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와 분노의 시대를 넘다
        2011년 02월 07일 01:4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그 동안에 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 전문) 

    신길수 전 위원장의 죽음 

    “8개월 후에는 당신의 큰아들이 대학생이 된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도 떠나 계시더니, 설마 대학교 입학식 때도 떠나 계시지는 않겠지요? 유서를 미리 써놓은 것을 보고 당신을 찾아 헤매다 울면서 돌아온 나를 안아주면서, “미안해, 안 그럴게, 그냥 한번 써봤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하면서 내 마음을 안심시켜놓고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 우린 다시 태어나도 서로를 선택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IMF가 오기 전까지는!” 

    고 신길수 형님의 형수가 고인에게 쓴 편지다. 98년 5월 27일 조합원들의 생존권 사수와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동아엔지니어링 노조의 전위원장인 신길수는 그렇게 떠났다. 당시 마흔 세 살이었고, 지윤이와 지현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98년 5월 23일 종묘집회에서 만났을 때 “밥은 먹고 다니냐?”며 걱정해 주더니, 바로 이틀 뒤 집을 나가서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7년 동안 노조 위원장을 하면서 따뜻하고, 겸손하게 연맹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물론 97년 대선 기간 중에는 출퇴근 가두 선전전도 열성적으로 했다.

    ‘끈끈한 의리와 넉넉한 웃음 그리고 칼날 같은 노동자의 원칙과 따뜻한 동지애’. 우리 모두는 그를 그렇게 기억한다. 너도 가 본 적이 있는 문경 땅은 그 정신을 이어 받은 ‘신길수 추모사업회’에서 장차 노동자 연수원을 지을 계획으로 사 둔 곳이기도 하다. 

    “우리 같은 전문 직업인은 직장을 옮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느 직장이나 같겠지만 특히 전문직은 다른 직장에 적응한다는 것이 불가능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 노동자가 어디 한번 회사 경영에 참여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항상 노사공동의 책임이라 하면서 실제 책임을 질만한 권리를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퇴직금과 고용보존은 남은 생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주주 회사가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남는 나의 식구 그리고 회사 동료들의 생존 문제는 너무 가벼이 다루지 말아 주십시오. 전임 위원장으로서 목숨을 던져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려 합니다.” 

       
      ▲신길수 전 위원장 위령제(98년 7월 14일. 서울역)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다. 바로 직전인 2월 13일에는 대우조선 노동자 최대림 동지가 분신으로 사망했다. 그해 5월 27∼28일 민주노총은 49개 노조 7만7천명이 참여한 총파업에 들어갔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29일에는 기아자동차에서 송인도 동지가 분신했다. 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일산에서 살 때 가끔 보았는데 온 몸이 분신의 후유증으로 망가져 있었다.

    나는 열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자꾸 열사를 만들어주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죽음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만든 죽음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국민승리 파견 이후 거의 1년 만에 연맹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곳곳에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경제위기와 노동자 

    경제위기는 그렇게 노동자들에게 다가왔다. 동아엔지니어링은 10대 재벌의 하나였던 동아그룹에 속한 회사였다. 신길수 전위원장이 15년 동안 다닌 이 회사는 IMF 직후인 1997년 말부터 회사가 임금체불을 계속해왔고, 마침내 98년 5월 부도가 났다. 모기업인 동아그룹은 체불임금과 퇴직금 등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회피했다. 당연히 생존권을 지키려는 투쟁이 이어졌다. 

    은지야. 자본주의에서 영원하고, 안정적인 것은 없다. 이윤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헤매는 자본의 탐욕 앞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는 ‘밥’일 뿐이다. 곳곳에서 거리로 쫓겨나는 노동자들이 생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의 사회, 약육강식의 사회는 ‘고통 분담’을 말하지만 자본가는 자신의 이윤을 줄이는 분담을 하지는 않는다. 그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98년의 역사다. 파견근로자가 22만 5천명으로 5년 사이에 8.3배가 증가했다는 통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98년 내내 정리해고와 인원감축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을 4대 개혁과제로 설정했다. 특히 자본과 노동 측의 반발이 예상되는 다른 세 부문을 선도하기 위해서 공공부문에서 구조조정의 모범을 보이려고 19개 공기업에서만 일률적으로 20%의 고용감축이 결정되어 3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자리를 떠났다.

