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산 죽음과 미국 연관성 연구돼야
    민주당, 집권하면 한나라당 뺨칠 것
        2011년 02월 05일 1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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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만장일치로 죽산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59년 7월 31일 대법원의 사법살인과 전격적인 사형 집행 이후, 죽산은 무려 사후 52년 만에 비로소 ‘법적’으로 무죄가 됐다. 사실 아무도, 그를 사형으로 몰고간 정적 이승만조차도, 죽산을 유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법살(法殺)이라 하지만, 정치적 살인이 먼저였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이 북진 통일을 외칠 때 평화 통일을 강조하고, 피해 대중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 진보적 대중 정치인의 비극적 죽음에 관한 진실이 형식적으로, 최종적으로 밝혀졌지만, 우리 사회는 조용한 편이다.  

    죽산의 사망 소식을 한 일간지만이 짧은 기사로 전했던 것처럼, 그의 대법원 무죄 판결도 언론과 대중의 조명과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전자가 정권에 의한 ‘기획’이었다면, 후자는 무심한 세월과 그 위를 함께 떠가는 대중의 무관심 그 자체 때문인 것 같다. 

       
      ▲인터뷰 모습(사진=정상근 기자)

    보수 정치권에 몸을 담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정치인 조봉암에 관심을 갖고 직접 집으로까지 찾아가기도 한 남재희 전 장관을 만나 조봉암의 정치적 삶과 생각, 그리고 당시 상황과 요즘 정치에의 시사점 등을 들어봤다. 이번 인터뷰는 한국정치를 전공한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가 담당했다. 

                                                      * * *

    쓸쓸했던 그날 방청석 모습

    조현연  지난 1월 20일 죽산 조봉암 선생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만장일치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사형을 언도받고 돌아가신, 그야말로 ‘사법살인’ 이후 52년 만에 신원이 회복된 것이다. 당시 남재희 선생님과 진보당의 막내 격이었던 정태영 선생님(조봉암 전집 편저자. 진보당 청년 당원으로 활동)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정태영 선생은 당신의 꿈이 늘 죽산의 명예회복이라 했었다. 이 사건이 재심에 들어가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셨던 것 같은데 미처 마무리를 보지 못하고 2008년 세상을 떠나셨다. 남재희 선생님도 기존에 여러 지면을 통해 진보당에 언급해 오셨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을때 소회는 어떠했는가?

    남재희 나는 처음부터 무죄라고, 그렇게 50여년을 생각해왔다. 당연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때문에 나에게는 이번 판결이 충격적이지도, 돌발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대법원에 직접 가서 심리 중 방청석을 둘러봤는데 알 만한 사람들, 알려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심리가 두 번 진행되었는데 첫 공판에는 이종찬, 이부영이 정치인으로 참석했더라. 나까지 해야 기성정치인이 셋이었다. 이종찬이야 첫째가는 독립운동가 집안이고 영국에서 오래 생활을 해 생각이 상당히 생각이 트였고, 개혁적인 인물이며, 이부영은 재야 투쟁을 오래 해 온 사람인데, 무죄 판결하는 날은 이종찬이나 이부영도 안 왔다. 왔으면 좋을 뻔했는데.

    그래도 인천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인 지용택씨가 온 것을 보고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당일 날 참석한 분들 가운데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었지만, 명망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진보당 사람들도 이제 모두 죽었기 때문에 방청석이 너무 쓸쓸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천에 동상 세워라"

    그래도 공판 후 옛날 진보당과 관계된 친구들과 파티를 벌였는데도 쓸쓸했다. 그냥 몇 사람이 소주 마시면서 "잘 됐다"는 얘기를 했던 정도였다. 정태영씨가 죽산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고 죽산의 전집도 냈는데, 그 양반이 살아 있었더라면 싶더라,

    공판이 끝난 후 지용택씨에게 당신이 (죽산의)동상 건립을 책임지라 했다. 역량 있는 사람인데다 그의 고향이 죽산과 같은 인천이기도 해서 그렇게 얘기했다. 세월이 가면 고향사람이 그런 것을 만들어줘야 한다. 인천 출신의 내세울 만한 명사는 죽산이 1호 아닌가? 인천에서 추모 사업을 계속해 중추가 돼야 한다.

