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부문 동참, 독재체제 전복 가능성
    종교 뛰어넘는 단결, 새로운 저항운동
        2011년 02월 10일 08: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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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의 상황이 소강 국면을 지나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몇일 전 수많은 인파가 재차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는데, 경찰의 가혹행위 동영상과 이집트 보안당국에 체포됐다 풀려난 구글 임원이 TV 생중계에 나와 인터뷰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혁명 조기 ‘유산’ 전망과 이집트 시민들의 응답

    그동안 무바라크 대통령과 술레이만 부통령이 ‘개혁’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고 야당과의 대화를 추진하면서 일부 시민들이 일상으로 복귀하자 보수적인 언론 매체들뿐 아니라 일부 진보적인 매체들조차 이집트 ‘혁명’의 조기 ‘유산’을 점쳤었다.(심지어 중동 문제를 진보적 시각에서 보도해오던 영국 <인디펜던트>지의 로버트 피스크 기자도 매우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 시민들은 이런 논평가들의 예상에 대해 아직은 아니라고 손을 저은 셈이다. 문제는 어찌보면 단순하다. 무바라크의 독재가 너무나 길었고 시위에 나선 이집트인들이 엄청나게 변화한 데다 시위 도중에 동안 흘린 피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반면에, 이집트 현 정부 당국자들이 내놓은 소위 ‘개혁’ 조치라는 것들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그나마도 너무 늦게 제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군대의 진압 가능성을 의심한 이집트 정부가 대신 갱단들을 동원해 시위대에 타격을 주려했던 것이 오히려 시위대의 분노와 결기만 곧추세우는 결과만 만들었다.

    사실 이런 구시대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주적인 시위대에 테러를 가했다는 것 자체가 현 이집트 정부가 얼마나 상황 주도력을 상실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집트 정부의 이런 ‘개혁’ 조치가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었는데, 문제는 그 효과가 이집트 정부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더 폭넓은 부문의 사람들이 시위에 결집하기 시작했고, 시위 양상이 지방 소도시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노동 부문이 움직임 크게 주목돼

    가장 중요한 점은 몇일 전부터 이집트에서는 그동안 이집트 정부의 가혹한 억압으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웠던 이집트 노동 부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위 대중들이 무바라크 정권에 대항해 싸운 결과, 성에 차진 않지만 연이어 정부로부터 양보들을 받아내는 것을 목도한 노동 부문이 이번엔 자신들을 규합하여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고도 해석 가능한 부분이다. 이런 장면은 어쩐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데, 바로 1987년에 우리는 유사한 패턴을 경험했다.

    현재 술레이만 부통령은 시위를 해산하지 않으면 재차 경찰력을 투입하거나 쿠테타를 하겠다며 위협하고 있지만, 이조차 쉽게 이루어질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일단 미국은 이러한 조치에 당황하면서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비상조치법을 먼저 해제하라고 다급하게 요구하고 있다.

    더군다나 대중 시위가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성격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군대를 성급하게 투입했다가는 자칫 군대 내의 분열만 노출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군대의 분열은 무바라크라는 ‘파라오’ 한 명을 주되게 겨냥한 시위가 각계 각층의 참여가 확대되고, 노동 부문의 동참-특히 수에즈 운하에서의 파업-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자칫 이집트의 구 독재체제 전체라는 ‘피라미드’를 전복하는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파라오에서 독재체제 전체 전복 가능성

    결국, 공은 다시 오바마와 무바라크, 술레이만의 코트 안으로 넘어온 셈인데, 대결 양상은 누가 먼저 벼랑 끝을 앞두고 차에서 뛰어내리느냐의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이집트의 상황이 양측간의 더는 피할 수 없는 대결로 가고 있기에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상황이 어디로 갈 지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집트 ‘혁명’은 이미 사회혁명의 단계에 도달한 듯보이며, 이는 술레이만 부통령 하의 이집트 정부를 또 한차례의 양보-이번엔 무바라크의 토진-냐 아니면 파국이냐로 몰아넣고 있는 듯 보인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든 이미 이집트 혁명은 그 과정에서 이집트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지울 수 없는 흔적과 의미를 던졌다고 본다.

