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는 우리의 대의가 아니다"
        2011년 02월 11일 01: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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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 실린 최장집 교수에 관한 김윤철 박사의 기고를 흥미롭게 읽어봤다. 세간에는 반MB 프레임에 반대하는 최장집의 정치-이론적 진단들이 ‘지나치게 냉정한’ 것이 아니냐는 반응들이 있다. 이에 대응하여 김윤철은 최장집의 논점을 옹호하는 반론글을 <레디앙>에 올렸다.

    좌파 고유의 관점은 없는가?

    반론측의 주장은 현재 야권에서 설정하는 민주세력 대 반민주세력의 대결구도와 독재심판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근본적으로 허구적이며, ‘좋은 통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논쟁을 읽고 난 독자로서 나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두 입장 모두 어쩐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고유의 좌파적 관점은 없는가?

    최장집 이론에 계몽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적인 기대와 환상에 ‘이성적인’ 찬물을 끼얹는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란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만능의 마술봉이 아니며, (비록 가끔씩 그러한 환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무엇보다 누군가 분파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정치적 ‘대의(大義)’는 더더욱 아니다.

    최장집의 이론은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일련의 사회집단들 사이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분석은 결국 오늘날 민주주의를 어떻게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 것인지(make it work)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나아간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동력은 물론 일련의 갈등들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데 있다. 사회 내의 갈등들이 일련의 합의된 규칙 속에서 폭넓게 제도화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제도적 영역 속에 대표되지 못한 사회적 갈등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태로서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과 환멸과 같은 위기를 낳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최장집의 논의가 한국사회에 대해 지니고 있는 계몽적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는 그 누구의 대의도 아니다"라는 테제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관하여 원칙적인 비당파성을 고수하는 것에서 최장집의 포지션을 가장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 독점권 주장은 위험

    민주주의의 관건은 주변적인 것으로 인지되었던 기존의 갈등들을 제도적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에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집단이 자신의 정치적 대변자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정 정치세력이 더 부각되고 덜 부각되는 현상은 있어도, 원칙적으로 누군가가 더 민주적 원칙에 충실하느냐의 판단은 (정치적 수사의 측면을 제외하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성패 여부는 갈등이 진행되는 양상으로 평가되는 것이지, 그 갈등에서 누구의 편을 선택하느냐라는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원칙상 어떠한 당파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것이라 하겠다.

    결국 규범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 특정 정치세력이 독점권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는 도리어 민주주의의 정상적 작동을 저해하는 잠재요소가 될 수 있다.

    물론 최장집의 이론을 통해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싶어하는 일부 진보세력이 실패하는 지점을 짚어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이론은 ‘독재정권 심판’이라는 프레임 아래에서 진행되는 범야권 간의 선거연합 전술에 관해서도 비판적인 지점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민주주의란 갈등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규정될 수는 있어도, 특정 정권이나 정파의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민주 대 반민주라는 연합전술의 프레임은 배제된 사회계층의 정치적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방안을 도출하지 못하는 한, 지극히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정치적 적대

    그러나 좌파들이 최장집의 메시지를 가장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최장집과 같은 정치학자의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놓지 말아야 한다.

    최장집이 놓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민주주의란 원칙상 특정 정파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대의는 근본적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누군가에게 선험적으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 사회 내부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정치적 ‘적대’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즉 보다 ‘반성적'(reflexive)인 차원에서, 누가 민주주의 사회를 이끄는 데 ‘더 적합한지’에 대한 자기 주장이, 세력들 간의 정치적 적대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기 주장은 엄밀히 말해 증명될 수 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주장은 정치적 갈등에 있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초월론적 가상’이다. 초월론적 가상이란 이를테면 아무리 이성적으로 ‘비판’한다고 해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환상’을 말한다. 그러한 ‘환상’이 바로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치적 경쟁을 보다 흥미진진(!)하고 현실감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제기되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최장집식의 사회학적 규범주의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무력하다. 물론 서로 간에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특권을 내세우는 행위들은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란 정의상 그러한 ‘상상적 적대’에 기반해 있는 게 아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민주 vs 반민주 투쟁은 민주사회의 불가피한 속성

    통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대해 우리가 흔히 놓치는 점은, 민주주의 규범에 관해 ‘사전에'(a priori) 합의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공통적인 지평이 현실 정치의 내부에서는 부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을 사전에 합의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한 것은 특정 아카데미즘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무엇이 더 민주적인 사회인지에 대한 각자의 전망이 부딪히고 충돌하고, 서로가 서로를 ‘반민주적’인 세력으로 규정하는 저 진흙탕 싸움(적대)은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전망들이 아무리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에 최장집 류의 사회학 이론이 노정하는 한계가 있다.

