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딸의 돌 기념 금반지를 바치다"
    2011년 02월 14일 01: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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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했다면/ 더 기다리는 사람이 됩시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는 승리의 기억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더욱 세차게 달려가는 우리가 됩시다….” (도종환 시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중에서)

자본은 ‘때’를 벗기고, 노동자는 ‘뼈를 깎고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민주적 시장경제’가 내세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논의는 결국 노동자에게 모든 고통을 떠넘기기 위한 수순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났다.

지금 너희들과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는 근로자 파견법이 통과된 것도 그 때였다. 국민대통합의 선결 조건으로 약속하였던, 부당노동행위 근절, 구속자 석방, 해고노동자 원직복직도 실종되었다. 왜 ‘철학’이 있다는 대통령이 그랬을까?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나서서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 정도였다.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에 나선 국민들은 약 340만 명이 참여하여 225톤의 금을 모았다고 한다.

금액으로는 21억 7천만불(환율을 1,300원으로 할 때 3조원에 달한다) 정도였다. 98년 2월 수출이 21% 급증하여 무역흑자가 32억 달러였는데, 그 가운데 금 수출액이 10억 5천만 달러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결혼반지도 없었던 우리는 유일한 금붙이였던 네 돌잔치에 들어온 금을 모두 가져다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순진했다. 그 와중에 재벌은 더욱 몸집을 불렸고, 초국적 자본은 구조조정에 따라 빚을 원활하게 돌려받음과 동시에 싼값으로 금융기관, 공기업, 그리고 알짜기업 인수를 확대하여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결국 위기를 맞아 자본은 몸의 ‘때’를 벗긴 정도에 그친 반면 노동자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정리해고라는 자본의 횡포에 맞서 98년 12월 9일에는 민주노총 이갑용 위원장이,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부터는 각 산별연맹 위원장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가 12월 31일에야 중단했다. 그러면서 다음의 제대로 된 투쟁을 기약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우리는 “당신이 보수 정당을 찍는 한 표는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되어 노동자의 목을 칠 것입니다.”라고 목이 쉬도록 외쳤는데 그게 현실이 되고 있었다. 통탄할 일이었다. 

브라질 방문, 룰라를 만나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투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에 나는 브라질을 다녀왔다. 국민승리21은 99년 3월 5일부터 열흘간 브라질 노총(CUT)과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초청으로 국민승리21 회원 및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구성된 브라질 연수단을 파견 했는데 총 12명 중의 한명이 된 셈이다.

물론 그 연수는 우리가 제안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정당, 우리보다 약 10년을 앞서가고 있었던 브라질 노동자당을 보고 많이 배웠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룰라는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기도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99년 브라질 방문 당시 만난 대통령이 되기 전의 룰라.

"PT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PT 안에는 기독교도가 있는가 하면 무신론자도 있다. 가톨릭도 있다. 심지어 무장투쟁을 했던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대의원 및 지도그룹의 30%는 여자여야 한다. 반드시 여성의 참여는 지켜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노동조합 활동에서 정치활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노동자들은 한 번에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조합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도 투표에서는 우리를 찍지 않는 정치적 혼란이 있었다. 정치적 훈련이, 교육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꾸준히 진보정당을 만들려는 노력을 지속했으면 한다. 반대도 많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는 투쟁을 좋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황이 힘들 때는.”

“노동조합처럼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열려져 있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프로젝트를 정치 프로젝트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노동조합을 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의 얘기만 들으면 된다. 그러나 정치 프로그램에는 많은 다른 영역의 제안을 들어야 한다. 실업자, 학생, 여성, 중소기업가, 농민 등 각기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들을 정치로 모아내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험은 이후 만들어지는 민주노동당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익노련의 깃발을 내리고 

“이제 우리는 연맹의 깃발을 내린다. 그러나 먼 훗날에도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1980년대와 90년대, 노동자들의 그 힘찬 투쟁현장에는 항상 전국공익·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라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깃발을 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묻는다. 우리 연맹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수많은 날들 속에 남겨진 발자취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연맹의 역사를 채워왔던 수많은 동지들 또한 우리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익노련은 3월 10일에 해산대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해산한다. 1989년 연구전문노동조합협의회를 거쳐 전문노련, 공익노련으로 이어진 10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롭게 공공연맹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어 3월 13일 한국통신, 조폐공사, 사회보험 노조 등이 포함된 전국공공노동조합연맹, 서울 및 부산 지하철 노조 등이 포함된 전국민주철도지하철노동조합연맹 등과 통합한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이 탄생한다.