       
      ▲진보당 사건 재판 모습.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옷 입은 이가 죽산. 

    조현연 선생께서는 죽산과 어떤 인연을 맺어왔었는가?

    남재희 내가 죽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생 때부터였다. 죽산의 정치노선이 맘에 들었다. 평화통일 노선, 혁신정치의 이상이 좋았다. 내가 학생 때 죽산이 사직동에 살았는데 죽산의 집을 방문했던 적도 있다. 나에게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때 안 갔다면 죽산을 개인적으로 만나 얘기하지 못했을 거다.

    그때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죽산이 “자네가 거창한 생각만 하지 말고, 서클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라.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실제 죽산의 행보가 그래왔기 때문에 그 말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한 것이다. 사실 서클을 계속 만들어야 큰 정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당 전당대회도 가봤다. 명동에서 했는데 요새 기준으로 보면 참 초라하고 유치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땐 감격적이었다. 당시 박지수 시인이 ‘묵념’이라는 제목의 시낭송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면접관 첫 질문 "죽산 사건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개인적으로도 죽산과 인연이 생겼고, 내 친구였던 권대복이 개혁적 청년이었는데, 그가 진보당 청년학생조직인 ‘여명회’ 조직을 책임졌다. 당시 여명회는 국학대학 출신 많았는데, 세칭 일류대학 출신들이 진보를 하지 않아서 여명회는 국학대학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어쨌건 그를 통해 진보당 사람들을 거의 알게 되었다.

    이후 기자생활을 하면서 진보당은 아니지만 진보당 계열의 사람들과 계속 친하게 진해며 접촉해왔다. 그러면서 옛날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진보당계 사람들을 거의 다 알게 되고, 그래서 진보당에 대해 반쯤 전문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진보당 가입은 안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수습 기자 지원을 하면서 면접을 봤다. 그 면접관들도 다들 알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첫 질문으로 "진보당 조봉암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내 답은 “무죄입니다”였다. 면접관들이 내 대답에 기분좋아 하는 것 같았다.(웃음)

    조현연 조봉암의 사형에 대해 모든 언론이 침묵하는 가운데 <한국일보>만이 1단 6행 기사로 짧게나마 그 사실을 보도했다.

    남재희 그게 김중배 사회부 기자(동아일보, 한겨레 편집국장과 MBC 사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가 쓴 것인데 특종이었다. 그리고 <한국일보>에서 그 문제와 관련해서 4회에 걸쳐 연재사설을 썼다. 사설을 연속 4회 게재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사설은 죽산은 무죄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 자신도 죽산과 친했다. 그러니 그런 사설도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종신대통령 욕심이 죽산 죽음 가져와

    조현연 죽산 재판과정을 보면 1심 형량은 징역 5년으로, 불법무기 소지죄가 그 이유였으며,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유병진은 "진보당은 불법 결사가 아니며 국헌을 위배하지도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고, 배석판사 이병용도 "진보당 사건은 정치적 날조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죽산은 왜 죽었나?

    남재희 대충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자주 "조봉암은 어떻게 되었냐"고 추궁을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당시 법무부장관이 계속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기록에 나와 있다. 이승만 박사가 죽산을 살려두면 안 된다는 인상을 밑의 관료들에게 준 것이다. 그렇게 사형으로 몰아간 것이다.

    조현연 죽산은 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가장 큰 정적이 된 것 아닌가?

    남재희 이승만이 평생 (대통령)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봉암이 라이벌이 되는 것이다.

    조현연 동의하지는 않지만, 만약 부정투표가 없었다면 죽산이 이겼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남재희 전국적으로 보면 조봉암표 98장 앞뒤에 이승만표를 각 1매씩 붙여 만든 샌드위치 표가 많았다. 직접적인 증언도 들은 적이 있다. 조봉암 전집을 쓰기도 하고, 약수동 죽산집에 기거하던 전세룡은 "진보당 당사에 가면 1/3은 동암계, 1/3은 죽산계, 나머지 1/3이 정보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진보당에는 지방조직이 없어 지역에 가면 경찰이 유세를 방해하고, 이를 피해 도망다는 등 ‘유세’가 아닌 ‘유격전’을 벌였다는 말도 했다. 

