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생명 경시한 선택 아니다"
    2011년 02월 22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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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낙태에 대해 내 입장을 말하자면, 누군가가 임신했는데 낙태하겠다고 내게 말하면, 난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 거기에 대해 어떠한 선악 판단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 여성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가져올 일이기에 안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정에 대해 비난하지 않으며, 범죄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만약 지금 상황에서 내가 임신할 경우, 나 역시 낙태를 고민하게 된다. 나를 생명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천하에 못된 년이라고 비난하시려면 해도 좋다. 단, 그것이 내 임신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어 주진 않는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아무리 피임을 철저히 해도 가임기 여성인 한, 임신의 가능성은 늘 있다는 사실을. 파트너가 정관수술하지 않은 남성인 한, 생리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임신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밖에 없다. 일단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생명’에 대해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나는 생명과학과 출신이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생명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태아는 생명이다. 그러나 인격체로서 인식되는 시기는 계속해서 논란 중이며, 나 역시 언제부터 인격체로 인식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수정란은 분명 인간으로 성장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모든 수정란이 그런 것은 아니다. 유전체 이상이 있을 경우, 착상하지 못하고 다음 생리 때 자궁내막과 함께 배출되니까. 착상되는 시기는 수정 후 1주일에서 열흘이므로 이미 수정란이 포배기를 거쳐 낭배기로 들어갈 시기이다. 이 이후에 외배엽, 중배엽, 내배엽이 각각 기관으로 발생하게 된다.

우선 첫 번째 문제, 줄기세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배아줄기세포는 이 시기의 인간 배아에서 얻을 수 있다.(체내 수정이든 체외 수정이든) 물론 줄기세포 채취 후 배아는 자궁에 착상시키는 게 아니라 폐기한다.

그렇다면 과학계에서 진행되는 줄기세포 연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것 역시 살인행위로 봐야 하나? 설마 낙태하는 여성들은 자기 몸 안에서 생긴 배아를 자기 맘대로 하는 거니까 살인이고, 과학 연구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일이므로 살인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다.

인간에 대해서

두 번째 문제, 생명의 정의는 무엇인가. 줄기세포 이외에도 생물학 실험에는 여러 가지 인간 세포주들을 이용하고 있다. 추후 발생단계와는 상관없이, 수정란 역시 세포이다. 세포 차원에서 생명을 정의한다면, 세포주들은 어떤가. 이것은 생명 아닌가?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수정란이 인간으로 발생하는 단계를 거치는 건 아니다.

세 번째 문제, 인간의 생명과 인간이 아닌 동물체의 생명은 어떻게 다른가. 낙태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바라봤을 때, 채식주의자가 아닌 낙태 반대자들은 육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명’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그 가치 아래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일들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인간과 그 외 동물은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그에 대한 또다른 얘기를 할 수 있다.

그에서 비롯하는 네 번째 문제,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과 그 외 동물이 다르다고 할 때는 분명 다름을 가르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장 많이 드는 기준은 아마 인간은 이성이 있는 존재이고, 그 외 동물은 아니라고 하는 주장일 것이다.

이어지는 또 다른 문제. 태아는 이성을 갖추고 있는가? 난 내가 태아일 시기의 기억과 경험이 백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여부를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는 방법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태아에게 직접 묻고 답을 들을 수 있는 방법 이외에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솔직히, 생명에 대한 논의가 이 수준까지 오면, 이제 생명의 문제는 시기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신념의 문제가 된다.

낙태,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마지막 문제. 낙태를 하는 여성들은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낙태를 하는가? 나는 여기에 대해 단호히 아니라고 얘기한다. 낙태를 경험한 사람들도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며, 내가 만약 낙태를 결정한다 해도, 그렇게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는 바로 이 순간. 이제 낙태에 대한 문제는 생명의 문제가 아닌 사회정치적 문제가 된다.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은, 낙태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답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낙태 당사자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임신과 그 이후 임신 중단뿐이다.

자, 생각해보자. 낙태 당사자가 왜 낙태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명쾌하다.

1. 임신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2. 출산해서 아이를 기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임신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보자.

청소년의 경우, 혼인의 여부와 별 상관없이 임신한 상태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가정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되는 상태를 맞이한다. 섹스 이후 임신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배운 적이 없다.

쉼터? 그런 게 있기는 했는지, 어디 붙어있는지 알 수 없다. 주위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못 한다. 가족? 말 꺼내면 머리끄댕이 먼저 잡힌다. 아니, 말 할 수 있는 가족이 유지나 되고 있으면 다행이다. 이 상황에서 임신을 지속할 수 있나?