3개 연맹이 하나로 되어 106개 노조 10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대규모 연맹이 새로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역사인데 너희에게는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이름만 남겠다. 끊임없이 단결의 폭을 확대해 나간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나는 브라질에서 돌아오니 조직팀장이 되어 있었다. 사무실도 잠실 석촌호수 옆에서 뚝섬역으로 옮겼다. 

99년 4월 19일 새벽 4시 파업 돌입 

“캄캄한 설움의 세월을 찢어버리고 / 메마른 착취의 지축을 흔들며/ 땅 속을 달린다 새벽의 투사가 되어 / 해방역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노동자 / 독재의 쇠창살 우리의 함성 막을 텐가 / 지랄탄 불도저 우리의 전진 막을 텐가 / 압제의 터널 속에서 멈출 수는 없다 / 천만 노동자 기관차 되어 달리자 지하철 노조여 / 우리의 사랑이여”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의 노래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조합원이 1만 명에 가까운 대공장이었고, 전노협의 핵심 사업장 중의 하나였을 만큼 민주노조의 한 상징이었다. 1989년 3․16과 1994년 6․24에도 파업 투쟁이 있었다. 누군가는 농담으로 “우리는 5년마다 파업한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2004년에도 파업투쟁을 했으니까. 

98년 10월 8일 발표된 서울시의 지하철 구조조정 안은 정원의 30%에 달하는 3,447명 감원, 임금삭감, 복리후생비 폐지와 축소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99년 들어 일방적으로 명예퇴직, 대기발령, 정년단축을 감행했다. 계속 밀릴 수는 없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고용안정 및 고용창출, 지하철 개혁”의 요구를 걸었다. “투쟁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바꾸겠다.”는 각오로, 4월 19일 새벽 4시 조합원 약 6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파업에 돌입했다. 

지하철은 노동악법에 따라 필수공익 사업장으로 노동법상 불법 파업이었다. 따라서 파업 첫날 열차를 운행하는 승무 지부 1,169명은 명동성당으로, 나머지는 오후 6시경부터 서울대 진입을 시도하여 2,500여명이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관악산을 넘다

사전에 준비한 암호대로 하면 “김밥 배달”이 무사히 완료된 셈이었다. 4월 19일 서울역 광장에서 ‘공권력 침탈, 김대중 정권 규탄과 총파업 승리를 위한 민주노총 결의대회’에 연맹에서 8,189명이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파업이 끝나는 4월 27일까지 우리는 매일 집회를 해야 했다. 

연맹이 통합되자마자 처음 벌이는 큰 싸움이어서 나는 양경규, 석치순 등 연맹 공동위원장과 서울지하철 임성규 사무국장 등이 농성하고 있는 명동성당 천막에서 같이 생활했다. 너도 만났을 임성규 형은 그 후 연맹 위원장을 거쳐, 민주노총 위원장이 된다. 우리는 서로가 판단을 공유해야 했다.

서울대에는 연맹 조직팀 성원들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경찰이 서울대학교에 병력을 투입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경찰 헬기가 뜨고, 교문을 두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몇 차례 오고간 다음이었다. 연맹과 서울지하철의 판단이 달랐다.

우리는 위협을 가하는 정도라고 보았는데 현장에서는 진짜 투입하는 줄 알고 한밤중에 관악산을 넘어가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럴수록 상황을 공유하고, 같이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경찰은 파업에 들어가자마자 새벽 5시 10분에 군자기지에 병력을 투입하고, 노조간부 19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할 만큼 신속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네가 이해하기 쉽게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신문 기사를 그대로 옮긴다.

4·19 총파업을 하루 앞둔 18일 저녁 8시. 야간총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군자기지에는 차량지부 조합원들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3천명에 이르는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깃발을 앞세우며 노조사무실 앞 3.16 광장으로 모였다.

같은 시각. 창동기지와 신정기지에는 역무지부와 기술지부 조합원들이 총파업 비상대기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투쟁의 주력, 승무지부 기관사들은 명동으로 향했다.

밤 11시. 군자기지 주변에 경찰병력이 배치되고 기지 내로 들어오는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 팽팽한 긴장감이 밤공기를 휘어감았다. 경찰들이 기지 안으로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정보 보고가 지도부에 긴급히 전달됐다.

권력과 공안세력들은 초동에 무력진압할 것이라는 협박을 했던 터다. 각 지회별로 인원점검이 시작됐다. 지도부의 이동지침이 떨어졌다. 기지 내에 대기중이던 빈 전동차에 3천여 조합원들이 올라탔다. 그때가 밤 11시 20분.