    죽산 사형 민주당 암묵적 동조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사진=정상근 기자) 

    조현연 당시 민주당도 죽산의 사형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암묵적 동조를 한 것이 아닌가?

    남재희 그와 관련해 명확한 발언은 없다. 하지만 상황적으로 보면 민주당이 묵인을 한 것이다. 아마 ‘동조-묵인’ 정도로 봐도 될 것이다. 당시 민주당 강경파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죽산을 처단하는데 대해 우리는 괜찮다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죽산 처형 과정에서 미국이 어디까지 관계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실하다. 미국에서도 "죽산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정도의 압력은 넣었던 것 같다. "처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형까지는 안가도록’ 정도였던 듯하다. 미국에서 주한대사를 통해 이런 비슷한 발언을 했던 것이 나와 있기도 하다.

    미국과의 관계를 얘기하다보니 또 하나, 죽산이 해방공간에 미군에 연행됐던 사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지 않다. 『조봉암연구』를 쓴 박태균 교수의 죽산 연구가 비교적 잘 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박 교수도 미군 정보부대인 CIC와 조봉암의 관계를 잘 모르겠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시 죽산이 미군에 연행되어 5일 동안 있었는데 죽산이 나온 뒤 박헌영에 대한 서한이 공표가 된 바 있다.(조봉암의 ‘친애하는 박헌영 동무에게’, 이 편지 공개 이후 박헌영과 조봉암의 관계가 벌어짐) 일설에 따르면 죽산이 박헌영에게 줄 편지를 써서 지니고 있었는데 CIC에게 그것을 빼앗겼고, CIC가 그것을 우익진영으로 넘겨 공개된 것이라도 한다.

    "미국 연관성 더 연구돼야 할 부분"

    애매한 것이 왜 미군이 조봉암 같은 거물을 함부로 연행해 조사했는지 하는 점이다. CIC라는 것이 고도의 정치조직이며 버치 중위 같은 경우도 고도의 정치장교다.(버치는 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 군정청장인 존 하지 중장의 정치 고문이기도 했다) 죽산을 CIC로 연행했을 때도 분명 미국 정치두뇌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부분은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사실 죽산은 해방되기 몇 년 전으로부터 공산주의 운동에서 떠난 사람이다. 본인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죽산은 스탈린적인 방식을 납득할 수 없고, 코민테른 방식도 부정적이었다. 죽산이 공산주의와 손을 끊은 것은 이미 해방 전이었다.

    조현연 진보당 창당 과정을 보면, 1955년 9월 1일 ‘광릉 회합’을 계기로 반보수 혁신정당 결성을 지향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진보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의 조병옥 박사는 범야권 단일정당을 결성할 때 반대했는데, 창랑 장택상의 태도는 어떠했나?

    남재희 장택상씨는 아니다. 장택상씨는 진보당 전당대회에서 축사를 했다. 조병옥, 김준연, 장면 등의 선에서 이를 반대한 것이다. 당시 사사오입 개헌으로 자유당을 뺀 모든 세력이 당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이에 동조한 세력이 동암 서상일(대구 출신의 민주당 제헌의원)이나 김성수(전 동아일보 사주) 등이다.

    이것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민주당과 합당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조봉암은 흔쾌하게 여기에 들어갔다. 왜 죽산이 독자창당을 생각하지 않고 대동단결론에 뛰어 들어 갔겠는가? 죽산이 그만큼 자신 있었다는 것이다.

    죽산과 동암 갈라서지 않았다면?

    조현연 지금 ‘반 이명박 정서’가 있는 것처럼 50년 전으로 가면, 그때도 단일정당 얘기가 나왔던 것이 ‘반 이승만 정서’ 때문이 아닌가?

    남재희 이승만은 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있었고, 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는 등 현격한 독재 절차가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호헌운동이 생기기도 했다. 그때의 경우 명백하게 이승만 정권을 반민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만큼 독재자나 반민주라고 확고하게 이름 붙이기에는 어렵다. 부분 부분 얘기해야지. 하지만 부자 정권임은 틀림없다.

    조현연 범야권 단일야당이 실패하고 혁신정당운동이 벌어지면서 진보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이후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하면?

