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제역, 강추위에 SSM까지”
    By mywank
        2011년 01월 31일 09: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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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구 정릉시장의 상인들은 어느 때보다 힘겨운 설 명절을 맞고 있었다. 소비 심리를 위축시킨 구제역 파동, 시장 손님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강추위뿐만 아니라, 지난해 설 명절에는 없던 중소규모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세계로마트’까지 시장 근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로마트(☞관련기사 보기)는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 제3조에 따라 ‘중소기업’으로 분류돼, 가맹점 형태의 SSM까지 사업조정 신청 대상으로 확대한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상생법) 개정안과 전통시장 반경 500m 이내에서 SSM 입점을 제한할 수 있는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 개정안 등 SSM 규제 법안이 적용되지 않아, 정릉시장 상인들은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다.

    세계로마트 입점과 첫 설 명절

    세계로마트는 ‘상시근로자 수 200명 미만 또는 연 매출액 200억 이하’의 업체는 중소기업으로 분류되는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의 허점을 틈타, 양연주 세계로마트 대표 소유의 전국 5개의 직영점을 ‘연 매출 200억 이하’의 개인 법인 2개로 나눈 상황이다. 매출이 확인되지 않은 정릉점을 제외하더라도, 두 법인의 총매출은 지난해 200억 원이 넘는 등 ‘동네 슈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31일 ‘설날 세일’을 하던 세계로마트 정릉점 모습 (사진=손기영 기자) 
       
      ▲세계로마트 정릉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가 높은 정육코너 (사진=손기영 기자)

    지난달 31일 찾아간 세계로마트 정릉점은 2일까지 예정된 ‘설날 세일’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178평(589.6m²) 규모의 매장은 손님들로 붐벼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세일 품목은 주변에 있는 정육점 시세보다 약 40~50% 정도 저렴하다”고 이 동네에서 소문이 난 세계로마트 정육코너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이날 세계로마트 정육코너는 평소 35,000원에 팔던 국거리용 한우 사태 600g을 19,800원에, 평소 600g에 12,000원을 받던 한우 불고기는 1.2kg에 15,000원을 받고 팔았다. 구제역 파동으로 물량이 줄어든 한우의 가격이 인상되는 상황에서 소비자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한 가격이었다. 또 다양한 종류의 설날 선물세트가 판매되고, 모듬전 등 명절음식의 주문도 이뤄져 매장 안에서 대부분의 설 준비가 가능했다.

    설 상품 줄인 시장 상인들

    세계로마트 정릉점은 추석을 앞둔 지난해 9월 초순에 오픈했기 때문에, 정릉시장 상인들은 ‘불청객’ 세계로마트와 함께 ‘두 번째 명절’을 보내게 됐다. 특히 지난해 ‘추석 대목’에는 세계로마트 오픈으로 오히려 ‘매출 급감’을 경험했던지라, 설 명절을 맞는 상인들의 불안감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과일․채소․생선 등의 설 명절을 위한 상품을 예년에 비해 적게 들여온 상인들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정릉시장은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었다 (사진=손기영 기자)

    세계로마트 입점 이후 폐업한 정육점인 ‘안동축산’ 자리로 최근 과일가게를 옮긴 정릉시장 상인 이부순 씨(54)는 “지난해 설 명절을 앞두고 과일을 3트럭 정도 실어왔는데, 올해에는 1트럭 정도만 실어왔다. 이마저도 제대로 팔릴지 걱정 된다”며 “지난해 설 명절에는 정릉시장에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세계로마트가 시장 주변에 들어선 이후 장사가 거의 ‘스톱’됐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또 “친척들 중에 이 동네 주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상인들은 일단 장사가 잘 돼야 서로 할 말도 많은데, 이번 설 명절에는 아무래도 차례만 지내고 별 말 없이 조용하게 헤어질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에 함께 있던 그의 남편 김 아무개 씨도 “여긴 설 대목’이 아니라, 완전 꽝이다. 지금 세계로마트만 혼자서 설 대목이지 않느냐”고 이 씨의 말을 거들었다.