성수역에서 내려서 2호선을 갈아탔다. 달리던 차내에 김용진 차량지부장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조합원 여러분들, 건대역에서 모두 내려주십시오” 건대 앞에는 조합원의 이동 경로를 알아낸 경찰들이 정문을 봉쇄하고 있었다. 대오는 긴급히 세종대로 이동했다. 총파업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19일 새벽 4시. “지금부터 총파업에 돌입한다” 석치순 위원장이 파업을 선언했다. 전날 야간총회를 마치고 석 위원장과 임성규 사무국장 등 주요 지도부들은 명동성당으로 이동을 마친 상태였다.

파업 첫날 4곳으로 흩어져있던 조합원들이 전날밤 모두 성공적으로 야간총회를 치렀다는 소식들이 전해져왔다. 세종대와 창동기지, 신정기지에 모여 있던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새벽 4시경부터 5~10명으로 짜여진 조별로 흩어졌다.

그들은 오후 2시 민주노총 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열리는 서울역에 집결하라는 지침을 ‘비선’을 통해 받은 상태였다.

한편 이날 서울지하철을 비롯해 데이콤 등 17개 노조 2만 1천여명이 공공연맹 방침에 따라 총파업에 돌입했다. 밤 10시, 명동성당에 있는 지하철 노조 상황실에 기술·역무·차량 3개 지부 6천여명의 조합원들이 경찰들의 봉쇄를 뚫고 서울대로 무사히 들어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합원들이 또 해냈다. ‘길고 긴장된 파업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 <진보정치 창간준비 1호 에서 인용>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투쟁 지도부.

달라진 명동성당 

전에도 얘기했지만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의 근거지였다. 군부독재마저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 성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억울한 사정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명동성당을 찾았다. 투쟁 중에 수배가 되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알리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특히 그 곳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민주화에는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에 노동권이 빠져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98년 11월 27일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던 조흥시스템 노조 등의 천막이 철거되었다. 철거용역을 앞세운 명동성당 평신도회 아줌마, 아저씨들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천막을 헐어냈다. “해고를 우리가 시켰냐? 왜 우리 성당에 와서 지랄들이야?” “갈 곳 없는 게 우리 잘못이야?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워 죽겠어!”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는 성당에 천막이 있으니 얼마나 창피한지..”

그들은 망치와 ‘뻰찌’를 들고 천막바닥을 다 뜯어내고, 천막 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칼로 텐트를 묶은 줄을 모두 끊어서 안에서 가스불을 피우던 사람이 화상을 입을 뻔도 했다. 한총련 여학생은 철거된 텐트철골을 손으로 막다가 손이 끼여 부상, 병원으로 가기도 했다.

하긴 96년~97년 노동법 개악저지 투쟁을 하고 있을 때도 밤새 돌아기며 사수대를 하던 우리에게 술이 취해 행패를 부리던 신부들도 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1천 명이 넘는 기관사들을 중심으로 승무지부가 명동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많아서였는지 한동안 잠잠했지만 나가라는 요청이 계속 되었다. 

4월 22일에는 서울지하철 창동 기지에 투입되었던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조합원끼리 파업을 막는 행위는 못하겠다.”며 철수했다. 서울대 농성장에는 마지막 대오 3,500여명 중 사수대를 자원한 사람이 무려 1,000여명이나 될 정도로 사기도 높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언론은 투쟁의 배경과 이유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 "오늘은 기쁜 날"

“타협 여지없다, 경찰 투입하겠다, 무더기 징계 착수, 귀가전쟁, 끝내 사고 3명 부상, 불법파업 강력대응, 여론에 밀렸다, 시민 지지 없으면, 파업후유증 심각…”

당시 TV 뉴스 제목이 말해 주는 것처럼 언론은 농성자 이탈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확대 보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파업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4월 22일 군인 신분으로 대체 투입된 기관사가 누적된 피로로 열차를 정차시키지 못해 당산역 차막이를 들이받은 사고가 발생했는데, 파업참가자들이 열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물리력을 행사한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1천 명이 넘는 인원을 증원하는 ‘일자리 나누기’ 방안을 요구한 노조의 요구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조선일보 앞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8일간 투쟁을 벌이다 결국 4월 26일 저녁 8시 파업을 풀고 현장에 복귀해야 했다.

연일 계속되는 김대중 정권의 협박과 보수언론이 일제히 퍼부어대는 대규모 함포사격에 맞서 ‘당당하게’ 싸워나갔던 노동자들은 8일간의 투쟁을 끝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파업을 정리했다. 다음날 아침. 청와대 기자실에 나타난 박지원 대변인의 첫말은 “오늘은 기쁜 날”이었다고 한다. 이 말은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매우 기뻐하셨다”는 뜻이다. DJ는 그렇게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98년 개별사업장 투쟁으로 그쳐버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99년 전체 투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4월 25일 고려대에 들어간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유보 선언을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다시 실패로 끝났다.

