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미-중 전면적 갈등관계로
        2011년 02월 22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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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침몰은 전환기에 놓여 있던 동북아 질서를 신냉전으로 후퇴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불가피한 현상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행위자의 선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북풍 유혹’

    가장 중요한 행위자라고 할 수 있었던 이명박 정부는 초기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강경 여론 몰이와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북풍’의 유혹에 빠지면서 급격히 강경론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5월 20일 수많은 의문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했다”고 결론지었고, 5월 24일에는 사실상 남북관계를 전면 차단하고 대북 무력시위를 강화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동시에 이를 유엔 안보리와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등 국제무대로 가져가 ‘북한 규탄’을 목표로 총력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등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결론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면서 한국의 입장을 두둔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미 양국에서는 중국이 “책임있는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회피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고, 자신을 가해자 가운데 한 나라로 취급당한 중국의 반발도 더욱 거칠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7월 9일 유엔 안보리 성명(천안함 공격을 규탄하면서도 그 공격 주체는 명시하지 않았다)이 나왔지만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북-중-러 3국은 ‘6자회담을 하자’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대화보다는 무력시위를 선택했다.

    북한과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7월25~28일 동해에서 강행된 한-미 연합훈련 ‘불굴의 의지’에는 조지워싱턴호와 F-22 전투기, 독도함과 F-15K 전투기 등 양국의 최정예 군사력뿐만 아니라, 일본 해상자위대 장교들까지 동원됐다. 한-미-일 3국이 천안함 사태를 구실로 3각 동맹체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낳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 

    미중관계, 전면 갈등으로 

    천안함 침몰이 동북아를 가른 ‘지정학적 사건’이라고 일컬은 이유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동북아는 물론이고 세계 질서의 최대 변수로 일컬어지는 미중관계가 전면적 갈등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 들어 심상치 않던 미중관계는 미국이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함께 대규모 군사훈련을 강행하고 6자회담 재개를 꺼려하는 한편,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개입할 뜻을 내비치면서 정면충돌 조짐까지 보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는 미중 갈등의 상징물로 등장했다. 7월초 모항인 일본의 요코스카를 떠나 7월 하순 동해를 거쳐 8월에는 베트남에 정박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갈등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중국과 ‘세력권’ 경쟁을 최소화하고 ‘협력권’을 넓히겠다던 2009년 11월 오바마의 발언과 반대되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중국은 미국이 천안함 사태를 자신에 대한 군사적 봉쇄 강화의 구실로 삼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강력한 외교적 항의 및 경고와 함께 실탄 사격 훈련 등 대응사격에 나서는 한편, ‘항모 킬러’라고 불리는 항공모함 공격용 탄도미사일 개발을 공개하기도 했다. 

    미중관계가 1979년 관계정상화 이후 갈등과 협력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 이후 양국 관계의 양상은 두 가지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하나는 오바마가 중국에 대한 봉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뒤, 오히려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대중국 포위 및 봉쇄 정책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는 불만이, 미국 내에서는 중국에게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는 체념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의 차이점이 확인된 이상 신뢰 회복은 그만큼 어려워진 셈이다. 

    또 하나는 양국 관계가 ‘복합 갈등’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는 대체로 경제 갈등이, 부시 행정부 때는 외교안보 갈등이 주된 문제였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 이후에는 기존의 경제 문제와 더불어 외교안보 갈등까지 전면적으로 폭발했다. 상대적으로 수면 아래에 있었던 인권 갈등도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둘러싼 미중간의 신경전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깨진 금기, 한일 군사협력 

    둘째는 천안함 사태가 미일동맹 복원 및 한미동맹 강화, 그리고 한일 군사협력 강화로 이어지면서 사실상 한미일 ‘3각 동맹’으로 전환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미동맹은 ‘전략 관계’를 추진할 정도로 강화되어왔다.

