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공동정부, 당권파 공안정당
    [진보, 야] "진보에 절망하기에 이땅의 절망이 너무 깊다"
    By 000
        2012년 05월 17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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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정부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후보가 되고 정권을 장악하는 차원이 아니라 함께 연합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선으로 가는 드랍쉽(스타크래프트 게임용어로 일종의 수송선-편집자)에 탑승한 문재인이 입을 열었다. 깊은 산 속 골방에서 인터넷 뉴스를 뒤적거리던 나의 눈을 의심하게 한 단어, 공동정부.

    그는 안철수에게 ‘대통령 + 책임 총리제’를 골자로 하는 공동정부 구성을 제안했다. ‘문재인 대통령, 안철수 총리’가 되었든, ‘안철수 대통령, 문재인 총리’가 되었든, 상식과 정의를 표방하는 이들의 가슴을 선득거리게 할 구상을 제시한 것이다.

    대선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은 지금 타이밍에, 이러한 구상이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설마 안철수 원장과의 사전 교감도 없이 등장한 ‘찌라시’는 아니겠지? 민주당의 총선 패배와 손수조의 45% 득표라는 ‘멘탈 붕괴’를 겪은 문재인 고문이 심심하니까 날린 드립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제발 아니어야 한다. 안철수 원장과의 교감이 충분히 진행 된 상태에서, 결정적인 순간 ‘문-안 공동정부 집권플랜’을 발표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의 메시지이기를 바란다. 당연하겠지만 이 공동정부 구상은 단순한 단일화를 통한 두 후보의 지지율 합치기와는 궤를 달리한다. 386과 2030이라는, 세대와 세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두 후보의 공동정부 플랜은 ‘시너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나저나 문재인의 공동정부안을 보고 있자니 뭔가 찜찜하다. 삶은 계란을 통째로 먹었는데 흰자만 씹고 있는 느낌이랄까. 문재인의 ‘공동정부’는 우리가 익히 주장하는 ‘연립정부’와는 결이 좀 다르다. 정당과 정당의 협력을 통해 내각을 함께 구성하자는 제안이 아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안철수 원장은 정치권에서 ‘솔플(솔로플레이, 개인플레이)’하고 있는 유저일 뿐, 정당이나 조직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원장이 확보하고 있는 정치적 파괴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함정)

    ‘대통령 + 총리’를 넘어, 새누리당을 때려잡기 위한 공동의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정당과의 파티플레이가 필요하다. 19대 국회에서 거대 양당을 제외하고 남은 정당은 단 2개. 그 중에 민주통합당과의 공동 내각 구성이 가능한 정당은 단 하나.

    통합진보당

    정상적인 상황의 통합진보당이라면, 문재인 고문의 위와 같은 구상에 대해 당혹감을 드러내야 마땅하다. 제3당이라는 막강한(?) 힘을 갖춘 자신들을 쌩 까놓고, 홀연히 솔플하고 있는 안철수 원장과의 공동정부를 구상하다니. 솔직히 말하건대 이건 정치적으로 치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너무 단순한 수식일지는 모르겠으나, 2012 대선이라는 전장에서 통합진보당이 가진 영향력의 총량은, 안철수 개인이 가진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뭐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야권 연대’가 관성이 되었다. 야권 연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통합당 입장에서 진보진영은 집토끼라는 것이다. 노회찬 대변인은 야권연대를 “새누리당이라는 외계인에 대항하기 위한 한국과 일본의 연대”로 묘사한 바 있다.

