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병제는 좌파적인가?
        2011년 02월 17일 08: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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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5명. 2010년 12월까지의 병역거부 수감자의 숫자다. 대한민국 국군이 생긴 이래 1만여 명이 병역거부로 수감되었다. 그 중 절대 다수가 ‘여호와의 증인’을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2000년대 초반부터는 종교가 아닌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병역거부, 선언 안 했다고 찬성하는 것 아냐

    불교도였던 오태양이 평화주의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고, 그 이후로 사회당과 <전쟁 없는 세상>등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병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인 2011년 2월 10일에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확정된 법조인’인 백종건 씨가 병역을 거부했다.

    유사 이래 사법고시를 합격한 사람 중에는 처음 있는 일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병역거부를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군대를 가기로 결정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조금 더 보태자면 ‘병역거부’라는 제도를 몰라서 그렇지 군대에서 ‘사람 죽이는 기술’을 배우는 것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남자들은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있다.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해서 병역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법에 의해 ‘강제’로 ‘징병’되고 있지 않나. 몸이 끌려갔다고 마음까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비역들은 알고 있지만, 징병제라는 제도 자체는 “씨발. 나도 뺑이쳤는데, 넌 뭐냐?”라는 식의 물귀신 놀이를 통해 유지된다.

    가지 않은 인간에 대해 ‘욕’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 병역의 의무라는 헌법상의 의무이다. 덕택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욕할 권리가 부여되는 것 같이 여론은 쉽게 흘러가곤 한다. 여자들이 두들겨 맞고, 장애인들이 난데없이 ‘그 새끼들’의 범주에 들어간다. 여자도 특권층이 되고, 장애인도 특권층이 된다.

    정치적 좌파들의 관성적 답변

    그런데 이러한 지형 하에서 병역 거부, 그리고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관성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정치적) 좌파들인 것 같다. 갑자기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군사주의를 비판하고 병역 거부자를 지지한다. 동시에 ‘대체 복무제’를 찬성한다고 말한다.

    진보정당들은 이미 대체 복무제를 당론으로 채택해 놓은 상태이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대체 복무제를 실시하겠다고 국방부가 발표했었다. 한국의 모든 ‘민주개혁’ 세력과 ‘진보 진영’은 대체 복무제를 지지한다. 병역 거부자들을 수감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좌파들의 ‘외마디’ 비명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채택할 것인지에서 좌파들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운동 단체’로서의 진보정당은 존재하지만, 이것들을 ‘정치화’하는 진보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진보정당들이 팔팔했던 순간인 2004년에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7월이 되자 국방부가 대체 복무제를 엎겠다고 공언하고, 2008년 12월이 되자 대체 복무제를 ‘무기한 유보’했었을 때 좌파들은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다.

    늘 저항은 강렬한 소수자들에게서 존재한다. 그들의 ‘인권’에 관한 강조와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들은 늘 적절했다. 그런데 그들 바깥에서는 전혀 꿈쩍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게토화’의 논리가 작동한다. “그런 새끼들”로 묶이기 딱 좋은 형국이다.

    징병제와 모병제, 그리고 좌파들의 버벅댐

    그리고 이미 진보정당들은 그러한 경험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진보정당들도 당론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채택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그 문제에 개입할 때에는 머뭇거린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비단 대체 복무제라는 ‘소수자 보호’ 제도뿐만이 아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징병제와 모병제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도 좌파들은 버벅거린다. 한국사회에서 모병제를 주장하면 좌파일까, 우파일까? 2004년 민주노동당의 입장이나, 2008년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입장 등을 살펴보자.

    모두는 모병제를 지지한다. 그들의 명분은 대체 복무제에 대해 근거로 제시했던 바와 같이 ‘양심과 사상’이라는 ‘인권’의 키워드에 맞춰져 있다. 진보정당들은 “군대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로 모병제를 설명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는 미국은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노무현이 모방하려 했던 프랑스의 국방개혁의 목표는 모병제였다. 그런데 그 모병제의 채택과 결부되어있던 프랑스 우파 정부의 정치적 과제는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PKO(평화유지군)의 자격으로 파병하는 것이었다.