    6월 18일 55개 퇴출기업 발표, 6월 29일 5개 퇴출은행 발표, 6월 30일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신고, 7월 3일 11개 공기업 민영화 계획안 발표 등 김대중 정부는 숨가쁘게 노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98년 상황을 대강만 추려도 아래 표와 같다. 거기서 고통을 한 몸에 받은 수많은 노동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조흥시스템 7월 25일 일방적인 청산 발표, 명동성당 농성, 단식, 삭발 투쟁 (99년 3월 4일 투쟁 종료)

    현대자동차 6월29일 4,830명 정리해고 신고. 7월 20일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무기한 천막농성과 파업돌입. 8월 24일까지 36일 동안 계속 투쟁. 전체 사원 4만5천명 중 10,117명 퇴직 (희망퇴직 8,171명, 무급휴직 1,669명, 정리해고는 식당아주머니 177명을 포함 277명)

    만도 7월 23일 1,163명 정리해고 통보. 8월 17일 정리해고 공세에 맞서 전면파업 돌입. 9월 3일 폭력 경찰 침탈. 익산, 아산, 대전, 청주 등 전국 7개 지부에서 조합원 수백명씩 연행

    아남반도체 9월 9일 사측의 부당해고 맞서 10일째 전면파업 중 경찰 투입. 조합원 39명 연행

    대림엔지니어링 9월 14일 일방적 구조조정 및 인원감축 기도에 대항 파업돌입.

    과학기술노조 9월 28일정부의 정부출연연구기관 구조조정안에 반대하여 단식농성돌입.

    유신코퍼레이션노조 10월 9일 77일간의 파업투쟁 종료,

    한국전력기술 11월 초 일 사측은 111명에 대한 대기발령 통보. 97년 300억 순이익 기록한 회사임에도 무조건 30% 인력 (650명) 정리해고 , 12월 8일 이광영 위원장 단식돌입 (99년 1월 4일 종료)

    소비자보호원 12월31일 40여일 동안 해 온 부당해고 철회투쟁 종료. 박용석 지부장 단식 11일 진행

    이 글을 쓰는 오늘자(1월 31일) 뉴스에서는 1월만 해도 2명의 노숙인이 얼어 죽었다고 한다. 작년 대졸 실업자가 34만6,000명으로 사상 최대라는 소식도 있다. 위의 상황과 10여년이 지난 2011년을 비교해 보자. 언제 자본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를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오는 것일까? 

    한진중공업 2011년 1월 5일 290명 해고 통보. 경영진은 다음날 2억 원이 넘는 연봉과 1백 74억에 달하는 주식배당을 함.

    대우자동차판매 2011년 1월 29일 264명에 대한 정리해고 통보서 발송, 임금 10개월 체불, 그 중 사원 150만원, 부장 330만원을 회사에 반납할 시 정리해고 제외 대상 선정에서 가산점주겠다고 통보.

    이제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몇 일 전에 우리 얘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30여 일 동안 너무 힘들게 농성하다보니까 애가 병이 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대체 어떻게 했길래 애가 이 모양이 되었냐고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투쟁을 하기 전에는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평범한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정리해고만큼은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자동차 식당아줌마 조합원) 

    “우리는 지금까지 처절한 투쟁을 벌여왔다. 지금 우리는 서너 살된 어린 자식들과 함께 투쟁을 벌이고 있다. 언론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볼모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내 자식새끼와 내 남편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는데 투쟁하지 않은 부인이 어디 있겠는가?

    공권력, 우리는 전혀 두렵지 않다. 공권력 들어 올 테면 들어와라. 들어와서 만삭이 된 임산부를 짓밟고, 우리 어리 자식들을 짓밟으려면 짓밟아라. 우리는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현대자동차 노조 가족대책위원회) 

    “한평생을 몸담아 청춘을 불사르고 이제 백발이 성성한데 우리는 거리로 내쫓겨야 하는가? IMF라 했던가? 누가 왜 불렀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열심히 일한 죄밖에 더 있는가? 방만한 경영이라고,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투자에 대한 성과가 없다고, 정말 그러한가? 정말 거리로 내쫓길 만큼 우리가 잘못한 것인가? 우리가 거리로 내쫓기면 우리의 처자식은 어떻게 되는가?

    불안한 하루, 불안한 4월. 날만 새면 구조조정, 인력감축, 연봉제, 정년단축, 퇴직금 지급기준 하향조정 기타 등등, 정부의 계속적인 가이드라인이 내려온다. 감축대상 인원에 대해서는 즉시 대기발령을 하고 명예퇴직 또는 자진사퇴를 유도하고… 연구직 5%, 지원인력 15%, 책임급은 60세, 선임급은 58세. 어지럽다.

    이렇게 해야만 생산성이 높아지고 효율이 올라가는가? 정말 밥맛 없는 소리만 들린다. 이것이 과학입국인가? 이것이 과학기술발전계획인가? 이렇게 해야만 생산성이 높아지고 효율이 올라가는가?”(원자력 안전기술원 조합원) 

    “나는 밤마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느라 잠을 못 이룬다. 오늘 밤엔 굳게 닫혔던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저들이 내 번호를 부를까봐 불안하다. 한 번 끌려가면 영원히 못 올 길을 아무도 몰래 떠나게 될까봐 무섭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나마 의지가 되던 동료들이 하나씩 둘씩 줄어든다.

