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혜 교수를 위한 변명
        2011년 02월 22일 12: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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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친구 우한기님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본인의 동의 하에 올린다. 그는 시대가 앓는, 그러면서도 병이라 여기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용기에 대해 말했다. 4대강 같이 큰 일도 문제지만, 삶이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는 구조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것도 절실하다고 했다.

                                                      * * *

    그녀는 정말 억울하다
    지금껏 배워오던 방식, 가르쳐오던 방식대로 했을 뿐이다.
    배에 힘주라고 때리고, 등 펴라고 때리고 하는 건 늘상 받던 것이고, 하던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인가에서 역도 경기를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선수 뺨을 감독인가 코치인가가 사정없이 때리는 걸 봐서다.
    어렴풋이 집중하라고 그런가보다, 면서도 꼭 저래야 하나 싶었다.
    차에 정구 감독이 선수들을 구타한 걸로 시끄럽기도 했다.
    그러다 영화 <킹콩을 들다>를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김인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사 하지 않는다고 때린 것도, 아마 그녀로서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워왔을 터이고,
    그게 제대로 된 가르침이라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김인혜와 같이 동문수학한 이들이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며 반박성명을 냈으니 이 또한 가려야 할 문제로 남았다)
    ‘티켓 강매’라지만, 그 역시 은사의 공연은 당연히 보러 다녔고,
    다른 교수들도 다들 그렇게 하는데 하필 나만 당한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수업 결손 부분도 그렇다.
    음대 특성상 공연 같은 게 있으면 수업하기가 정말 힘들다.
    명목상의 수업과 실제 수업이 일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 역시 터진 김에 덧붙여지는 결함으로 여겨질 것이다.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일종의 관행과 같은 것인데,
    몽땅 묶어서 나 한 사람에게 다 덮어씌운다는 느낌일 것이다.
    음대 학장은 “음대 특성상 도제 시스템을 바꿀 순 없지만, 이번 기회에 학생들이 교수를 선택할 방안은 찾아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금까지 다른 교수들도 김인혜와 마찬가지로 가르쳐왔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비슷했다는 것인데, 왜 이걸 한 사람에게 다 뒤집어씌우는가, 항변할 만하다.
    만약 그녀가, 이것이 정말 잘못이고 불거지면 매장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스타킹’이나 ‘여유만만’에 출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칼린이 뜨는 걸 보면서 제대로 된 음악이 뭔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름이 알려진 상태에서 사건이 터지면 이건 완전히 생매장되는 길이란 것쯤은 누구나 알 법한데도 그녀는 자신 있게 텔레비전에 나왔고, 수많은 사람에게 이름을 알렸다. 

    12월경부터 학교에서 조사에 착수했다는 것을 그녀가 과연 몰랐을까.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는 이 사건이 그리 큰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여 방심했으리라.
    그러나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산된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 ‘스타킹’ 때문에 그녀에게 감동했던 사람들이 배신감에 치를 떤다.
    매스컴 특유의 하이에나 근성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작동했고,
    일단 냄비에 들자 부글부글 끓는 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차라리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리라.

    성폭행도 아니고, 가르치다가 생긴 일로 이만큼씩 끓지는 않을 터.
    이건 두 말 할 것 없이 배신감이다.
    게다가 그녀는 또 기독교인이기까지 하다.
    이 나라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기독교인은 잘못하면 큰일 난다.
    누군가가 먹어야 할 욕을 다 뒤집어 써야 하니까.

    당황한 그녀는 온갖 언론을 상대로 변명, 항변으로 횡설수설한다.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비난인데다, 애써 쌓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는 데서 오는 당혹감, 무엇보다 믿었던 제자들에게 당했다는 배신감이 오죽 했겠는가.

    그러나 그 변명과 항변은 진창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길일 뿐이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이 문제가 심각할 줄 정말 몰랐다, 오랜 관행인 터라 별 고민이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수법은 물론 내 인성을 돌아보도록 하겠다, 용서하시라.’ 하지 못했을까, 싶지만 막상 당하지 않은 처지에서 함부로 할 말은 못 된다.
    누가 뭐래도 그녀 자신이 가장 억울하고 절통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테니 말이다.

    그녀가 놓친 게 있다.
    도제식으로 가르치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도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
    언젠가는 그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학생들이 나타난다는 것,
    그것을 부당하게 여기는 학생이나 부모가 학교 당국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누군가가 당했어야 할 그 일을 지금 김인혜가 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김인혜 개인을 떠나서 꼭 거쳐야할 과정이기도 하다.
    그 시대적 과도기에 따르는 진통을 하필 김인혜 개인이 겪어야 하니 이것만큼 억울한 일도 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조금 과했을 수도 있다’ 했지만, 바로 그 ‘조금’이 터져나오는 틈새가 돼버린 거다.

    아마 지금쯤 다른 교수들은 가슴들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다.
    나 아니라서 천만다행, 살살 때렸기 망정이지, 그러게 왜 나대? 하면서.

    만약 우리가 이 사건을 시대적 흐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면, 그런데도 김인혜 개인에게 이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할까.
    자수성가하여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한 한 인생을 이대로 파묻어야 속이 시원할까.
    배신감 때문이라지만, 사실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진 않았지 않은가.
    적어도 끓어오르는 냄비에 같이 휩쓸려들어가는 짓만큼은 좀 삼가야지 않을까.

    학교당국도 여론 눈치 보면서 한 사람을 사냥하는 것으로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학교 측에서도 이미 음대, 미대 같은 곳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어디 서울대뿐이고 음미대뿐인가.
    대학원생을 마치 하인처럼 부리는 풍토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것 아닌가.
    대학 강사들을 말도 안 되는 시급으로 부려먹는 짓은 또 어떤가.
    직장에서 상사 따라 일요일 등산에 동원되고, 억지로 술 마셔야 하는 것에는 왜 공적으로 분노하지 않는가.
    이렇게 쌓인 개인적인 분노를 한 사람에게 몽땅 퍼붓고 있지는 않은가.

    과도기는 언제나 희생양을 만들었다.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을 유독 티를 낸 한 사람에게 덮어씌우는 것 말이다.
    지금 김인혜가 그런 처지다.
    그러나 손가락질하는 그 손가락 끝은 내 부모, 내 선생, 내 목사, 내 스님, 내 상사, 내 직장을 향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와 상관 없는 한 여인에게 던지는 돌멩이가 정작 날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돌아볼 만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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