    반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기축인 미일동맹은 하토야마 정권이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북부에 있는 헤노코로 이전하기로 한 자민당 시절의 합의를 번복하고 오키나와 밖으로의 이전을 추구하고 미국이 이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균열이 발생했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을 이용해 미국은 기존 합의를 관철하려고 했고, 하토야마 정권은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뒤이어 출범한 간 나오토 정권은 미일동맹 복원과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전까지 금기시 되었던 한일간의 군사 협력이 천안함 및 연평도 사태를 틈타 강화되고 있는 움직임도 주목된다. 작년 7월 하순 대북 무력시위의 일환으로 동해에서 실시된 한미 연합훈련에 사상 최초로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장교들이 참관했고, 10월 한국 주관으로 부산 앞바다에서 실시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훈련에도 일본은 호위함과 P3C 초계기 등을 투입했다. 또한 12월 3일부터 10일까지 실시된 미일 합동군사훈련 ‘예리한 칼’에도 사상 최초로 한국군 장교 4명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급기야 12월 중순에는 “한반도 유사시 한반도 거주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해 자위대 파견을 검토하고 있고 이를 위해 한국 정부와 협의하겠다”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발언이 나오면서 파문이 일었다. 또한 올해 1월 10일 방한한 기타자와 도시미 일본 방위상과 김관진 국방장관은 회담을 갖고 군수지원협정 체결을 우선 추진하되, 정보보호협정도 점차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이러한 흐름은 한일, 미일동맹으로 양자화되어 있는 미국 주도의 동북아 동맹 체제를 사실상의 한미일 3각 동맹체제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방 3국 대 북방 3국 갈등구조

    셋째, 한-미-일 3국의 대북강경책 및 동맹 강화 움직임에 맞서 북중관계가 ‘혈맹 복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단히 이례적으로 2010년 5월과 8월 중국을 연달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최고 지도부에 회동을 가졌고 중국도 고위 인사를 북한에 연이어 파견해 양국 관계 강화에 나섰다. 이를 통해 양국은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 한편, 대규모의 경제협력도 추진키로 했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 역시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대화 및 6자회담 재개를 적극적으로 촉구하고 나섰다. 이렇듯 북-중-러 북방 3국의 결속 움직임은 천안함 및 연평도 사태를 거치면서 한-미-일 남방 3각 관계가 강화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남북관계 악화가 남방 3국과 북방 3국 사이의 갈등으로 확대전이되는 동북아의 지정학적 특성이 또 다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악화일로를 걸었던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태를 거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고, 6자회담 재개도 더욱 불확실해졌다는 점이다.

    2009년 상반기의 파국(북한의 위성 발사, 유엔 안보리의 대북 규탄 성명, 북한의 2차 핵실험,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 북한의 6자회담 거부 등)을 겪으면서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남북관계와 6자회담은 2009년 12월 미국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남북한은 정상회담을 타진하는 물밑접촉에 나섰고, 6자회담 재개 기운도 감돌았다. 

    그러나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가 발생하면서 남북관계 복원 및 6자회담 재개는 더욱 어려워졌다. 남한은 북한에게 천안함과 연평도를 하나로 묶어 이들 “도발”에 대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한 남북관계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오고 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태 이전에는 북한에게 조건없는 6자회담 복귀를 요구했던 자세에서 남북관계 및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있는 자세를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2월 8∼9일 열린 남북군사실무회담에서도 거듭 확인된 것처럼 이러한 강경 기조는 2011년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동북아 국제정세와 한반도 문제의 상호작용 

    역사구조적으로 볼 때 동북아에서 한반도의 딜레마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이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접점에 한반도가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지난 수 세기 동안 한반도를 동북아 지역의 패권 확보의 발판이나 완충지대로 삼아왔다는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둔다.

    특히 1945년 한반도의 ‘분단선’은 한국전쟁과 정전체제, 그리고 미국-일본-한국 대 소련-중국-북한 사이의 동북아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동북아의 세력균형선으로 작용해왔고, 이러한 특성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남북한 사이의 통일을 향한 ‘구심력’이 강해질수록, 주변 강대국이 현상 변경되는 한반도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원심력’도 강해질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딜레마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조건이 동북아 정세의 안정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국 외교의 전략적 지혜는 한반도 평화통일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체제 사이에 선순환적 발전을 도모하는데 있다. 

