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선의 재구성' 빠졌다…핵심은 정치
    사회운동적 정당→국민정당 노선으로
        2011년 02월 26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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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진보신당 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토론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다들 ‘진보의 재구성’이라고 하면서 ‘가치의 재구성’과 ‘세력의 재구성’을 얘기한다. 빠진 것은 ‘노선의 재구성’이다. 노선의 재구성은 재구성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경로에 관한 문제이며, 그 핵심은 ‘정치’다.

    민노당 초기 당직-공직 겸임금지 잘못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을 별 비판 없이 수용해 왔다. ‘정치’는 뭔가 타협의 냄새도 나고, 사회변혁이라는 원칙적 가치를 훼절할 수도 있는 꺼림칙한 것이니까 ‘운동’에 의해 견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노동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정당이다. 그들은 사회운동만으로 안되니까 정당을 만들었다. 그런데 다시 정당을 사회운동적으로 하자고 한다. 뛰자고 해놓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찬다.

    민주노동당 시절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의 대표 상품이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하는 제도’였다. 취지는 당의 원내 정당화를 막고 원외 구심을 둔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을 관철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당의 대표적 리더십들은 당권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분리되었고, 당권은 정치적 권위나 리더십보다 조직력으로 장악하려던 패권 정파에게 넘어갔다. 이른바 ‘도당(徒黨)’에 의한 정당의 지배가 관철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은 자신의 신념윤리, 혹은 그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리더십 있는 정당’을 부정하는 반정치주의적 노선으로 귀결된 것이다. 우리는 비정규직을 위한, 비정규직 당이 되겠다는 사회운동적 다짐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 진정 요구하는 입법 활동에서는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가질 수 없는 상태로 장기간 정체되어 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당을 선택한 초심, 중앙 정부든 지방 정부든 집권을 통해 권력을 선용하겠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수권’ 정당 노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최근 성남시장과 노원구청에서 민주당 소속의 기초단체장들이 권력의 힘으로 300여 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민주당 구청장이 정규직화 해준다

    진보정당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비판받고 있는 민주당 소속 구청장들이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이와 같이 ‘정치의 방법’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정당이라는 독특한 조직을 선택한 이유다.

    노동운동과 풀뿌리 주민운동의 성장을 돕고, 또 그곳으로부터 자원을 공급받는 관계는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이라는 사회운동과 중첩되는 애매한 노선을 취할 때보다, 수권정당 노선을 분명히 할 때 훨씬 넓고 활발한 대사 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진보신당의 당역량 강화 ‘종합실천계획안’에 부각되고 있는 ‘강한 정당’의 의미도 강력한 수권 능력을 보여주는 정당이라는 의미로 읽어야지,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수세적으로 지키고 그 방어막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정당으로 읽을 수는 없다.

    장애인, 여성 등 할당제를 경직되고 운영하는 것도 ‘가치’와 ‘이념’에 사로잡혀 유연성을 잃은 반정치적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장애인,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제대로 대표해 달라는 것이지, 대표가 장애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의석이 20석, 30석으로 많아질 경우 할당의 여지는 생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교조적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운동권 정당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샤츠 슈나이더의 말로 이 부분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정당은 자신보다 작은 조직이 갖고 있는 많은 특질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 나름의 압도적 자산 한가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국민정당 노선으로 재구성

    두번째 문제는 국민정당 노선으로의 재구성이다. 민주노동당 분당 이전 국민경선제의 도입 논쟁이 있었다. 대선후보 선출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당시 이 논쟁은 당내 패권정파 쪽에서 ‘민중경선’이라는 방식이라는 자신들의 대중조직을 최대로 동원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논쟁이 정파적으로 왜곡된 측면이 있지만, 조금 더 따지고 들면 이 문제는 국민정당 노선과 계급정당 노선간의 대립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당시 국민경선제 도입을 반대하는 토론을 했었다. 그러나 당시 조금만 더 숙고했더라면 국민경선 방식의 도입을 세련되게 채택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즉 당원들에 의해 2배수 정도의 후보군을 압축하고 여론조사 방식으로 최종 후보를 선택하는 절충형을 채택하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은 강령에서 계급연합정당, 즉 국민정당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이라는 주력부대의 튼튼한 기초 위에서 국민정당노선을 관철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활동 당원들의 정조는 계급정당적 노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정당 노선의 위험성은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포괄정당’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념적 정체성이 희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철의 법칙으로 관철될 것이므로 국민정당 노선을 폐기하고 계급정당 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얘기하지 않는다. 국민정당 노선은 진보정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우리의 이념과 가치를 국민 대중속에 확장해 나가는데 있어 점진주의, 누적주의를 채택하겠다는 얘기지 자유주의에 투항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념적 정체성의 희석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이념과 가치에 관한 문제 또한 인간을 위해 이념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념과 가치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면 이념과 가치를 교조적으로 해석할 이유도 없다.