성교육 왜 제대로 안 받았냐고? 생각해 보라. 애들 입에서 섹스의 시옷(ㅅ) – 아, ㅅ이 아니라 s인가? 뭐 어쨌든 – 이라는 말이 나올라치면 정색하며 자리 피하거나, 버럭 화내거나, 그건 크면 저절로 다 알게 된다고 회피하는 게 누군지. 비청소년들이다.

임신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

그 누구도 청소년들에게 진지하게 섹스와 피임과 임신과 그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나누어져야 할 책임과 자기결정권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는다. 학교에서 성교육 시키지 않냐고? 난자와 정자가 만나면 수정이 된다는 내용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

연애한다고 애들 교무실로 불러 욕하고 때리면서 헤어지라고 강요할 뿐이다. 당근에 콘돔 씌우는 거라도 가르치자고 하면 난리가 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비청소년들을 믿고 얘기하고 물어보겠는가, 청소년들이.

비청소년 비혼 여성의 경우, 임신한 상태면 "처녀가 임신했대" 소문나는 거부터 시작해서,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자신을 부양해 줄 가부장이나 그 외 경제능력이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지 않는 한, 비혼여성이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엄청나게 잘 나가서 회사에서 제발 재택근무라도 해달라고 붙잡는 전문직 여성이 아닌 한에는.

비혼 상태의 임신에 대해, 내가 아무리 당당해도 주변에서 임신 사실 자체로 불이익을 주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주위의 시선과 강요에 일 그만두면 당장 이번 달 월세와 가스비와 전기세와 수도세를 못 내는데. 자기 소유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여성이면 집세 걱정은 그나마 조금 덜어질지도 모르지만,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지고 있는 비혼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건강? 공과금도 못 내는데 건강을 챙길 수나 있겠는가. 당장 생계는 위협받지, 주변에선 계속 이상한 사람 취급받지. 죽지 못 해 사는 거다. 모아둔 돈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임신이 지속되면 될 수록 검진비를 비롯한 생계비는 계속 늘어나는데.

왜 미련하게 임신을 하냐고?

비청소년 기혼 여성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면 역시 비혼 여성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임신하면 그만두라는 압력을 주는 회사가 허다하다. 아예 면접 시에 혼인 계획을 물으며, 혼인과 임신 계획이 근간에 있을 경우에는 그 회사에 합격되리라는 기대는 일찍이 접는 게 낫다.

출산휴가? 출산 전날까지 일하다가 양수 터지니까 그때야 병원 가시는 분도 있더라. 임신한 상태일 때도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을지가 간당간당한데, 출산 후에 직장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당장 맞벌이 하지 않으면 가계 유지가 힘든 여성들, 임신 지속할 수 없다. 노동 강도가 임신을 지속할 수 있을 만한 수준보다 높은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 역시 임신 지속할 수 없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기혼 여성분들도,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으면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임신이 축복으로 다가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하늘 한 번 보고, 땅 한 번 보고 한숨 푹푹 쉬는 사람들, 허다하다.

그럼 미련하게 임신을 왜 했냐고? 모든 남성들이 다 그러는 거야 아니겠지만, 이성애 관계인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 파트너에게 당연히 섹스를 요구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대부분 여성들은 섹스에 대해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 힘들어 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야, 섹스를 거부하거나 제대로 피임을 하겠지. 그런데 그렇게 못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남성에게 버림받을까봐, 자신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그렇게 행동한다고 남성에게 받아들여질까봐.

또 여성이 섹스에 대해 능동적인 행동을 하면 밝히는 여자처럼 보일까봐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절대적인 힘의 우위로 인해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자존감의 붕괴로 인해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 모든 여성이 내면에 주체적 힘을 지니고 남성과 동등한 상황에서 주체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게 아니다.

피임 실패의 가능성은 항상 있다

연애 관계에서도 결정을 못하는데, 그게 강간이면 어떻겠는가. 이건 이성애자 여성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여성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강간 당한 사실을 말할 사람도 주위에 제대로 없는데, 강간당해서 임신했다는 얘기는 누구한테, 어디에 할 수 있나. 평소에 여성의 전화나 민우회 등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있고, 심리적 장벽이 비교적 낮은 사람이면 가능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잘 알려졌듯이, 대부분 강간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저지른다. 특히 가해 행위자 남성은 대부분 피해당사자 여성보다 더 큰 힘이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물리적 힘 뿐만 아니라 사회적 힘에 의해, 여성의 저항은 무산된다.

행위를 둘러싼 해석 자체도 가해 행위자 남성에게 유리하게 조작되며, 여성의 잘못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강간이라는 상황에 놓였던 사람은 자신의 무력감을 경험한 후, 자존감이 엄청나게 훼손된 상태에 놓인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무리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임플라논이든 콘돔이든 경구 피임약이든 살정제든 주기피임법이든 루프든 사용해서 피임을 해도, 정관 수술을 받지 않은 남성과 섹스를 하는 한은, 연령과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가임 여성은 언제나 피임의 실패와 그에 따른 임신의 가능성에 놓여있다.