    미중관계와 한반도 문제의 상호작용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는 미국’과 ‘뜨는 중국’ 사이의 관계는 향후 동북아는 물론이고 세계질서의 미래를 가늠할 가장 핵심적인 변수이다. 또한 두 나라는 각기 남한 및 북한과 동맹 관계에 있다.

    두 강대국의 충돌은 한미동맹 대 북중동맹의 갈등으로 확산·전이되는 구조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두 나라는 6자회담 참가국이자 한반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평화포럼’ 당사국들이다. 한반도 주민들에게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미중관계를 비롯한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역학관계가 남북관계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규정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구한말을 포함한 지낸 세기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으로 식민과 분단을 강요받았다는 ‘집단적 기억’은 오늘날에도 주변 4강으로 일컬어지는 미-중-일-러의 관계 동학과 한반도 문제 개입 시도에 따라 쉽사리 ‘피해 의식’으로 둔갑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반도의 어려움은 동북아의 강대국 정치가 강요한 측면보다는, 남북한이, 특히 이명박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대북강경책과 한미동맹 ‘올인’ 외교로 대표되는 MB 정부의 냉전형 대외정책은 동북아 신냉전 촉발 및 악화의 중대한 요인이 되고 있다. 

    MB 정부의 두 가지 전략적 실책 

    동북아 국제정세의 맥락에서 볼 때, 이명박 정부의 대외정책은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어렵사리 합의한 공동의 목표를 실종시키고 상호간의 전략적 불신을 격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갈등과 협력을 반복했던 6자회담 참가국들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2.13 및 10.3 합의를 채택했는데, 여기에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북미·북일 관계정상화,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추진 등이 담겨 있다.

    이처럼 동북아 6개국이 한 자리에 모여 한반도와 동북아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 만큼 한반도와 동북아 문제를 선순환적으로 풀 수 있는 소중한 토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6자간의 합의를 미래지향적으로 계승·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오히려 6자 가운데 가장 강경한 입장을 선택함으로써 6자회담이 궤도를 이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2008년 12월 6자회담에서는 기존 합의에도 없었던 북한의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 의정서 채택을 대북 에너지 지원과 연계해 회담 결렬의 중대 원인을 제공했다. 2009년 4월에는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로 규정하면서 한-미-일 공조 및 유엔 안보리 규탄 성명 채택을 주도했고, 이는 북한의 2차 핵실험을 비롯한 강경 맞대응을 야기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프로세스를 총체적으로 흔들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한미관계의 전략동맹화’ 및 한-미-일 3국 협력 강화를 추진한 것 역시, 6자가 합의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추진 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한중, 한러 관계도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었고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는 한반도의 ‘분단선’이자 동북아의 ‘세력균형선’을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변경하는 것을 추진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무시한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 북한의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이후 강화된 대북 제재와 국제적 고립, 북한의 화폐 개혁 실패,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의 불안정성,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피격 등을 거치면서 북한급변사태론 및 흡수통일론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왔다.

    북한 급변사태 발생시 한미연합군을 투입해 무력 흡수통일을 추진하는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화하고 범정부 차원에서 ‘비상계획-부흥’을 마련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론과 한일 군사 협력 강화의 배경에는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아 흡수통일을 추진하겠다는 복안이 깔려 있다. 한-미-일 3국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벌이고 있는 대규모의 군사훈련 역시 단순히 북한과 중국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넘어, 북한의 자원 고갈 가속화를 유도해 급변사태나 붕괴를 추진하겠다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MB의 흡수통일론은 남북관계 파탄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신냉전 기운 조성에도 중대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북한은 한미연합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핵 억제력 강화”에 더욱 집착하고 있고, 뚫리면 바로 평양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북방한계선(NLL) 무력화에 더욱 강한 동기를 느끼고 있다.

    문제는 남북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MB의 흡수통일론은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미국 및 일본과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불안을 야기해 동북아 전체에도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과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에 있는 중국이 최근 북한과의 관계 강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미-일 3국의 전략적 의도에 강한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MB의 흡수통일론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이 짙다. 

    * 이 글은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2011년 봄호)에 기고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이며, ‘정욱식의 뚜벅뚜벅’(http://blog.ohmynews.com/wooksik)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격동의 동북아, 천안함 해법을 찾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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