       
      ▲2011년, 국제 정치의 핵으로 떠오른 중동지역의 위성 사진-왼쪽은 이집트, 중앙은 사우디 아라비아, 오른쪽은 이란.

    먼저, 이번 이집트 혁명은 굴곡 많은 중동 역사를 2011년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구분선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중동인들이 겪어온 외세의 간섭과 독재정권들의 연이은 억압 탓에 중동 지역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고사하고 그것을 구체화할 동력으로서 민주주의적 운동, 더 본질적으로 중동인들 자체가 민주적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솔직히 이런 회의적인 시선은 진보적인 진영들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번 이집트 혁명이 고비마다 정체와 소강, 위기를 겪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무심결에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생한 이집트 혁명은 이집트인들도 선진국의 저항들이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수단과 조직 방법, 보편적인 요구 조건과 영감을 바탕으로 정부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동지역의 전혀 새로운 저항운동

    두 번째, 이집트 혁명은 기존에 중동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운동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비슷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에 처해있는 아랍 세계에 큰 자극이 되고 있다. 이집트가 중동지역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문화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집트는 중동 지역에 강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번 이집트 혁명도 그동안 중동 지역의 권위주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채 해결 방법을 모색해 온 수많은 아랍인들에게 일종의 모델과 영감의 원천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는 현대에 들어 아랍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테러주의라는 각이한 저항 방법을 겪어 온 아랍 대중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조직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나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고, 정부의 가혹한 탄압으로 세속적인 성격의 운동이 존재할 여지가 힘들었던 중동 지역에서 종교를 뛰어넘어 대중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던 이집트 혁명의 사례는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이 지역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한 알 카에다의 극단적인 테러주의나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종파간, 국가간 대립이 정치지형을 지배하면서 외세의 분열 지배와 대중들의 단결을 힘들게 한 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종교적 완고함이라는 이미지를 좀처럼 벗기 힘들었는데, 그 결과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실제 이집트만 해도 시위가 벌어지기 전까지 이집트 이슬람교와 이집트 기독교도인 콥트교도간의 충돌이 종종 발생했지만, 지금은 이들 모두가 무바라크에 대항해 힘을 모으고 있다.

    종교를 뛰어넘어 대중 단결시켜

    이런 양상은 이집트 야권 세력의 중요한 주도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이 시위 과정에서 보인 태도나 입지를 봐도 알 수 있다.

    다수의 아랍국가들에서 활동하는 이 단체가 처음 탄생한 곳이 바로 이집트일만큼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도 튀니지보다 이집트에서 훨씬 강하다. 그런데도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은 이번 이집트 시위 뒤따르기 바빴고, 시위에 지도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또한, 여전히 이 단체 일부에는 이슬람 전통의 사회체제를 수립하자는 소수 분파들이 존재하는게 사실인데, 이번 시위의 영향으로 무슬림 형제단 스스로가 지금보다 더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외양과 본질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강한 자극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하메네이조차도 지난 2월 4일 이번 이집트 혁명의 ‘세속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30여년 전에 발생한 위대한 이슬람 혁명이 이집트나 튀니지, 기타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지난 9.11 테러 이후 중동 지역 정치의 한 변수였던 알 카에다 같은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이번 시위 과정에서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구실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향후 이집트, 더 나아가 중동 정치에 긍정적인 전망을 가져보게 한다.(주지하다시피 이집트는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알 자와히리가 태어나 활동한 곳으로 알 카에다의 또다른 이데올기적 본거지로 지목되는 곳이다)

    이란 영향력 없었다는 점도 주목 대상

    마지막으로 이란의 영향력도 거의 별볼일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 점은 중동의 친미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충돌에 대해 곧잘 이란의 개입을 운운했던 미국이나 이스라엘조차도 입을 닫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란도 진정한 승자가 될른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다. 이란은 그동안 자신의 혁명 과정과 국가 모델이 중동에서 민중들이 선택해야할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모델이라고 선전해왔지만, 이번 이집트 혁명의 출현으로 이란 혁명 모델과는 또다른 선택지가 중동 민중들 사이에 제시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부분적으로 감퇴하는 상황을 겪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조짐은 망명을 끝내고 튀니지에 돌아온 튀니지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인 라치드 간누치나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부의장인 알-바유미가 향후 건설될 자국의 정치적 모델을 이란에서 찾고 있지 않은데서도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터키같은 체제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고 있는데, 터키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와 함께 이슬람 국가들 가운데 일단 가장 민주주의적 체제에 가까운 외양을 갖추고 있다.