    남재희 진보당 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56년 결성)에는 죽산과 동암 서상일이 참여하였다. 이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했다. 이후 결국 죽산과 동암은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이영근씨(죽산의 비서 출신) 해석에 따르면 죽산은 동암과 손을 끝까지 잡았어야 했다. 동암은 소위 대구-경북의 프린스(Prince)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한민당 출신이다보니 동암과 손을 잡았으면 죽산에게 이런 불행한 사태가 안 왔을 수도 있지 않았나란 해석이다. 동암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는 거다.

    진보당 내부의 분열

    하지만 불행하게도 죽산 주변을 함경도파가 장악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죽산이 함경도 출신의 강원용 목사에게 3가지 제안을 했었다. 우선 농림부장관이 된 이후 농민을 지도하는 국을 신설해 국장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고, 52년 대선 때 선대본부장 직을 제안했으나 강 목사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58년, 죽산이 당하기 직전 낌새가 이상하자 김일사라는 ‘여걸’을 통해 강원용 목사를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죽산과 강원용 목사가 수사기관을 피해 비밀리에 음식점에서 만나 강 목사에게 진보당 당수를 맡아 달라 부탁했었다. 그러나 이것도 강원용 목사가 거절했었다. 어쨌건 그만큼 죽산에겐 강원용 목사가 정신적 ‘빽’이라는 의미다.

    핵심 간부인 윤길중씨도 선거구는 원주지만 함경도 북청 사람이고, 조직 책임자였던 이명하도 함경도다. 김기철와 전세룡이라는 비서도 함경도 출신이다. 완전 함경도세가 주변을 장악한 것이다. 물론 정태영은 전라도이고 그 밖에 전국 각지 지역 출신이 진보당에 망라됐지만 그 핵심은 함경도였다. 그들이 똘똘 뭉친 것을 흔히 약수동파라고 한다.

    죽산이 사직동에서 약수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전세룡은 아예 죽산집에서 살았고, 그들이 중심이 돼서 서상일을 배척했었다. 정태영이 쓴 책을 보면 서상일이 죽산을 배척했다고 했는데, 이영근씨 해석은 일명 약수동파라고 일컫는 함경도 세력이 서상일을 배제했다고 한다.

    실제로 서상일과 같이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강경파들은 ‘저 부패한 지주 놈’, ‘한민당 끄나풀’ 이런 식으로 인격적 모독을 주었다 한다. 그래서 감정이 나빠진 것이다. 예전 정치는 요즘과 달라 인물 중심성이 강했는데 이런 과정이 쌓이면서 서상일과 죽산이 나눠졌다. 사실 그때는 죽산과 동암이 진보당 창당 과정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둘이 손을 잡았으면 이승만 정권이 죽산을 함부로 못쳤을 거다. 그게 이영근의 해석이다.

    재분배보다 분배 문제 더 신경써야

    조현연 56년 대선 당시 죽산계와 동암계가 만나 대통령 후보를 동암이 나가기로 합의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당 대회 형식의 표결에서 역전되었다. 그것도 결별의 결정적 이유가 된 것인가?

    남재희 어느 계열이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다만 이영근씨가 더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수동계에서 동암에게 계속 모욕을 줬다는 것이다. 어쨌건 동암이 가진 배경이 아쉽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죽산이 동암이라는 ‘갓’을 썼어야 하는데.

    조현연 김영삼 정부 당시 노동부 장관도 하시고 몇 차례 복지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는데, 55년에 죽산이 펴낸 자신의 노선을 밝힌 책 ‘나의 정치백서’를 보면 복지사회 건설로 가야 한다며 복지를 계속 강조했다. 지금 복지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죽산의 노선이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복지가 노동과 무관한 것이 아닌데, 일부 진보정당들을 제외하고, 박근혜나 다른 쪽에서는 노동을 장식품 취급하면서 단순히 복지국가가 스웨덴-북유럽 방식만 놓고 얘기하고 있다. 복지국가 건설이 가능한 조건을 얘기해야 하는데, 위력적인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이 없는 상태에서 복지국가 건설이 가능할까?

