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과 경찰에 '사회적 통제' 필요하다?
        2011년 02월 01일 10:4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자주 보게 되는 풍경이 있다. 정확히는 촛불 집회 이후일지 모르겠다.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 광장, 혹은 다른 시내 중심가를 쏘다니다보면 ‘닭장차’를 볼 수 있다. ‘노동자 대회’ 혹은 ‘농민 대회’ 또는 ‘민주노총 총파업’ 등의 굵직굵직한 대형 집회에서 전의경을 보는 것은 거기에 어떤 평가를 하든 익숙한 일이었다.

    닭장차의 일상화

    하지만 이제는 특별한 집회가 없더라도 전의경과 닭장차를 늘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광화문 우체국부터 종각까지 늘비하게 늘어서있는 닭장차 밑에서 밥을 식판에 먹고 있는 전경/의경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옆에서는 일렬로 늘어서서 닭장차 쪽을 바라보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전의경들, 그 옆에는 무전기를 들고 어딘가와 교신하고 있는 전의경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의 복장은 지나가는 행인들과 다르게 굉장히 도드라지는 복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한 명 한 명은 잘 살펴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모여 있는 전의경들로만 파악될 뿐 구체적인 한 명 한 명의 20대 초중반의 남자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닭장차 안에서 쉬는 것으로 보이는 몇 명이 실루엣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표정까지를 읽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눈을 조금 바꿔서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표정이 있다. 찬찬히 살펴보면 찌들어있는 그들의 표정이 읽힌다. 또 앳된 얼굴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행인이 아닌 그들의 ‘엄마’이거나 ‘애인’이거나 ‘친구’라면 그들은 구체적인 한 명 한 명의 아무개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전의경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던 적이 있다. 너무 ‘무서운’ 시위대한테 매일 전의경들이 맞고 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전의경의 부모들은 모임을 만들고 ‘평화시위’를 정착해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강성 시위’를 자제해달라고 말했다.

    진보진영에서는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라고 계속적인 이야기들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는 전의경 제도 폐지안이 있었고,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2007년에는 병력감축 때문에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전의경 폐지 유보와 백골단 부활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전의경 제도 폐지는 유보되고 있다. 현재의 전의경 병력은 5만 명, 전체 군인 60만명의 8%이다. 2008년 촛불 즈음에는 어청수 당시 경찰청장에 의해 백골단도 부활되었다.

    전의경 제도가 존속하고 있고, 출동이 훨씬 더 빈번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2011년 벽두부터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전의경의 구타문제였다. 2005년에도 ‘알몸신고식’으로 화제가 되었던 강원경찰청의 307부대는 올 초 6명의 이경(군대에서는 이병)들이 이탈하고 조사결과 구타와 갖가지 가혹행위가 벌어졌음이 밝혀졌다.

    307부대의 2005년 사건 이후 2007년 2월 국가인권위는 경찰청에 전의경 인권개선안을 권고했고, 2007년 10월 경찰청을 이를 수용한다고 밝힌 바 있었으나 그런 ‘권고’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이 명확해졌다. 또 얼마 전에는 2010년 6월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던 의경이 선임들에 의해 구타당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부랴부랴 올 초 경찰청은 어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전입 6개월 미만의 전의경 2600명을 모아놓고 ‘개별적’인 서면조사를 통해 ‘소원수리’를 받기 시작했다. 그 중 190명 정도가 자신의 피해 사례를 신고했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베일’ 속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그 사례를 경찰청은 보고한다. ‘암기사항’ 때문에 맞고, 중대장 속옷을 잃어버려서 맞는다. 또 다른 사례로는 헬스장에서 소리가 커서 맞고, 회식 중 잘 먹지 않는다고 맞고, 고참이 담배 피우는데 벽에 붙어있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맞는다. 역시 우리는 그 외에도 어떤 이유로도 때릴 명분이 생김을 잘 알고 있다.

    구타 외에 가혹행위 수단이 많은 것도 보고된다. 잠을 못 자게 하고, 부모 이름을 ‘개새끼’라고 부르게 하고, 그냥 대놓고 부모 욕을 하게 하기도 한다. 애인도 마찬가지.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 외의 더 많은 수단이 있음을 상상해볼 수 있고, 주위의 전의경 들을 만나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파 정당들의 해결책

    경찰청과 국가인권위의 진단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미미한’ 부분을 제시한다는 점 정도가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법이 나왔다. 307부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 부대만 해체하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믿는 언 발에 오줌 누는 행위이다. 그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을 것 같아, 경찰청은 ‘용단’을 내렸다. 전국의 전경버스 549대에 CCTV를 설치하여 화면을 부대별 중대장실, 당직실, 행정반의 모니터에서 볼 수 있게 한단다.