    나도 어느 날 아침 이들 속에 끼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 버릴까봐 밤마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벌써 식사배급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 곧 죽을 놈들이 먹는 것이니 아깝기도 하겠지. 전기고문보다도 두렵고 고춧가루 물을 코에 들이붓는 것보다 더 두렵다.”(한국원자력연구소 직원) 

    “하느님은 뭐하시나? 국민의 정부 지옥에나 데려가질 않고. 국민의 정부, 국민이 없는 국민의 정부는 IMF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책을 수행하고 독재정권과 하나도 다름없이 강권만을 휘두르고 있다. 흔히 얘기하는 우리는 넥타이 노동자들인데, 이제 투쟁밖에 모르는 투사가 되어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우습게 봤다면 이젠 큰 코 다칠 것이다. 광주에서의 교훈을 잊지 말라.” (한국전력기술노조) 

    솔제니친은 『암병동』이라는 책에서 그 곳은 “아흔아홉 사람이 슬프고 괴로워할 때 한사람이 웃고 즐기는 곳”이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한국 사회는 바로 암 병동과 다를 바 없었다. 

    투쟁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 

    연맹에 복귀하면서 나는 정치국장의 임무와 동시에 동아엔지니어링 투쟁을 맡았다. 신길수 전위원장님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44일에 걸친 기나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지나보면 투쟁한 시기가 가장 아름다웠다.

    그 때만큼 인간에 대해 신뢰하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진 때가 없었다.” 네 엄마가 추석 때 당시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하고 있던 조흥시스템노조와 본사 마당에서 천막농성을 하던 동아 엔지니어링노조를 방문하면서 한 말이다. 아빠는 이 말을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을 만날 때 마다 즐겨 하곤 한다. 올해 초 오랜 투쟁을 한 KTX 비정규직의 민세원 지부장을 만났을 때도 그 말을 했다. 

    동아엔지니어링노조는 모든 투쟁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 있는 본사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각종 연대투쟁에 결합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집회를 하고, 가족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윤강욱 위원장의 단식투쟁에 이어 간부들의 릴레이 단식까지 진행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습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동료 노동자들의 괴로움을 한 몸에 안고 산화해 가신 신길수 형. 대학원을 다니면서, 논문을 쓰면서 극한 상황까지 몰렸을 때 ‘나는 사람이 아니다. 논문 읽는 기계다’라고 이를 갈면서 자신을 채찍질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형이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유병홍이 <기업별 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책 뒤에 쓴 헌사다. 너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98년이 준 아픔, 사람들의 모습, 노동운동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그 투쟁에 대해 말하고 싶다. 

    "민주노총 꺼져"

    5월부터 시작한 투쟁은 1998년 10월 30일 끝났다. 144일이 훌쩍 지났다. 마무리를 앞두고 몇 차례 동아건설노조와 충돌이 있었다. 그 충돌은 2009년 평택 쌍용자동차 앞에서 조합원과 회사 측 직원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과 매우 닮았다. 

    “회사 앞에 천막이 있고 집회를 하면 노조가 파업하는 줄 알고 일거리가 안 들어온다.” “동아엔지니어링 투쟁 동안 말없이 봐 왔는데 이제는 침묵할 수 없다, 동아엔지니어링 투쟁 때문에 동아 건설 수주가 안 된다, 우리들의 고용도 불안한데 동아엔지니어링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된다.” “회사 측이 찬성해도 우리가 반대한다.” 동아건설 노조 부위원장의 말이었다. 

    마지막 교섭을 앞두고 10월 28일부터 같은 민주노총 산하 동아건설 조합원들이 회사를 옹호하며 나섰다. 빨간색 투쟁 조끼까지 입고 ‘생존권 사수’ 머리띠를 매고. “외부세력 물러가라, 불순세력 물러가라”를 외치며 지원 방문 온 연맹의 동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쇠파이프를 들고 우리를 위협했다. 천막을 철거하려 했고, 실제로 로비에서 단식 중이던 텐트를 철거해서 밖으로 내버렸다. 

    “민주노총이 우리 밥 먹여 줬냐. 꺼져라” 

    동아건설노조와 우리 사이에 경찰이 막아서서 보호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심재옥 국장은 동아건설산업 노조 조합원들이 밀쳐서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쳐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교섭을 담당했던 이승원 사무처장이 들려 나오기도 할 정도였다. 

