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보다 정치, 정치보다 인간을"
        2011년 02월 05일 11: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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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학기 ‘정치학 개론’ 시간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영화를 학생들과 함께 보았다.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를 위한 한 정치가(윌리암 월버포스)의 신념, 열정, 좌절, 그리고 ‘영리한 전략’에 바탕한 목표의 달성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난 후, 영화 속에 나타난 ‘정치’를 보며 갖게된 ‘정치에 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한 장면. 

    학생들은 주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도 여러분들이 쉽게 떠올린 그것일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정치가의 도덕적 신념과 열정, 좌절했으나 정의를 구현키 위해 다시 분연히 떨쳐 일어나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들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정치와 전략적 지혜

    그리고 한국의 정치가 ‘후진’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정치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옳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만으로는 개혁을 위한 정치적 실천이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영화수업을 했던 한 가지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이미 노예제 폐지를 추진하는 이들의 입에 의해서 ‘그것만으로는 안된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정치가 발견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중 어떤 학생 하나가 말했다. ‘전략적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 순간 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월버포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성공은 도덕적 신념과 열정의 동원, 좌절을 딛고 서는 불굴의 의지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성공은 목표에 대한 ‘직설적 주창’마저 삼가하면서, 반대자들마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그래서 반대자들을 교란시킬 수 있었던-‘애국심’이라는 명분을 활용하여, 노예제를 지탱하고 있던 수단-노예무역-을 무력화하는 전략을 고안해내고 실행했을 때, 비로소 얻어진 것이었다.

    월버포스 등은 영국과 전쟁을 치른 직후 적대 관계에 있던 프랑스 선박들이 미국기를 달고 항해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법안을,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닌, 한 의원에게 발의케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 선박은 사략선-국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무장 민간 선박-이나 영국 해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적대국인 프랑스 선박들이 그것을 이용해 해상무역을 하면서 영국의 국부를 위협하고 있으니, 사략선(私掠船)에게 미국기를 단, 프랑스 선박으로 추정되는 선박 나포를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노예선의 80%가 해적들에게 노예를 빼앗길까봐 미국기를 달고 항해한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즉 노예선의 항해를 막는 효과를 갖게 되는 법안의 통과를 통해 노예주들이 노예무역으로부터 이득을 기대할 수 없게끔 하면서, 노예제 폐지에 대한 반대의 이유를 없애는 ‘우회적’ 방법을 썼던 것이다.

    진보파들의 인식과 태도에 대한 깊은 통찰

       
      ▲책 표지 

    최근에 출간된 박상훈 박사의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은 정치는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전략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고 역설하는 ‘정치학 교과서’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는 의도의 선함만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 속에서 공동체에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야하는 인간의 실천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은 ‘정치바로 아카데미(원장 심상정)’에서 ‘진보파’를 대상으로 총5회에 걸쳐 이루어진 박상훈 박사의 정치학 강의를 묶은 것이다. 이 때문에 책은 ‘진보파에게 말걸기’의 형식으로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1강), ‘정치의 기술, 실천의 기술’(2강),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3강),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들’(4강), ‘이런 정치를 원한다’(5강), ‘정치적 글은 어떻게 쓰는가’(부록)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강의들은 베버, 알린스키, 오바마, 샤츠슈나이더와 같은 저명한 학자, 운동가, 정치가 등의 텍스트에 대한 독해에 기초해, 민주주의 초기 서유럽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과 한국의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의 현실, 그것을 둘러싼 진보파들의 인식과 태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박상훈 박사는 정치는 ‘교과서가 없는 분야’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말한다. “설명도 예측도 잘 안되는 분야”로 “경험 분석의 대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실천적 영역”이기에, “그 어떤 이론으로도 정치의 현실을 전체적으로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 계보의 정치관 강조