아, 이런. 그럼 임신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만 섹스하라는 말이 나올 거라는 사실을 깜박했다. 근데 난 그러기 싫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내게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계급

자, 다시 살펴보자. 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임신을 지속할 수 있는 상태는 분명히 계급과 연관이 있다. 비혼 상태의 임신에 대한 비난을 무마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위 계급이거나, 임신 상태일 때 경제적 걱정 – 정확히는 생계 걱정 – 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계급일 경우에만 임신 지속이 가능하다.

또한, 원하지 않는 임신의 대부분은 남성과 여성간의 성별 계급 격차와 권력의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 일은 가부장제와 성차별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회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지 않은 구조적 상황이 원하지 않는 임신의 주 원인이라는 말이다.

한 당원이 몇 년 전 봉사활동을 하며 겪은 일을 쓴 글을 보았다. 형부에게 강간당한 여성 청소년, 그리고 혼숙으로 인해 임신한 여성 청소년을 만났던 일. 그 일들이 과연 낙태 범죄화로 없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내가 보기에, 그일들은 낙태가 손쉬워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분명히 가부장적 성별 불평등과 성교육의 부재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이번에는 출산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보자. 위에서 얘기한 것들과 많이 겹치겠지만, 한국에서 가부장의 보호와 후원이 없는 출산과 육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비혼 여성들? 이미 임신 상태일 때부터 직장 생활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비혼 상태에서 임신하면 청소년이든 비청소년이든 집에서 발로 채이면서 별 쌍욕 다 들으며 머리끄댕이 잡히고, 다리 몽둥이 하나 부러지지 않은 채로 몸이나마 온전하게 쫓겨나면 감지덕지 해야 할 상황이다. 이럴진대 출산 후 가족의 도움? 하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안정된 소득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혼이든 기혼이든, 청소년이든 비청소년이든, 어렵게 어렵게 임신 지속을 결정해서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소득이 필요하다.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를 봐 줄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소득이 필요하다. 소득을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끝없이 되풀이 되는 이야기다.

이 상황에서 출산하는 여성은 과연 누구인가.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안정된 경제적 능력을 스스로 지닌 여성이거나, 이러한 능력을 지닌 파트너나 가족이 있는 여성이다. 결국 임신과 출산은 계급으로 결정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온전히 여성의 몸을 통해 일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존재 자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원하는 임신이면 낙태를 결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임신을 지속하여 출산하겠다고 결심한 임신이므로. 임신을 지속할 수 있으면 낙태를 결정하지 않는다. 출산을 한다. 출산을 할 수 있는 상태면 낙태를 결정하지 않는다. 출산을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거나, 임신을 지속할 수 없고, 출산을 할 수 없으면, 낙태를 결정한다.

낙태 당사자가 낙태를 결정하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차마 그 소중함을 우선으로 둘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임신과 출산을 감당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낙태 반대자들이 주로 주장하는 생명의 소중함과 사회안정망 강화. 물론 동의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낙태를 범죄로 다스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냔 말이다.

낙태 범죄화는 대안이 아니다

내 주위에 낙태 경험한 사람들, 있다. 다들 이렇게 얘기한다. 그때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여건만 되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생명이 중요치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 역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이 일은 내 몸에, 내 인생에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당신이 임신 가능한 여성이라면, 당신의 몸과 인생에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성애자 남성이라면, 당신과 섹스하는 모든 여성의 몸과 인생에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분명히 알아둘 것은 낙태 범죄화는 낙태를 줄이는 방법이 아니라, 어둡고 기나긴 터널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비상구에 철문을 굳게 닫고 빗장을 채운 뒤 용접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걸어 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고 터널 안에서 죽어가거나 나가려면 문이 아니라 터널 어딘가를 뚫고 나가는 방법 뿐이다. 그리고 좋은 장비와 체력이 있는 사람들은 무사히 뚫고 나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뚫고 나가는 길이 무너져 내려 깔려 죽거나, 숨이 막혀 죽을 뿐이다.

낙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우선이니 낙태를 범죄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 말은 노동 해방 세상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니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하는 일을 범죄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낙태 범죄화라는 방법이, 생명을 경시한다는 비난이, 낙태를 했던 여성들이, 혹은 내가, 원하지 않은 임신 상황에서, 낙태를 선택하지 않을, 가장 좋은 해결책인가.

* 이 글의 필자는 "기나긴 학교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뛰어든 초보 작가이자 정치인. 할 수 있는 일로 더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 『여기 사람이 있다-대한민국 개발 잔혹사, 철거민의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는 작업에 참여한 후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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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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