    물론 ‘평화로운’ 스웨덴도 모병제로 전환했고, 나치 시대의 업보 때문에 ‘평화롭게’ 살겠다고 매번 맹세하는 독일 정부도 올해부터 모병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독일과 스웨덴의 모병제가 ‘인권’이나 ‘평화’의 명분 때문에 모병제를 실시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모병제 이데올로기

    그 이전부터 평화롭고 인권에 대해 존중하는 분위기가 징병제 병영에서도 마련되는 과정이 존재했다. 모병제는 과정으로 어떠한 ‘인권’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모병제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대’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한다.

    2000년대 초중반 ‘모병제 추진연대’와 병역 거부 단체들이 함께 할 일들이 있었다. 징병제의 무지막지함에 대한 비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두 그룹은 서로 같이 갈 수가 없었다. 합리적이고 강력한 군대는 달리 생각하면 가장 파괴와 학살에 적절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우파들은 모병제에 대해서 ‘비용’ 문제 때문에 반대한다. 그럴 때 좌파들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가야한다고 말하곤 한다.

    여기서 셈법이 꼬일 수밖에 없다. 모병제라는 프레임에서는 효율적이고 강력한 군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과 평화는 부차화된다. 노무현도 ‘첨단 테크놀로지’의 군대라는 말에 확 말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국방비는 늘지만 ‘인권’과 ‘평화’ 문제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필요한 이야기들은 ‘군축’이었다. 이미 많은 우파들도 한국의 군사력이 현재의 출산율을 볼 때 조만간 60만으로 재생산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고, 한나라당의 송영선 의원조차 30만 이하의 병력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육군 장성 마피아들의 헤게모니를 없애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적절한 좌파의 개입은 ‘군축’이라는 프레임으로 개입하되, 군의 합리화보다는 공공성, 사회적 통제 등에 키워드를 맞추는 방법이다. 이 상황에서 몇 가지의 쟁점이 또 튀어나온다. 먼저 병력 감축을 인구 감소율에 맞춰서 전투병 중심의 징집의 수단으로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전체 징병 인원 자체는 축소하지 않고 다른 방식의 ‘사회 복무제’로 유도할 것인지의 여부다.

    "너도 뺑이 쳐봐야지"

    전자의 경우 우파들이 원하는 ‘강군’ 이데올로기에 전혀 흠집을 주지 않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굉장히 급진적인 방식의 군대 재편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 복무가 소수화되고 ‘사회봉사’ 방식으로 사회에 대한 복무가 늘어난다. 더불어 군복무 기간도 획기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만 현재 전혀 작동하지 않는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지금 한국은 1968년의 반전운동이 거리를 뒤덮어 징병제를 날려버렸던 미국이 아니다. 징병제에 대해 “너도 뺑이 쳐봐야지”하는 하향평준화된 ‘평등주의적’ 합의는 단단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병역 거부자는 정말로 ‘소수’자이다.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화되지 않는 이상, 다른 방식으로 말할 공간이 생기지 않는 이상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가족들과 친지들과 친구들의 목소리는 계속 좁은 공간 안에 머무를 따름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군사주의에 대해 운동 차원에서 제기하는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관념적이다. 다른 부문에서 인권은 점차 사회권으로 확장되어가면서 계층 간, 계급 간 차이에 대한 이야기들과 생존권에 대한 이야기로 급진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분명하게 신자유주의적 국가에 대한 반대와 직결되어 있다.

    하지만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인권’이 동원될 때에는 서구 자유주의적 관념의 ‘인권’, 즉 앞서 언급한 ‘양심’의 문제, ‘사상’의 문제 수준에서 멈추고 만다. 그 앞에서는 ‘누구’라는 질문도 생략되어 있고, ‘어떻게’라는 풀 방법에 대한 질문도 정지해버리고 만다.

    군대 문제의 정치화

    군대는 늘 ‘군사주의적’ 공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진입하는 남자들의 맥락에 따라서나, 특정한 정치적 맥락들에 따라서 전혀 다른 군사주의가 펼쳐진다. 카투사와 전경의 군 생활은 모두 군사주의에 찌들어 있지만, 그 군 생활들이 같다고 말하는 바보는 세상에 없다.

    그리고 그 차이들에 명민하게 개입하면서 정치화시키는 것이 지금 진보정당의 몫이 아닐까. 미시적인 차이들로부터 군대의 재편까지를 입체적으로 동시에 보면서 ‘정치화’시키고 정책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병역거부 지지’와 ‘대체 복무제’ 찬성의 입장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다. 오히려 게토화를 유발한다. 문제는 그것들의 정치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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