너희는 왜 그토록 무수히 많은 희생자를 낳으면서 투쟁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공기업을 보고 ‘신이 내린 직장’ 운운하는데 왜 그런 안정된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투쟁을 하는 것일까? 너희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인 사람들 수천명이 노숙을 마다않고, 연행과 구속 심지어는 해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싸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언젠가 길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쯤 돼서는 너희들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주제겠다.  

2009년도 말에는 철도노조가 파업 투쟁을 했다. 그 결과 200명이 넘는 해고자가 생기고, 13,000여명이 징계를 당해야 했다. 꼭 10년 전인 당시 투쟁으로 서울지하철노조는 직권면직 65명, 직위해제 159명, 수백 명의 징계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복직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고 보면 노동자에서는 김대중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은 셈이다. 

또 다시 갈라서는 진보정당 운동 

여의도로 이사 간 국민승리21은 98년 말에 이르면 매달 회비를 꼬박꼬박 내는 회원이 2천 명을 넘어서서 재정의 90%를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경기지역과 울산·구미·마산·창원·남해·거제·대전 등 전국 30곳에 지구당이 만들어지고, 25곳에 지구당 준비모임이 구성하고 있었다. 실업대책본부 활동도 발전하여 99년 1월 22일에는 전국의 17개 실업운동단체들이 모여 ‘전국실업자동맹 준비위원회’(가칭)가 결성된다. 

그러나 패배를 딛고 노동자가 중심이 된 진보정당을 만드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국민승리21이 유럽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한 유럽 사민주의는 우리 사회의 대안이 아니다”라며 98년 11월29일 청년진보당이 만들어 진다. 현재의 사회당이 바로 그들이다. 97년 함께 했던 세력 중의 일부다. 

다른 한편에선 김대중 정부와 명확한 분리의 선을 긋기보다는 “현 정권이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으나 개혁주체와 토대가 허약하다”며 98년 11월30일 준비위원회 결성식을 한 ‘민주개혁국민연합’도 있었다. 그 조직의 공동대표인 이창복은 97년 대통령선거 때 국민승리21의 공동대표이기도 했다. 나중에 김대중이 만든 정당의 국회의원을 한다. 불과 2년도 채 안되어 다시 좌우로 갈라선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99년 1월 25일 진보정당 창당을 제안하는 원탁회의가 열린다. ‘진보정당 창당제안 원탁회의’는 권영길 등 2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려 “노동자, 민중이 앞장서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로 대두되고 있다.”라는 제안문을 채택하고, 99년 안으로 진보정당을 창당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로 했다.

이런 흐름은 더 발전하여 4월 18일 열린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99년 8월 29일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2년여간의 준비 끝에 발기인 6,215명으로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깃발을 올린다. 당시 약 1만명 가까운 당원과 35개 지역에 창당추진위(준비위)를 갖고 있었으며, 2000년 1월30일 창당대회를 가지기로 한다. 

돈 대고 몸 대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노동자 정치활동에 대해 우려와 걱정도 많았다. 현장의 활동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국민승리21 사업이 민주노총 내에서조차 뿌리를 쉽게 내리지 못한데 대한 궁금증과 우려가 있다. 정치 사업에 대한 무수한 지뢰밭과 걸림돌을 경시하고 돌격 앞으로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한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정치세력화는 한낱 허구일 뿐이다.”

“현 단계 명실상부한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건설되려면 10년의 민주노조운동 과정에서 단련되고 검증된 지도력들이 중앙당이나 지구당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 아직은 민주노총 내에 그럴만한 세력이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톡 까놓고 얘기해서 현재의 우리 수준은 진보정당에 돈 대고 이름 대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진보정당 건설은 당원의 조직 및 재정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보면 민주노총 당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의존도가 높으나, 민주노총 내부는 전업적으로 정치활동을 하려고 하는 세력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게 문제다.”

“민주노총은 당분간 진보정당이 자립할 때까지, 돈 대주고 몸 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부분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재정과 당원이라고 하는 하부 기반이 튼튼해야 명망인사를 영입하거나, 노조 내부에도 직업으로서 정치를 하겠다고 결단하는 인사가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걱정과 우려도 있었지만 “어쨌든 현실은 민주노총이 핵심적 기반이 되어 진보정당은 건설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진보정당 건설이 객관적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물리적 한계는 인정하되, 선거 한번으로 무너지지 않는 정당, 노동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할 정당을 만들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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