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만에 걸려온 전화 한 통
        2011년 03월 02일 08:05 오전

    Print Friendly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數萬)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소 깨닫는 그것/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규원 시 ‘만물은 흔들리면서’ 전문) 

    또 그렇게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80년대를 광주항쟁이 열었다면 90년대는 노동운동이 열었다. 뒤에 쓰겠지만 2000년은 민주노동당의 결성으로 시작된다. 나는 역사란 우리 모두가 온 몸으로 써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시기를 살았던 모두의 힘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온 셈이다. 네가 대학생이 된 2011년은 뒤 돌아보면 또 어떤 역사가 되어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바로 역사’인 셈이다. 

    노동운동의 급속한 성장 

    90년대를 맞이한 노동운동은 더 이상 80년대의 그것이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넘어선 힘과 조직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업장별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등을 거쳐 마침내 민주노총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뭉친다.

    해방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을 거쳐 모든 대통령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전국조직을 노동자 스스로 만들었다. 무수한 탄압과 그에 맞선 저항들이 있었다. 민주노총은 그런 탄압을 뚫고 만든 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합법적인 조직으로 인정받게 된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온전히 ‘연대’의 역사다. 90년 1월 전노협이 출범한 이래 사무직을 중심으로 한 업종회의,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연대회의, 그룹별 조직의 출범 등 민주노조 진영조차도 대공장, 중소기업, 사무직 등으로 나뉜 채 발전해 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연대를 실천해 왔다.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88.8),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88.12), ILO 공동대책위원화(91.10),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93.6), 민주노총준비위(94.11.13) 등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도 50미터가 넘는 높은 곳에서 농성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천막농성을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과의 연대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고야 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군인정치의 퇴장

    그 사이 두 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마침내 군인 출신 대통령은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민주화 투사였던 김영삼, 김대중 두 명의 대통령 모두 보수 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딱 그만큼 역사는 후퇴했다. 과거는 청산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이명박 대통령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10년이 좌파의 정치였다고 선동을 해댄다. 과연 그럴까?

    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노동자들의 7~9월 투쟁이 남긴 민주화 정신으로 본다면 나는 오히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정치권력은 잡았을지 모르지만 사회경제적인 권력은 여전히 소수의 손에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초기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아랫목이 따뜻해지면 점차 윗목도 따뜻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즈음 내가 만난 실업자들은 “지금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가정이 무너진 다음 경제가 살아서 뭐하나?” “실업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실업자가 먹을 것은 분노요, 실업자가 사는 길은 투쟁뿐이다.”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현재 한국 사회를 보아도 윗목이 따뜻해질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집권에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90년대 내내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독자적인 노력이 있었다.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고군분투라는 단어가 딱 맞다. 그나마 대통령 선거의 좌절을 딛고도 조직을 유지 발전시켜 온 노력들이 이후 2000년대 진보정치의 싹을 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점만 기억해 두자.

    한 통의 문자, 그리고 긴 역사 

    돌아보면 무수히 많은 싸움에서 패배를 했던 것 같다. 아니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무수히 많은 투쟁을 했고, 이기기보다는 더 많이 졌다. 길게 보면 동학혁명의 전봉준도, 3월 1일의 류관순도, 광주항쟁의 윤상원도 당장의 싸움에서는 졌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이 또 싸움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 도대체 투쟁은 무엇을 남기는 거지? 

    “친구야 잘 있지. 오늘 좀 전에 삼십년 만에 정말 봐야만 하는 80학번 친구와 통화가 이뤄져서 무척 흥분되고 기쁘단다. 1982년 봄 3학년 2학기인 9월에 난 힘들었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연출을 맡아 힘든 싸움 중이었어. 너무 큰 대작을 아무 겁 없이 맡았다가 그 무게에 짓눌림 당하던 시절이었지.  

    공연을 삼일 남겨놓고 예술대학 좌측 문을 나와 학생회관 루이스 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좌측 흰색타일 건물 문리대 삼층서 한 학생이 유리창을 깨고 나와 밧줄에 매달려 공중서 유인물을 뿌리며 크게 외치고 있었어. ‘군부복재 물러가라’고 민주화를 외쳐대던 그 학생.

    좀 전에 통화했던 문예창작학과의 이근원이라는 그 학생이 밧줄에 매달려 그 숨 막히는 교정서 큰 소리의 울림을 토해내고 있었지. 난 그의 힘찬 음성을 들으며 두 달 넘게 연습하며 나의 예술적 한계를 끊임없이 느꼈던 그 루이스홀로 연출자인 나를 기다리는 배우와 스탭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지.  

    루이스 홀 일층의 정문을 들어가려는 순간 ‘아악’하고 들리는 친구의 외마디 음성.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문리대 쪽으로 뛰쳐나와 올려다 본 그곳엔 사복경찰과 백골단에게 가차 없이 뭇매를 맞으며 끌려 내려오는 내 친구가 있었다. 난 극장으로 뒤돌아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수많은 경찰에 끌려가는 친구에게 달려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 82년 9월의 흑석동 중앙대 교정 속에 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가슴 속 한 구석에서는 나의 회색인간처럼 굳어진 비겁함이 끊임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 부끄러움이 들 때면 친구가 그렇게 매 맞으며 끌려갈 때 단 한마디 단 한주먹의 울부짖음도 행동하지 못한 그 부끄러움이 들 때면 가끔 한숨 토해 놓으며 미안해했던 내 가슴 속의 친구. 오늘 그 친구와 통화를 했단다.

