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서 미 제국 붕괴조짐을 본다
    세계 정치 질서 G2에서 G3로 재편?
        2011년 01월 31일 04: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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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니지에서 벤 알리 대통령이 축출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30여년 동안 이집트를 철권통치해왔던 ‘현대판 파라오’ 무바라크 대통령도 퇴진 위기에 몰렸다. 지난 30여년 동안 누적된 이집트인들의 불만과 분노는 튀니지 민주항쟁의 소식에 힘입어 거대한 대중 시위로 모습을 바꿔 이집트를 휩쓸고 있다.

    현대판 파라오, 무바라크의 퇴진 위기

       
      ▲이집트 수에즈에서 벌어진 반무바라크 시위가 경찰에 의해 포위되자 한 시위 참가자가 경찰을 규탄하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부통령과 총리를 임명하는 등, 시위를 잠재워보려고 몇가지 양보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집트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시위를 더 광범위하게 확산시키고 있다. 급기야 군이 동원되었고 대통령은 휴양지에 피신해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스라엘과 함께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이집트의 불안을 목도한 미국은 자신의 입지를 보존하면서도 사태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지만, 상호 모순적인 압력 속에서 모호한 태도를 연출하고 있다.

    현재 이집트의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에 대해서 당장은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 민주항쟁이 만에 하나 일시적 후퇴를 겪는다 하더라도 이미 중동지역에 몰아친 정치적 에너지 자체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집트 민주 항쟁을 기점으로 향후 벌어질 사태 전개라는 측면을 좀 더 큰 국제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 ‘제국’의 해체다.

    역사적 데쟈뷰, 제국의 해체, 오바마와 고르바초프

    이집트의 민주항쟁은 일종의 역사적 ‘데쟈뷰'(Dejavu 기시 현상)를 일깨운다. 그 데쟈뷰 현상이란 기존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각종 대중 항쟁들, 예컨데 1979년의 이란 혁명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 이집트 민주항쟁은 일견 전혀 상관 없어 보일 것 같은 구 소련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과거로 우리를 이끈다. 이런 역사적 데쟈뷰 현상에서 현재 주요한 인물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중간 선거에서 참패를 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이전에 미국을 통치했던 다양한 대통령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상 이런 비교를 하는 많은 이들이 결정적으로 배제한 인물이 한 명 있다. 그 사람은 엉뚱하게도 미국과의 냉전 경쟁에서 패배하여 구 소련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구 소련의 대통령이자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다. 이 두 대통령 사이에는 차이점 만큼이나 눈에 띄는 굵직한 유사점이 많다.  

    우선, 양 대통령 모두가 국내에서 겪고있는 상호모순적인 압력과 외교적 난맥상이다. 일단 공통적으로 두 명 모두 변화를 향한 대중의 열망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색채의 의제들을 제시했던 점이나 정치적 당파를 떠나 광범위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개인적인 매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일단 구 소련의 맥락에서 고르바초프는 제한적 경제개혁은 불가피하다고 여기지만 정치적 자유까지 양보할 생각이 없던 보수파들부터 자유주의적이며 서구 지향적인 사람들에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미쳤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미국적 맥락에서 규모가 더 작고 제한적인 개혁을 원하는 보수파들로부터 더 광범위한 개혁을 원하는 진보파들 사이에서 그랬다.

    그러나, 두 명 모두 본성상 화해적이며 양극단 사이의 중간적인 길을 찾으려 했다는 약점도 공통점이었다. 경제, 외교정책, 정치적 통제 문제와 관련하여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애초에 약속한 개혁지향적인 의제를 밀어붙이는 대신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분파들 사이의 합의를 구축하려 했다.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경제 개혁을 둘러싸고 제출된 서로 다른 제안들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일관된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고르바초프가 보수파들의 지지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가 견지하는 기본적인 목적들이 자신의 것들과 같다는 점을 확신했을 때까지였다.

       
      ▲미하일 오바마? 버락 고르바초프?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궁극적으로 중간적인 길을 모색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런 그의 갈짓자 행보로 인해 그의 정책은 경쟁하는 당파들의 압력에 의해 연이어 좌절되었고, 이 때문에 그가 내보이는 정책들은 종종 상호 모순되기도 했다.

    보수파들도 그랬지만, 그의 등장을 반겼던 자유주의자들도 그에게 의구심 섞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고르바초프는 1990년과 1991년초 우파쪽으로 선회했는데, 당시 이미 그가 추진하던 경제적, 사회적 개혁의 더딘 속도에 염증을 느끼던 자유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전부 거두어들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종종 상충되는 국내적 압력하에 중간적인 길을 밟으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태도는 예컨데, 이란, 아프가니스탄, 건강보험, 경기부양안, 은행 개혁 문제 등에서 엿보인다. 그가 건강보험 문제나 노동조합 권리, 경기부양, 금융부문 규제 문제에서 취했던 조치들은 미국 진보파들에게는 너무나 어정쩡하게 비쳐저 실망감만을 자아내고 말았다.

    반면에 미국의 보수파들은 오바마에게 그나마 얼마 안되는 진보적인 색채를 띄는 정책마저 포기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데, 이같은 현상은 중간 선거 패배 이후 더 강해지고 있다. 이런 양국 대통령간의 공통점은 그들이 놓인 국제적 상황, 더 나아가 외교 정책에까지 이어진다.