    ‘갈등의 사회학’이라고 자신이 명명하는 그 이론틀 내부에서는 한정된 가치와 자원을 둘러싼 개별 이익집단 간의 ‘갈등’만이 고려될 뿐, 민주주의의 틀 자체를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의 이념적 적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적대’가 정치적 참여에 대한 ‘현실감’을 보장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앞서 보았듯이 민주적 대의를 둘러싼 정치적 적대는 일정 부분 환상적이지만, 만일 우리가 거기에서 ‘환상’을 빼내어 버린다면, 그 사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갈등들은 ‘요점’을 잃어버리고 만다. 즉 정치적 ‘현실감’을 상실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정치 참여자들이 ‘민주 대 반민주’ 구도라는 손쉬운 이분법적 세계관에 자주 호소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요컨대 정치적 현실에 대해 원근감을 갖게 만드는 일종의 ‘조망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둘러싼 (상상적인) 대립축을 상정해야만, 우리 자신의 개별적인 선택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지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요컨대 이러한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자기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단지 근본적으로 모호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고립된 정치적 행위자로서 발견할 뿐이다. 사회학자들의 이상적 규범은 현실 정치인들에게는 파국적인 재앙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야권의 반MB 연대에 관한 구상은 민주주의 사회가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역설과 곤경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MB 연대 말고는 저 많은 정당들이 달리 무슨 정치적 내러티브를 대중들에게 내세울 수 있겠는가?

    공갈칠 것인가, 대중 동원을 포기할 것인가?

    그렇다면 저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최장집의 비판에서 좌파들이 가져가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앞서의 고찰을 통해 두 가지 선택지가 제시된다.

    첫번째는, 민주주의에 대해 다소간에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의 불가피성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전략상’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유권자들에게 반민주세력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식의 공갈을 칠 수밖에 없다. 다만 거기에 대한 ‘뒷수습’만 잘하면 되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그러한 프레임이 ‘어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 계몽적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다. 특히 최장집은 후자의 입장을 ‘영웅적’으로 고수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앞서 보았듯이, 대중의 정치적 동원에 관한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냉소주의와 규범주의의 딜레마(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좌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후자의 ‘계몽적’ 관점을 유지하되, 동시에 두가지 입장 모두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

    좌파들이 자신의 당파적 관점에서 최장집의 계몽주의적 테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대의가 아니다." 우리는 정치적 대의로 포장된 민주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수단’이다

    민주주의는 지금의 정치세력들이 전략적으로 고려해야 할 정치적 조건일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지금 당장 가용한 정치적 지지층을 선거철에 결집시킬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인민들의 실질적 요구들에 대해 어떠한 것도 보장하지 못한 채 전반적인 무기력과 환멸만을 안겨줄 것이다. 지난날의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말이다.

    민주주의를 특정 정파의 전유물이자 정치적 대의로 고양시키는 것은 최장집의 지적대로 얕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좌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 절차의 보장에 대한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사회적 불안에 직면한 민중의 급진적 요구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동원해내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양보 없는 실현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약속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은 물론, 민주적 절차와 제도 전반을 ‘민중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겠다는 가장 급진적인 제안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저 가치규범은 과거와 같은 물신숭배의 대상이기를 그친다.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정치적 대의를 실현시키는 정치적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자본가들과 기술관료들에게 민주주의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과 정 반대로 말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좌파들의 ‘무능력’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좌파들은 자신의 의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의’를 정식화하는 데 실패했다. 즉 우리들은 대중들에게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대안적인 대립구도를 정치적 대의로서 인민들에게 제시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일부 진보세력들이 반MB 연대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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