    이 때문인지, 박상훈 박사는 자신의 책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특정 계보의 정치관을 강조”한 것으로 “‘하나의 의견 내지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정치(학)의 현실과 ‘필자의 자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충분히 갖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각각의 강의들을 구성하고 있는 ‘토픽’들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 토픽들의 면면을 보면 교과서에 실려야할 혹은 실릴만한 ‘정치(학)의 기초’를 이루는 문제들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인간의 정치’, ‘정치행위의 윤리성’,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정당민주주의와 리더십’, ‘인간적 한계와 정치적 이성’(이상 1강), ‘정치적 실천론’, ‘의사소통의 기술과 말의 힘’(이상 2강),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왔는가’, ‘현대 민주주의를 말하다’(이상 3강), ‘국가, 정당, 당파성에 대한 현실적 이해’, ‘통치자, 지도자의 중요성’(이상 4강), ‘정치의 윤리적 기초’,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리더십 있는 민주주여야 한다’, ‘인간의 정치와 정치적 이성’(이상 5강) 등이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우리 현실 혹은 사례에의 응용’이라는 ‘연습문제’도 함께 실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교과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의 성격과 구성방식 때문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 책 전체에 걸쳐 강조되고있는, 즉 책의 바탕이 되고 있는 ‘기본 정신’의 ‘보편성’과 ‘교육성’ 때문이다.

    이 책의 기본정신은 “진보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 또 정치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이 더 넓고 풍부한 세계이며 진보파가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려면 인간과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치(학)과 관련한 그 어떤 언명이 이보다 더 ‘교육적’일 수 있을까.

    ‘도의’라는 잣대로 인민 협박하는 정치

    지금은 한국에서도 드문 일이 된 ‘투표 매수’와 관련된 우스운 ‘옛날 이야기’가 있다. 18세기 말 영국령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패로 악명높은 캐슬 선거구에 출마한 한 후보가 공정선거를 위해 ‘단 한 푼도 매수에 사용할 수 없다’고 마음 먹고, 명망 높은 교회 목사에게 부탁을 했다. 표를 파는 행위는 도의에 반하는 일로써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요지로 신자들에게 설교를 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목사는 “표를 팔거나 정치를 부패시키는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진다”며 엄중히 경고하는 설교를 했다. 다음날 그 후보가 한 유권자에게 목사의 설교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냐며 기대에 차 물었다. 퉁명스럽게 답한 유권자의 말은 이러했다.

    “그럼요. 확실히 달라졌지요. 드디어 표값이 20파운드에서 40파운드로 뛰었으니까요. 지옥으로 간다는 목사님의 말씀으로 두 배가 넘게 뛰어 최소한 40파운드를 받지 않고서는 팔지 않겠다고들 합니다.” 지옥까지 가야 하니 표값을 더 높게 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화는 후보와 목사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협소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정치의 발견』은 ‘지금 여기의’ 우리가 아직도 그 후보와 목사처럼 정치와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묻고 있다. 또 그렇게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도의’라는 잣대로 인민을 협박하고 교도하는 것을 정치로, 그리고 인민이 그것에 쉽게 굴하고 자신들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정치 실천의 과정에서-진보파든 보수파든- 수시로 되새겨봐야 하는 ‘교훈’이다.

    이 책은 부록으로 ‘정치적 글은 어떻게 쓰는가’라는 제목으로 10개의 짧은 글을 담고 있다. 모 일간지에 실었던 박상훈 박사의 정치칼럼 글이다. 이 글들은 책이 강조하고 있는 인간과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실제의 정치적 문제들에 직면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치의 중요성

    특히 ‘권력과 인간’이라는 칼럼이 인상적이다. “소박한 삶에서 비정상과 억압에 맞서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포착해내는 감수성 때문이다. 이 칼럼은 『정치의 발견』을 ‘마키아벨리스트 혹은 베버리안의 권력정치론’ 텍스트쯤으로 오해하는 이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이 책이 ‘진보보다 정치를, 정치보다 인간을’ 더 중시한다고 했던 것의 ‘증거’가 되는 글이라 생각되어서다. 굳이 인간적인 것의 중요함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글을 읽으면 이 책이 왜 그리도 정치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지 그 이유가 결국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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