    “동아건설 조합원들이 주차장을 점거하고 우리를 내쫓고 노동가요를 불러대는 것을 볼 때 딱 두 가지가 생각났다. 하나는 노동가요를 강간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주노총 탈퇴하라는 것이다.” “여기 나온 동아건설 사람들은 나중에 반드시 정리해고 당해야 한다. ‘내가 몸싸움까지 해가면서 고병우회장님을 보호하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왜 짤려야 합니까?’라고 울면서 짤려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끼리 싸워야 하는 처참한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이 한 말들이다. 

    투쟁은 쉽지 않았다. 과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집회를 할 때에는 장맛비가 엄청 와서 그야말로 “빗물에 김밥을 말아” 먹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연맹에 속한 연예인 노조와 얘기를 해서 기존 가수들이 함께 하는 “퇴출노동자와 실업자를 위한 ‘98 희망음악제”를 열 수 있었다. 9월 25일 종묘에서였다.

    97년 노동법 개정투쟁 때도 명동성당을 방문해 준 연예인들이 있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잘 아는 유명 가수인 김수희, 이용, 안치환, 이애숙(코리아나), 임주리 등이 출연해 주었다. 일각에서는 “이 투쟁의 시기에 한가하게 음악회를 하냐? 차라리 퇴출노동자에게 돈을 줘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유명 가수인 김수희가 실업자에 대한 고통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공감을 주는 말과 노래를 해주었을 때 큰 힘을 받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나는 김수희의 열렬 팬이 되었다. 

       
      ▲퇴출노동자들을 위한 희망음악제(98년 9월 25일 종묘) 

    고된 투쟁 끝에 마침내 10월 30일 교섭을 끝내고 조합원들에게 합의문을 읽어 내려가던 송인규가 끝까지 읽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단식 16일째였던 윤강욱 위원장 역시 “고용안정과 생존권 사수를 요구하며 투쟁해온 동지들의 요구와 투쟁에 비해 미흡한 타결을 한 것에 송구합니다. 144일 동안 함께 해온 동지애를 잊지 맙시다.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을 목이 메여 끝내지 못한다. 조합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냈다. 

    “이제 정말 실업자가 되었구나. 17년을 다닌 회사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투쟁을 계속 할 걸 그랬다. 이제 동아엔지니어링 노조의 깃발은 내려지고, 개인으로 돌아가는구나..”

    “앞으로 연맹 행사에는 개인 자격으로라도 참가하고 싶다” 울면서 조합원들이 말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장 키워왔던 이 투쟁의 기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어디서나 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생각해 주고, 혹시 지나가다가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조차 없을 만큼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오랜만에 집에서 쉬니까 은지 너는 다른 집으로 놀러가 버렸다. 아빠가 쉬는 데 방해가 될까 싶어서인지 아니면 낯설어서인지. 

    동아엔지니어링 노조의 깃발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후 10년 넘게 만나고 있는 그들 중 일부는 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일하기도 한다. 누구는 자동차 운전학원의 강사로 살고, 누구는 문방구에 물품을 대주는 일을 하기도 한다. 다행히 당시 위원장과 사무국장은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연맹에서 돈을 조금씩 모으고, 나중에 노조에서 기금을 만들어서 대학 졸업까지 후원을 한 두 아들은 모두 커서 지금은 1년에 한번 어려운 노동자 자녀들에게 장학기금을 주는 ‘신길수 추모사업회’에 기금을 내고 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기억하면서 말이다. 

    은지야. 누가 내게 왜 아직도 이 ‘노동판에 남아 있는냐’라고 물을 때마다 “좋은 사람들, 순수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어서..”라고 대답하곤 한다. 세상은 고단했으나 그런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났던 시기인 것 같기도 한다. 

    너와의 재밌는 얘기 

    너에겐 너무 힘든 얘기만 했으니까 마지막은 좀 재미있는 이야기로 맺자. 98년 11월 23일의 기억이다.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갔다. 그게 오후 9시 30분 정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여섯 살이었던 너는 골뱅이를 좋아했다. 엄마를 기다리다 너와 함께 맥주를 먹기로 했다. 물론 너는 안주만 먹고, 아빠에게 맥주를 따라 주었다. 골뱅이를 썰고, 파를 넣고, 고추가루를 풀어 안주 삼아 맥주를 한 잔 했다. 

    “아빠는 죽지 않겠다.” 갑자기 술을 따르면서 네가 말을 건넸다.
    “왜?”
    “이순신 장군처럼 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얘기야!”
    “술 따라 주어야 할 부하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술을 먹으면서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부하랑 술을 먹다가 부하에게 술을 안 따라 주어서 맞아 죽었다’는 세간의 우스갯소리를 한 기억이 났다. 너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