    대전서 민노총 산하 기관서 일하고 있다고. 조만간 만나 회포 풀기고 했어. 그래서 그 동안의 그리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내 마음 속 감정도 많이 소용돌이 치고 있네, 오십 넘어서라도 만나니, 이렇게 통화라도 하며 나의 그 무거웠던 솔직한 심경을 얘기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지. 칠십 넘어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오늘이 그런 오후야 친구야.”  

    얼마 전 대전으로 내려가는 중에 전화 한통을 받았다. 조심스런 존댓말로 정말 내가 맞는지를 물었다. 그는 연극영화학과에 다니던 강정수라는 친구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와 같은 내용이 문자로 왔다. 한마디가 더 덧붙여졌다. 

    “근원아, 위 글은 우리 중대 80학번 친구에게 통화 후 보낸 글이다. 내가 이 대한민국서 그 무참했던 이십대를 거쳐 살아낸 삼십년 동안 부단히 넌 내 가슴 속 한 곳에서 끊임없이 나의 비겁함과 불의에 항거해 준 횃불이었고 생명력이었음을 오늘 난 이 글을 통해 고백하며 그동안의 마음의 미안함과 함께 용서를 구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 “용서를 구한다.”고 했지만 문자를 받은 내가 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폭압의 시기를 살았던 역사 속에서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이지?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 둔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말에 오히려 내가 더 감동했다. 역사를 짧게 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새삼 그 친구를 통해 배웠다. 

    은지야, 어떤 투쟁도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다. 촛불 집회를 할 때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과 그 아이들을 보았다. 너와 네 친구들과 함께 시청 주변을 걸으면서 다시 역사를 생각했었다. 언젠가 너희도 촛불을 말하면서 더 거대한 힘으로 또 다시 역사를 바꿔 나갈 것으로 믿는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2000년대를 쓰기 전에 하나만 더 기억하고 넘어가자. 99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천년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데올로기 공세는 어느 때보다 극성스러웠다. ‘희망의 천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천 년을 돌아보면서 그 시절을 관통해 온 기나긴 고통이 사라지기를 누구나 바랬다.

    그러나 IMF 이후 우리 사회 전체가 바뀌고 있었다. 누구는 87년 체제가 정치체제를 민주화시켰다면, 97년에는 경제체제가 신자유주의체제로 전환되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우리 곁에 다가왔다. 

    자본과 정권은 항상 ‘언어 장난’을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말도 그 뒤에 숨어 있는 잔혹한 착취를 감춘다. 고용의 ‘유연화’란 곧 비정규직 양산이고, 구조를 조정한다는 말은 정리해고를 말한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역시 “정리해고, 민영화,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 노조활동 억제, 시장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다자간 무역협정, FTA, 금융 세계화” 등을 감춘 말이었다. 

    다소 어렵게 들리겠지만 네가 기억하고 있는 2009년 용산 참사는 이런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일부인 도시재개발과 경찰들의 폭력적 진압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그리고 2009년 쌍용자동차 평택 투쟁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에 대한 생산현장에서의 저항이었다.

    현재를 지배하는 많은 부분은 사실 90년대 말에 규정되어진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쉽게 말하면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뒤집어 씌우는 과정이 계속 진행 중이다. 노동자들은 농성과 단식, 심지어는 파업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가진 ‘정책기조의 변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IMF가 낸 협상안을 받아들이면 다 죽는다.”며 재협상을 요구하겠다던 대통령은 공권력 투입으로 답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국가 파산위기를 몰고 올 IMF 재협상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던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같은 길을 간 셈이다. 더 열심히 싸워 세상을 바꾸지 못한 채 이런 사회를 맞도록 한 우리의 잘못이 크다. 

       
      ▲미셀 캉드쉬 IMF총재와 건배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인생은 기다림이다  

    네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내가 많이 한 말이 있다. 엄마는 유난히 ‘밥’을 강조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운동의 기억 때문인지, 돈 땜에 맘이 상한 일이 많아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유독 ‘기다림’을 많이 말했다. “은지야, 인생은 반은 밥이고, 반은 기다림이다.”라고 아직 한참 어린 네게 말하곤 했었다. 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까? 아님 지금이라도 그 뜻을 알까?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역사는 앞으로 전진한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는 게 역사라고 믿는다. 눈동자 하나만 크게 그려놓고 “자유를 바라는 이 눈은 언제나 자유를 보게 될까요?”라고 대학 1학년 때 일기장에 썼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지금보다 나은 날들이 올 거라고 믿으며, 그 날을 기다려 보자.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좋은 결과를 맺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면서.

    * 이번 글 40회를 마치고, 2000년 이후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은 필자의 사정으로, 준비 기간을 거친 후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