    노회찬다운, 대단히 감각적인 비유이나 현실과 똑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한국과 일본은 어느 정도 ‘체급’이 맞는 존재들의 연대가 아닌가. 미국과 방글라데시의 연대와는 결이 다른 것이다. 체급(조직력)이 다른 정당 간의 연대를 통해 어렵게 만들어진 열매는, 강자의 시혜에 의해 배분 된다.(이런 시혜로 베풀어진 열매조차 정당 내의 특정한 세력이 독식하게 된다면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체급이 맞지 않다고 해서 시혜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두 세력의 ‘변별력’이 있으면 된다. 전쟁은 몸집이 거대한 람보가 선두에서 기관총만 휘두른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빠른 발로 적진에 침투하여 교란하는 임무도 필요하고, 아군의 부상을 치료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연대라는 이름의 막사에서 각 세력이 동등한 지위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나눠가지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각 정당이 표방하는 정치적 지향과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라는 형태로 ‘변별력’이 등장한다. 다른 정당에 비해 조직력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자신만의 가치를 내세우고 이를 지지하는 대중의 열망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나은 2016년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말은 쉽고 현실은 시궁창이다. 고백하건데 19대 총선 과정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정책을 초보적으로 분석한 나는 멘탈 붕괴 상태에 빠졌다. 대체 무엇을 무기로, 무엇을 변별력으로 대중의 열망을 얻어야 하는 것인가. 민주통합당의 정책 비전에서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발견할 수 없는가? 저 정책들, 옛날에 ‘진보진영’이 만든 것이라고 저작권을 주장해봐야 정치의 영역에서는 별 소용없다.

    하지만 인정한다. 조직력도, 민주통합당과의 정책적 변별력도 부족해진 통합진보당이 아무런 의미 없는 떨거지가 아니라는 것, 인정한다. 정치는 눈에 보이는 힘과 힘의 저울질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는 누적 된 역사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된 진보정당이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진보정치가 보여준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며 이들을 지지한다. 국민들은 기억한다.

    불판을 갈아엎자던 노회찬을, 한복을 휘날리며 촛불을 누비던 강기갑을, 오열하며 본회의장에서 끌려 나가던 이정희를 기억한다. 국민들은 이들과 이들을 만들어낸 진보정치를 기억한다. 거대 양당의 힘 싸움에 날카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진보정치는 2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국민적 신뢰를 확보했고, 크고 작은 부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위상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날의 진보정치가 간직한 유일한 무기, 역사적 신뢰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공안정당

    이정희 대표의 사퇴가 전장을 열었고, 심상정 대표의 의사봉을 신호탄으로 ‘전투’가 시작 되었다. 머리채를 뜯는 이는 육두문자를 쏟아내고, 머리채를 뜯긴 이는 비명을 지르고, 지켜보는 이들은 고개를 떨구고, 승리한 이들은 정리 집회를 연다. 깃발은 간 데 없고, 동지는 땅바닥에 나부낀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이들에게 정중히 의견을 드린다. 통합진보라는 공안정당을 목도한 국민들이 당신들의 ‘진정성’을 깊이 헤아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마시길. 당신들의 ‘목적’과 ‘진정성’을 헤아리기에는, 당신들의 ‘수단’이 너무도, 저열했다.

    “통합 과정에서 만장일치 합의정신을 최대한 발휘하자고 했던 약속이 무너진 것에 대한 중앙위원들의 정당한 항의를 거부한 결과로 (발생한 사태)”

    이거 대체 뭐라고 읽어야 하는가? 중등교육을 착실하게 이수하였으나 도저히 이 문장을 해석할 수 없다. 공당의 대변인이라면 국민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음에 안 들어서, 졸라게 패주었다.” 이렇게 말이다.

    어쨌든 ‘진보정치에 희망을 건 이들에게 비수를 꽂은 결과’는, ‘중앙위원들의 정당한 항의를 거부한 결과’와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폐허의 잔해 속에서

    “저는 오늘 통합진보당에 입당합니다.”

    정태인 원장이 SNS를 통해 남긴 이 메시지는 아주 오랜 시간 나의 가슴을 울렸다. 이대로 진보정치의 종말을 마주할 수 없다는, 동지들이여 희망을 잃지 말자는, 정치의 파도 앞에 냉소하여서는 안 된다는, 수많은 언어를 대신하고, 그는 이 한 마디만을 남긴 것이다.

    길게 주절거려 어디에 쓰겠는가.

    진보에 절망하기에는, 이 땅의 절망이 너무도 깊다.

    추스르고, 다시 가자.

    “출바알~”

    p.s 격량에 휘말리던 통합진보당이 강기갑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었다. 통합진보당의 빛나는 혁신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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