    "진보세력의 경우 대안적 이념은 ‘지금의 현실이 개혁된 내일의 현실’을 추상적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대규모 집합행동을 이끌고자 하는 진보세력에게 ‘확신의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정당에서 이념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정당들이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념은 그런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합리적 기제 가운데 하나다. 이념이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이념을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박상훈 『정치의 발견』, 148쪽)

    비판적 지지 대 독자후보 구도 비생산적

    비판적 지지와 독자후보 노선의 대립도 여전히 양극단만 존재한다. 독자후보나 독자 완주가 아니면 비판적 지지라고 단정하는 논쟁구도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지난 2008년 심상정 후보의 고양 총선 출마 당시 심상정 후보보다 훨씬 낮은 지지율을 가진 민주당 후보가 심상정 후보에게 단일화를 제안했고 심상정 후보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활동가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세력과 선거연대를 할 수 있느냐며 격앙했다. 그 때 분위기에 비해 ‘연합정치’를 얘기하는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도 아니면 모’ 식의 논쟁구도를 이제 갓 탈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논의 지평을 독자 완주냐 비판적 지지냐를 넘어 진보정치세력의 집권을 위해 노동계급 형성 전략의 문제로 접근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한다. 진보정당의 성장 여부는 노동계급운동의 성장 여부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노동계급운동은 노동계급의 양극화와 산별노조의 미성숙으로 고통받고 있고, 정체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노동운동 자력으로 이런 상황을 돌파하긴 어렵다. 길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정치의 능동적 역할이 있다.

    2012년 정치질서 재편기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자력으로 집권할 수 없다. 따라서 강한 연합정치의 자장이 형성될 것이고 진보정치세력의 힘의 크기에 따라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과 파견법 폐지, 동일임금 동일노동을 비롯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합의를 이룸으로써 노동계급 양극화를 저지하고 노동계급 형성 전략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제는 세력과 노선의 재구성

    복지국가 정치동맹 또한 계급형성 전략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나아가 산별교섭의 법제화와 협약 구속력을 사회화시키는 제도적 장치(예를 들어 지역적 구속력)에 대한 입법 합의를 통해 노동운동의 정치적 돌파도 이루어 내어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 야권연대라는 계기를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연립정부 구상 또한 이런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세력의 재구성은 노선의 재구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가치의 재구성은 이미 진보신당이 신좌파적 다원주의 가치를 수용하면서 재구성해 온 것이다. 하지만 세력 재구성에 실패했고, 노선의 재구성도 진지한 성찰이 없었다. 따라서 남은 과제는 세력의 재구성과 노선의 재구성이다.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완벽한 해답을 찾기 어렵더라도 기왕 주어진 기회에 우리는 그간 우리 실천을 객관화해서 냉정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게 아니면 또 과거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2월 26일 진보신당 전국위원회와 3월 27일 당대회에 많은 이들의 눈이 쏠려 있다. 우리에게 기회가 많지 않다. 한걸음 한걸음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전국위원과 대의원들의 어깨가 무겁다. 조승수 당대표의 리더십이 살아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 일정을 고려한 연내 통합이라는 대원칙을 합의하고, 어차피 상대가 있는 게임이므로 구체적인 교섭은 지도부에 위임하자.

    진보 통합과 야권연대와 관련해서는 5차방정식 보다는 2차 방정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최소한 진보 3당중심+@의 통합, 국민참여당과는 공동선거기구를 통한 연합공천, 민주당과는 후보 단일화 협상의 방식으로 총선에 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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