    남재희 우선 복지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 알 것 같다. 다만 첫 번째, 소득의 분배와 재분배가 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문제는 분배의 문제다. 분배는 노사 간의 협상(Bargain)이다. 거기서 1차적으로 소득 분배가 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힘 관계는 정권이 주도하고 있으며 노조는 계속 위축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소득의 분배 구조에서 노조가 불리하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분배가 잘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재분배는 그 다음 문제다. 분배가 제대로 안되면 재분배도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말하고 싶은 것은 죽산의 이론적 참모가 주로 동경제국대학 정치과 출신들이다. 이동화 등은 그야말로 당시 최신의 이론을 가지고 진보당 창당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이 사실상 정강정책을 다 만들었다. 그랬다가 이동하 계열은 서상일 쪽으로, 이후 민혁당으로 떨어지는데 그때 정강정책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조봉암 복지와 서구 사민주의 구분 필요

    그 이론은 나무랄 데 없는 이론이다. 그들은 정통 구라파 사회주의 이론을 그대로 넣었다. 그래서 복지사회가 나오고 복지사회론이 거론된 것이다. 하지만 이영근씨 해석은 다르다. 중경부터 임시정부의 정강정책과 건국강령이 혼합경제적이고 절충식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손문의 삼민주의와 관련되지만 구라파적 사회민주주의 개념과 다르다는 것이다.

    죽산은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사회민주주의가 생소했으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민족이었다. 민족경제, 민족자립 등 민족이 강조된 시절이다. 그래서 조봉암의 글도 민족이 많이 들어간다. 이 부분을 강조해서 봐야 한다.

    죽산의 복지론을 보면 교육이 상당히 중요하게 강조되는데 죽산은 국가가 교육문제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 세번째 역시 교육이다. 죽산의 본래 정치노선은 민족의 비중이 크다. 때문에 진보당의 정책을 논할 때 서구 사회민주주의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실제와 차이가 날 수 있다.

    조현연 통일정책과 관련해 죽산의 평화통일 노선이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리게 되었다. 당시 이동화 선생이 평화적 통일이란 표현보다는 민주적 통일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고 했는데, 죽산이 평화통일에 강한 의지가 있었다고 기록에 나와있다.

    남재희 지금이야 평화통일이란 말이 아무것도 아닌데,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이란 담론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평화통일이란 단어를 던진 것 자체가 폭탄이다. 북진통일은 전쟁을 하자는 건데 평화통일이란 말을 썼으니 그 충격은 적지 않았다. 전쟁에 지친 민중이 거기에 지지표를 던진 것이다. 그것이 진보당의 표를 끌어오는데 반 정도의 역할을 한 것 아닌가 싶다.

    당시 ‘평화통일론’은 목숨 건 노선

    조현연 요새 돌아보면 평화통일이야 당연한 말인데 평화는 그 가치보다 수단과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최장집 선생은 평화가 통일을 위한 수단의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평화라는 가치가 독자적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최근 연평도 포격 문제도 있고, 통일이 중요한 진보적 가치라 주장하는 그룹도 있는 상황에서 평화는 통일과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가?

    남재희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50년대와 지금을 같은 차원에서 얘기하기 어렵다. 지금은 공산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얘기가 달라진다. 50년대만 해도 공산주의는 실패가 아닌 엄연히 (자본주의 체제의)경쟁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박사의 북진통일은 대단한 정치적 무기였다. 그 무기를 죽산이 평화통일로 깨버리니 경쟁자들은 (죽산을)‘죽여야 한다’ 이렇게 된 것이다.

       
      

    조현연 지금도 평화통일이 중요한 가치인데 아직도 서로 포를 쏘는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냐 통일이냐’는 질문을 던지면 젊은 사람들일수록 거의 다 ‘평화’라고 대답을 한다.

    남재희 나는 어느 세미나에서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 아니냐고 했다. 북한이 흡수통일 될 상태가 아니지 않는가? 중국도 있는데. 중국에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다. 압록강, 두만강 강변에 미군이 주둔하게 할 리 만무하다. 