    일방주의적 외교정책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양국 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동안 국제적으로 양국이 누린 권위와 지위가 상당한 정도로 침식당했을 때 등장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배경에는 양 국이 보여준 무모한 군사주의와 일방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같은 일방주의적인 정책으로 기존 동맹국들의 신뢰를 잃었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도전하려는 나라들의 반감만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던 당시의 구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1970년대 말, 구 소련은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군사력을 전 세계로 지나치게 확장한 상태였고 , 이 과정은 1979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다. 1985년에 당시 서기장이었던 73세의 체르넨코가 사망하고 고르바초프가 새 서기장으로 등장했을 때, 이미 구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5년째 희망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기로 했고, 개발 도상국들과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하려했다. 지금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고르바초프도 구 소련에 대한 지정학적 라이벌들과 화해함으로써 구 소련의 국제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위해 미국,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유럽 공동의 집’이라는 구상도 전파했다.(‘유럽 공동의 집’이라는 생각은 유럽 대륙에 아로새겨진 구 냉전의 잔재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측면에서 구 소련의 외교 정책을 재구성하려했던 고르바초프의 시도는 국내정책에서와 같이 일관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동요했으며 소심한 것이었다.

       
      ▲구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 동쪽에 버린 구 소련제 탱크들-이곳은 ‘탱크들의 무덤’이라고 불린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지난 대선 유세 때 미국의 적성 국가들(예컨데, 이란이나 북한 등)과 대화하겠다고 약속했고, 지난 2009년 이집트 카이로 연설에서는 중동과의 화해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오바마의 외교정책을 단지 과거의 정책을 조금 새롭게 윤색하여 내놓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예컨데 미국의 이란에 대한 대화 노력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느새 강력한 제제 조치가 대체해버렸다. 새 START(전략무기감축협정) 조약 체결의 예처럼 러시아와 다시금 관계를 재정립한 몇 가지 성과가 없지 않지만, 이조차 미국 보수파들로부터는 너무 양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문제만큼 두 지도자들의 유사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고르바초프 역시 전임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저지른 실수를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구 소련의 치욕적인 패배가 가져올 국내에서의 보수파들의 비판과 구 소련의 국제적 위상 타격을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둘러 철수해야한다는 조언을 무시했고, 그의 마지막 집권 3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친소정권을 마련한 후 철수하기 위해 온갖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심했다. 이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잔인한 무력 행사를 가했고, 이는 당시 많은 구 소련의 자유주의자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구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생각처럼 진행될 희망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나서야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주고 있는 접근도 이와 유사하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실패를 부정하고 점점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내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철회하고 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즉각적인 전면적인 철수는 무책임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아프가니스탄 문제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 민주항쟁과 관련하여 두 인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스푸트니크적 모멘트와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

    얼마 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현재 미국이 ‘우리 시대의 스푸트니크 순간(모멘트)’에 와 있다고 비유했다. 이 것은 지난 1957년 구 소련이 미국에 앞서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를 성공시켜 미국을 놀라게했던 사건을 언급한 것인데, 미국이 지금 경쟁자들에게 도전받는 상황을 그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생각과는 달리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은 1957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 소련이 지난 1980년대 후반 자신의 위성국들이 포진한 동유럽에서 부닥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동유럽에서는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위기에 몰린 구 소련 제국을 재건하고자 내건 개혁과 개방에 영향을 받아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고르바초프는 지난 1968년에 체코 민주화 시위에 대해 그랬던 것과는 달리 구 소련군을 투입하지 않았다. 이에 구 동유럽 공산정권들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급기야 독일은 통일까지 이룩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제국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중요한 위성국들이 모여있는 중동에서 지난 1980년대 말 소련이 부닥친 딜레마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구 소련에게 1980년 대 말의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이 2011년 미국에게는 중동의 연속적인 민주항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 소련이 자체의 위기뿐만 아니라 동유럽 공산 정권이 연달아 붕괴하면서 자신의 몰락까지 재촉했던 점에 비추어 봤을 때, 현재의 이집트 민중항쟁 등 중동지역의 민주화운동이 미국 자체에도 유사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당시의 구 소련과 지금의 미국은 구체적 상황에서 똑같지 않고, 미국 ‘제국’의 해체는 구 소련과는 상당히 다른 과정과 양상을 띌 수도 있다.(심지어 미국 제국의 부활이라는 좀처럼 가능성이 많아 보이지 않는 일종의 역전 현상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구 소련 정권의 붕괴 같은 눈에 띄게 극적인 과정이 미국 국내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쉽게 바라기는 어렵다. 하지만 냉전의 양축을 이루었던 두 제국의 쇠퇴와 국내적 모순, 해외 전쟁과 외교적 난맥상이 상호 연관되며 진행되는 역학 과정이 매우 유사한 것도 단순히 역사적 데자뷰로만 간단히 부정할 수 없다. 

    이집트 민주항쟁의 도미노-세계 정치 질서 G3로의 재편

    진보 진영에게 이러한 사태 전개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미국 ‘제국’의 해체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러한 미국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기존의 통제와 속박에서 벗어난 민주적인 해방 운동들이 등장할 가능성이다.

    덧붙여, 이러한 가능성이 중요한 이유는 패권의 공백을 차지하려는 다른 세력(중국 혹은 러시아 등등)들이 이후 사태 전개를 지배하는 것에 일정한 제한을 가할 뿐만 아니라 패권국가 자체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집트 민주항쟁 같은 사건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한다면, 새로이 등장하는 패권 세력들도 이후에는 더 민주화되고 강력해진 해방운동 및 국가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이후 세계적인 정치지형을 패권 국가들끼리만의 G2만이 아니라, 이들 민주적인 운동이 추가되어 새로운 G3로 전환시킬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도미노 같이 벌어지고 있는 중동의 민주항쟁의 성공(특히 이집트와 사우디 아라비아)은 여전히 반민주적인 억압과 부자 편향적인 경제정책, 미국 일변도의 동맹정책과 미국과 중국간의 패권경쟁하에 놓여여있는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의 문제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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