       
      ▲지난 1981년 10월 6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군사 퍼레이드에서 행진을 관전중인 당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당시 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 사다트는 잠시후 이 장소에서 이슬람 지하드 주의자들에게 암살된다. 이 일로 호스니 무바라크는 이슬람 지하드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암살을 두려워해 몸을 꼭꼭 숨기며 지내왔지만, 정작 그는 암살이 아니라 대중 시위로 퇴진 위기에 몰렸다.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퇴진 선언

    세 번째, 지난 한 달 사이 4명의 아랍 정부 수반들이 자신의 임기 만료 후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1번이 튀니지에서 축출된 벤 알리 대통령이었고, 2번이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이며, 3번이 지난 2월 2일 재선거 도전 포기를 선언한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다. 마지막은 미국이 점령했던 이라크 총리 누리 알 말리키다. 물론 이런 연이은 선거 도전 포기 선언 이전에 이미 레바논에서는 서방이 지지하는 사드 알 하리리 정권이 무너진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집트 혁명은, 튀니지에서는 한 달에 걸쳐 이루어낸 대통령 퇴진 국면을 보름여 만에 국제적 촛점으로 만들었다. 연이어 알제리와 수단, 요르단, 예멘, 쿠웨이트 같은 곳에서도 정부에 항의한 시위들이 발생했거나 예정 중이다.

    알제리 야당과 민주화 추진 단체는 오는 12일 정부 불허방침에 불구하고 수도 알제에서 반정부 시위를 강행키로 했다. 현재로서는 이집트가 중동 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국가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 때문에 진행이 매우 격렬하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 혁명의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중동지역에서의 재차 새로운 양상으로 이집트 혁명의 파급력이 다시금 속도를 탈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파급이 각 국의 구체적인 정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즉,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례를 접한 친미 아랍 국가들은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예방 혁명’적 성격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미 요르단 국왕이 발빠르게 이런 조치를 취하여 대중 시위를 잠시간 잠재웠는데, 대중들로부터 정치개혁이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총리 내각을 해산하며 일정한 정치 개혁을 약속한 것이다.

    심지어 중동지역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조차도 이집트 혁명의 지진파를 감지한 상태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이자 메카 주지사인 칼리드 알-파이잘이 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주에 이례적으로 5명의 사우디인들을 불러 사우디 제다시(市)에서 발생한 홍수 사태를 수습하는 정부의 노력을 설명한 일이 있었다.

    홍해 연안 항구도시 제다에서는 최근 수년간 홍수로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기반 시설의 취약함이 드러나면서 시설 조성 때 광범위한 부패 개입 가능성 때문에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눈에 띄는 점은 알-파이잘 왕자가 초청한 5명 가운데 정부의 부패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반정부 블로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왕자는 이 블로거에게 민생에 대한 사우디 왕실의 관심 등 이날 대화의 내용을 트위터로 젊은 세대들에게 잘 전달해달라는 특별한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사우디 역시 10%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과 물가상승, 빈부격차, 오랜 독재체제 등 이집트보다 정도는 덜해도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데, 이집트 사태가 아니었다면 이런 조우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혁명의 변주

    바레인 국왕도 식량가격 급등에 따른 시민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보조금과 사회보장비 증액 등을 지시했다. 물론 이들 정부의 이런 조치들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적인 조치조차도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즉,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는 대중적 시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들이 가진 불만에 대해 정부가 취하는 다급한 개혁-물론 부분적이지만- 조치는 대중들에게는 일정한 자신감을 주는 반면, 해당 정부는 이후에도 비슷한 요구들에 지속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상황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집트의 사례가 다른 국가들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더라도, 각 국의 구체적인 상황과 정치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영향은 각기 다르게 ‘변주’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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