    다만 북한이 파국에 가까워진 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부드럽게 넘겨서 남북관계에 파국이 없도록 해야지 흡수통일 운운하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단 북한에 원조를 해주면서 부드럽게 넘겨야 한다. 그러다보면 통일도 되는 것이다.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송지영(1916-1989)이라는 소설가 겸 언론인이 있는데, 그 사람이 평소에 이런 얘기를 했다. "보통 중고등학교에서 프랑스 혁명을 2~3시간에 다 가르친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모든 일이 빨리 진행되는 줄 안다. 프랑스 혁명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100여년 동안 일련의 사태들의 축적이 있었던 것인데 그걸 2~3시간에 가르치니 역사가 그렇게 빨리빨리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통일도 그런 식으로 길게 생각하는 거지 몇 년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으로 생각할 필요 없는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몇십 년, 길게는 백년을 생각하면서 평화적으로 왕래를 할 수 있다면, 국경선에서 군사적 대치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경계선이 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공산주의 체제는 실패했다.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조봉암과 박헌영

    조현연 학생시절 죽산 선생 집을 직접 찾아가 만나고, 진보당 창당대회도 관심 있게 봤다고 했는데, 인간 조봉암의 매력이나 결함은 무엇인가? 진보당 간부인 권대복 선생은 죽산 선생이 ‘청년들의 우상’이었다는 표현을 썼다.

    남재희 <조선일보> 전 사주, 방일영이 죽산과 술 친구였다. 방일영이 나에게 한 이야기인데 죽산은 술도 잘먹고 노래도 잘하는 ‘한량’이었는데, 이런 대목은 흔히 생각하는 혁신운동가와는 다른 모습이다. 죽산이 국회의원 활동 당시 함께 활동했던 송방영 의원도 죽산은 술을 즐기는 타입이었다고 전한다.

    죽산은 어느 정도 호걸풍이 있는 사람으로 박헌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대비된다. 박헌영은 원리원칙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인데 죽산은 그게 아니었다.

    조현연 정태영 선생은 이를 ‘낭만’이라고 표현하던데(웃음)

    남재희 낭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헌영은 공산주의 조직원으로서 철저한 인상이었지만, 죽산은 그런 인상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보면 타락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진보당은 ‘단핵’이다. 그 사람 하나 빠지면 없어지는 것이다. 조봉암이라는 한 사람의 단핵이 부채살처럼 퍼진 형태다. 그러니 조봉암이 사형당하면서 진보당이 무너진 것이다.

    한민당은 다핵구조였다. 그러니 장덕수가 없어도, 송진우가 죽어도 가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죽산은 끊임없이 그루핑을 했다. 제헌국회 가서도 그루핑을 했고, 그것이 축척되면서 정당으로 전환한 것이다. ‘깃발 들고 따라오라’가 아니라 밑바닥부터 조직을 해 온 것이다.

    죽산은 또 요새 식으로 화려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정치적으로 레토릭이 화려하고 강한데 비해 죽산은 레토릭을 잘 안썼다. 소박한 얘기로 출발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어떻고 저떻고, 그런 얘기를 잘 안했다. 그런 점에서는 요새 정치가들과 다르다.

    조봉암과 김대중

    조현연 최근 이명박 정부 시기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죽산의 삶을 통해 지금 시대의 어려운 부분들을 돌파할 지혜를 찾는다면, 뭐가 있을 수 있나? 성찰없는 혁신은 맹목적이고 혁신없는 성찰은 공허하다. 이것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어디 있을까?

    남재희 죽산은 강인한 사람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면서기를 하고, 고생 고생하면서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당시 죽산은 공산주의 운동을 했는데 그때 공산주의 운동은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공산주의 이론에 곧 환멸을 느끼면서 왜정 말기에 공산주의에서 떠났다.

    죽산의 능력은 그 기간 동안 쌓여진 오랜 투쟁 경력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것이 정치력으로 이어졌고 판단력을 높였다. 죽산은 농림부 장관 되었을 때부터 이미 그루핑을 시작했다. 강원용 목사에게 농민활동지원국장을 제안했고, 그게 안되면서 조동필을 영입했다. 그리고 이영근 씨에게 농민 관련 언론매체를 만들도록 해 농민조직을 시작했다.

    당시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면서 이승만 박사도 농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민당이 이를 반대하니 죽산에게 농림부장관을 맡긴 것이다. 당시 죽산은 농민지원국을 만들었고, 그게 요새 식으로 말하면 농협이다. 당시 농민이 7할이 넘었으니 농민조직이 가장 컸고, 그것이 죽산의 조직이 된 것이다.