    "조용히 차례만 지내고 헤어질 것"

    이날 정릉시장에서는 전 부치는 냄새가 오고가는 이들의 미각을 자극했지만, 시장 모듬전 가게의 바구니에는 ‘주인을 찾지 못한’ 전들이 계속 수북이 쌓여만 갔다. 가게 주인인 김정희 씨(51) 동그랑땡, 동태전 등을 프라이팬에 부치고 있었지만, 손놀림이 분주해 보이진 않았다.

       
      ▲세계로마트 입점 이후 폐업한 정릉시장의 정육점 ‘안동축산’ 자리에서 과일을 팔던 이부순(왼쪽) 씨와 그의 남편(가운데 모자 쓴 이). (사진=손기영 기자) 
       
      ▲정릉시장에서 전을 부치던 김정희 씨(왼쪽)와 그의 아들 송병렬 씨 (사진=손기영 기자) 

    김 씨는 정릉시장 근처에 있는 세계로마트에서 모듬전 등 명절음식을 판매하는 것을 지적하며 “그동안 공산품이나 과일․채소․생선 등을 판매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슈퍼마켓에서 전까지 부쳐서 판매할 작정이냐. ‘오바’를 하는 것도 이런 오바는 없는 것 같다”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친정집’이 충남 공주라고 밝힌 김 씨는 설날 세뱃돈 걱정부터 했다. 그는 “우린 전을 팔아서 먹고 사는데, 세계로마트가 매출을 가져가고 있다. 세뱃돈은 지난해에 비해 적게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지금 전을 부쳐도 별로 신이 나지 않고, 명절 분위기도 잘 나지 않는다”라며 착잡해 했다.

    지난해보다 줄어든 설날 세뱃돈

    김 씨의 아들 송병렬 씨(31)는 “지난해 설 때만 하더라도 바빠서 이렇게 인터뷰를 해줄 수 없었을 정도였다. 세계로마트가 정릉시장을 아예 ‘싹쓸이’하려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릉시장 상인들은 설 명절을 앞두고 시장 입구에 ‘이번 설 명절에는 서울전통시장 상품권을 선물합시다’라고 적힌 대형 펼침 막을 내걸고, 지난달 29일에는 ‘설맞이 정릉시장 이벤트’라는 이름으로 경품추첨 행사도 진행하는 등 직선거리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세계로마트 정릉점에 빼앗기는 손님들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힘겨운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정릉시장 상인회의 ‘설맞이 정릉시장 이벤트’ 행사 천막 (사진=손기영 기자) 

    정릉시장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영세 슈퍼마켓 ‘그랜드할인마트’의 박은호 사장(47)은 구제역, 강추위, 세계로마트로 인한 상인들의 어려움 전했다. 그는 “구제역 때문에, 시장 정육점들은 물량이나 가격을 맞추기가 어렵다. 설을 앞두고 시장 상인회가 ‘세일 전단지’를 제작했는데, 시장 정육점 4곳 중 3곳은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고, 1곳은 구제역과 관계없는 수입육만 행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구제역, 강추위 & 세계로마트

    그는 또 “세계로마트는 자체적인 ‘(정)육가공 회사’가 있어, 물량이나 가격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구제역 때문에 이번 설에 귀향을 포기한 분들이 적지 않은데,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수도 지난해 비해 줄어든 것 같다”며 “시장 손님들을 난방이 잘 되는 대형마트나 SSM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강추위 역시 매출 감소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세계로마트의 횡포는 ‘골목 상권’만 빼앗아간 게 아니라, 명절을 앞둔 전통시장의 ‘풍경’마저 동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한편 전통시장(전통상업보존구역) 반경 500m 이내에서 SSM 입점을 제한할 수 있는 유통법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성북구청(구청장 김영배) 측은 정릉시장 등 지역 내 전통시장 9곳을 ‘전통상업보존구역’으로 지정하는 조례를 10일 성북구의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세계로마트는 유통법 개정안의 적용을 받지 않아, 정릉시장 상인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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