    그리고 부대의 지하주차장과 옥상에도 CCTV가 설치된다. 거기에 ‘고운 말 바른 말’ 쓰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 정도가 경찰청의 대응인 것 같다. ‘전의경 인권침해 신고센터’가 운영된다고 한다. 늘 등장하듯이 ‘엄정 처벌’이 결정되었다. 이제는 가혹행위 당사자뿐만 아니라 지휘 관리 요원들에게도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거기에 클라이맥스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논평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비분강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일이 처음 벌어진 듯한 모습이다. 자유선진당에서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집단”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파 정당들의 해결책은 ‘인간이길 포기’했으므로 ‘엄정 처벌’의 노선일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이 해법들이 어떤 일들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해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전의경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되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주당 53시간씩 전의경들은 일을 한다. 그런데 그 53시간은 일반 행정을 보는 전의경을 포함한 수치이므로 진압부대의 전의경들은 더 많은 시간을 근무하고 있는 셈이다.

    신자유주의 통치논리와 전의경 다루기

    매번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압박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스트레스는 더욱 더 증가할 것이다. 다른 한 편 ‘고운 말 바른말’ 쓰기 운동을 전개한다면 전의경의 ‘휴식시간’이 1주일에 2시간씩 ‘차압’당할 것이다. 피로는 당연히 증가한다. 짜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고운 말 바른 말’ 교육이 욕지거리를 더 늘려줄 것이다. ‘전의경 인권침해 신고센터’는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내부’에서 소원수리를 걷는 것이 근무조건의 개선 없이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보고선’ 혹은 지휘체계와 상관없이 소원수리를 잘못 썼을 경우 벌어지는 ‘보복’을 모든 군경들은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엄정 처벌’들은 더욱 더 살벌한 병영을 만들 것이다. ‘은폐의 기술’이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집단’이라는 표현은 개인에 대한 책임을 물음으로써 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드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통치논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의 합이 만들려는 전의경 부대의 모습에 ‘인권’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 모두가 감시하고 ‘책임’을 묻기만 하는 공간. 게다가 노동 시간은 가장 많은 작업장.

    애초 이야기했듯이 전의경과 닭장차를 일상적으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인권은 근본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진압 전의 ‘삼엄한’ 분위기가 그들을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찌들고 피곤하고 짜증난 상태가 진압에 가장 유리한 상태인 만큼, 가혹행위에도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 전의경의 자살율과 진압 출동율의 통계적 상관관계는 숫자로 지금 나타낼 수 없지만, 이미 많은 현역 예비역 전의경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은 그것을 몸으로 익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전의경의 인권문제를 풀 수 없는 건 아니다. 그 핵심은 ‘사회적 통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군대를 사회에 안착시키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창하게 그 주체를 ‘시민사회’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군경에 대한 사회적 통제

    전의경 제도를 운용하면서(사실은 다른 군부대에서도 마찬가지) 발생하는 문제들을 전의경들 스스로가(병사들 스스로가) 스스럼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외부’의 소통공간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애인’과 ‘친구’와의 단절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기감을 느꼈을 때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면 된다. 전의경들을 표정을 가진, 감정을 가진 한 명 한 명의 인간들로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에 의해 언급되었던 ‘군경 감독관(옴부즈만) 제도’는 부대 바깥에서의 감독관들에 의해 인권에 대한 시정이 가능하게끔 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국방부의 반대로 그 위원회는 국민고충위원회로 들어가버렸고, 그 동시에 전의경과 관련된 건도 똑같이 축소되어 버렸다.

    국민고충위원회는 ‘권고’ 이상의 권한이 없다. 이것을 ‘사회적 통제’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명박 정부에서 사라진 것은 군대와 전의경에 대한 ‘사회적 통제’에 대한 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진보정당에서 ‘전의경 폐지’를 이야기하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사회적 통제’에 대한 제안을 하고, 거기에 대한 프레임을 쥐는 것은 어떨까?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처럼, 군경에 대한 사회적 통제 말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