    그렇게 죽산은 이미 그때부터 대중들을 포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히 조직적인 두뇌가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면 죽산에 필적할 만한 대한민국 현대 정치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 정도가 아닌가 싶다. 김대중도 불리한 소수파 입장에서 세력을 점점 늘렸다. 호남이라는 마이너리티에서도 세력을 지속적으로 포섭해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기택 같은 영남세력도 포섭한 것 아닌가?

       
      ▲지난 해 죽산 서거 5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남재희 전 장관. 

    참모들 죽산에 인도 망명 권유

    역량으로 보면 죽산과 김대중씨가 막상막하인데 김대중씨가 집권했으니 죽산보다 성공한 것이다. 김대중도 죽산도 권력이나 힘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언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특성이 있다. 쓸데없이 권력에 도발해 탄압 받을 필요는 없다. 죽산도 신중한 처신을 해왔다. 말로 꼬투리를 잡힌 적은 없다.

    게다가 죽산은 개인 역량에 자신이 있으니 당시 (반이승만)범야권 대동단결에 흔쾌히 뛰어 들어갔다. 흡수당하지 않고 자기 세력을 구축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날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의 대통합에 그때의 죽산처럼 흔쾌히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아마 소멸될 것이다. 그만큼 카리스마 있는 거물이 없다.

    죽산은 58년 검거 당시에도 자신의 참모들이 해외망명을 권유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며 자진 출두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참모들이 권한 망명지가 인도였다는 점이다. 당시 세계에서는 네루 치하의 인도는, 사회민주주의의 본산으로, 막연하게나마 이상적인 제3세계로 여겨졌던 측면이 있다. 

    죽산의 참모들이 인도를 추천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것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세계를 선택한 인민군 포로의 이야기를 다룬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년 10월 발표)의 주인공 이준명도 인도로 가는 ‘타고르’호를 타고 가다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는 점이다. 

    범야권 단일정당하면 진보 소멸

    조현연 당시 (반 이승만)범야권 단일야당 운동이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반 이명박 ‘전선’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현재의 진보진영에서는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를 넘어선 통합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남재희 연합 정도지, 통합하면 (진보정당은)사라진다.

    조현연 ‘광릉 회합’ 이후 벌어진 것이 혁신정당 논의다. 지금은 진보대통합 관련된 논의가 있는데 과거 동암과 죽산이 다른 길을 걸었던 점에 반추해보면, 현재 진보진영 내 논의가 진행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나?

    남재희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다. 다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민주당과 관련된 문제로, 지금 조중동 등을 보면 민주당을 진보세력으로 분류하고 있다. 난 이게 불만이다. 민주당이 왜 진보냐? 개혁적이란 표현은 가능하다. 민주당 안에는 별별 세력이 다 있다. 아마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또다시 우경화 할 것이다.

    민주당 안에도 한나라당 사람 못지 않은 사람들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이 집권하면 언제 그랬더냐 하면서 한나라당 뺨치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해서 연합을 해야 영향력 행사할 수 있다.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선거연합 정도 하는 거다. 통합을 하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갈 수 있다.

    동암과 죽산이 깨진 것은 이영근 씨 해석에 따르면 약수동파가 동암을 내친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약수동 세력을 다 버려도 동암하나 잡은 것만 못했다. 당시는 명사정치 시대니까, 조직이 필요 없고 죽산 하나가 필요했던 거다. 지금은 물론 다르다. 하지만 참고는 할 만하다.

    "사형 판결하면 대통령이 감형할 줄 알았다"

    조현연 조봉암 재판이 1심에서는 징역 5년에 그쳤는데 갑자기 고법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1심에서 간첩혐의는 무죄로 되었지만 고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려들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뒤바뀐 원인은 무엇인가?

    남재희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일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예수의 사형 여부를 물어봤다. 그러자 주변에서 "사형시켜라"라는 말이 세 번 나왔다. 죽산이 죽기 전에 그 신약구절을 언급했다고 한다.

    김갑수(당시 대법 주심판사) 회고에 따르면 다시 대법에서 사형을 판결해 위로 올라가면 이승만 박사가 감형할 줄 알았다고 하더라.(웃음) 그 당시 사형 언도를 내린 고법 주심판사는 이북에서 넘어왔다고 한다.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이 주심을 맡게 되었고 정권에 밉보였던 죽산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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