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급 12만원 받고 뜨겁게 일한 사람들
        2011년 01월 31일 09: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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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말하라면 모래 위에 / 손가락으로 부귀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 인생을 말하라면 팔을 들어 / 한조각 저 구름 뜬 흰 구름을 / 가리키는 사람도 있지만 // (중략) //인생을 말하라면 나와 내 입은 두 손을 내밀어 보인다, / 하루의 땀을 쥔 나의 손을 / 이처럼 뜨겁게 펴서 보인다. // 이렇게 거칠고 이렇게 씻겼지만 / 아직도 질기고 아직도 깨끗한 이 손을 / 물어 마지않는 너에게 펴서 보인다.” (김현승 시 ‘인생을 말하라면’ 중에서)

    문제는 언제나 현재

    “맨날 과거 얘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을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98년 어느 날인가 CUG에 올린 내용이다. 네게 글을 쓰면서 다시 나를 돌아본다. 문제는 항상 현재다. 

    삼선동 사무실에는 나를 포함한 민주노총 파견자 4명, 전국연합에 사표를 내고 참가한 3명, 진보연합 4명, 경제시민모임 2명, 기타 과거 서노협 출신, 정보네트워크에서 일하다 결합한 사람 4명 등 총 17명이 일했다. 그 외에도 시간을 내어 자원봉사를 해준 사람들도 많았다. 다시 예전 민주노총을 만들 때와 비슷한 시절로 돌아갔다. 

    나를 제외한 상근자들은 1주에 3만원씩의 차비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열정을 바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힘으로 인해 2000년 민주노동당을 만드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 시절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보자는 연락이 오고 있다.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이다. 

       
      ▲세월은 어떤 기억들을 가물거리게도 하지만, 열정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삼선동 시절 사람들. 맨 오른쪽이 필자.  

    노동자 없는 국민의 정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시대가 시작되었다.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그는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대부, 사형선고와 고문을 딛고 일어선 진정한 투사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에 이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함으로서 노태우가 당선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군사독재정권이 남긴 법적, 제도적 억압 장치는 ‘청산’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분열되고 합쳐지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 국민에는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마침 IMF 경제위기가 닥쳤고, 자본은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자 부담이 없는 외자를 적극 유치하기 위해서는 정리해고제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준비하면서, 98년 1월까지 교섭과 투쟁을 병행한다는 방침으로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2월 6일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이는 합의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했다. 이어 열린 2월 9일 대의원대회는 이 합의를 부결시켜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등 파행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그마저 총파업을 철회하여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등 싸워야 하는 시기에 내부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은 3월 31일 새로운 집행부가 선출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한편으로는 ‘고통분담’이라는 명분 아래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정부에 맞서 싸움을 하면서 조직 안의 혼란을 극복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 선거가 남긴 성과와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 봄을 생각한다고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극복해야지, 따뜻함을 그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가장 많이 한 혼잣말이었다. 

    회비자동인출제도인 CMS

    국민승리21은 다가오는 지방자차단체 선거 대응, 실업자 대책 마련, 그리고 회원확보 사업 등 3가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방선거 대응을 위해서는 ‘지자체선거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최규엽 정책위원장이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략 50~60명 정도가 출마할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나는 실업자 대책 관련 사업을 담당하고 이후 실업대책 본부 상황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다. 실업정책위원회는 장상환 교수가, 실업통계조사위원회는 노중기 교수가 맡아주기도 했다. 목표는 IMF로 인해 마구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국실업자동맹’을 만드는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사업은 회원 모집 사업이었다. 우리는 98년 안에 회원 1만명을 확보하여 ‘회원이 운영하는 진보정당’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취지 아래 회원모집에 들어갔다.

    전국교직원노조에서 파견 나와 총무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최철호를 중심으로 한번 가입하면 은행에서 자동으로 돈이 매월 출금되는 CMS를 구상하고, 앞서도 말했던 ‘미스 전문노련’ 김영수가 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획기적인 것이었다. 누구는 “CMS는 혁명이다”라고 까지 말했다. 

    상근하고 있던 사람들이 먼저 회원가입을 했고, 실험적으로 등록을 했다. 그리고 그 등록 순서는 나중에 민주노동당 당원 번호가 된다. 1번 최철호, 2번 나, 3번 오현아 그런 식이었다. 때문에 1번부터 대략 1000번 정도가 삼선동 시절부터의 당원인 셈이다.

    시간이 흘러 당원번호가 10만번까지 갔을 때 10만번 당원과 1번 당원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사람들은 “억울하다. 나를 먼저 입력할 껄” 하는 농담도 서로 했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나누어져 있거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은 비당원이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정치조직으로의 전환

    국민승리21은 성균관대 앞에 있는 유림회관이라는 곳에서 2월 21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1) 국민승리21은 제 15대 대선운동의 성과를 계승하여 정치조직으로 전환한다. 2) 국민승리 21은 폭넓은 진보세력과 함께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한다.”라는 내용을 결의했다. 약 290여명의 중앙위원 중에서 48명정도가 내가 소속된 전문노련, 아니 이름을 바꾼 공익노련 사람들이었다.

    국민승리21이 정치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통령선거 때 가장 늦게 합류했던 정치연대(준)은 5월 3일 ‘새로운 정치적․계급적 주체의 형성’을 위한 논의의 조직화를 결정함으로써 이후 완전히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그들 중 일부가 다음해인 99년 ‘노동자의 힘’이라는 준비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준비모임’으로 발전해 있다. 

    어려운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민주노총 안의 갈등으로 고민하던, 앞의 글에도 썼던 최명아가 죽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민주노총안의 갈등은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끝나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나마 민주노총과 가까운 곳에 사무실이 있어서 상근자끼리 자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지부진한 회원모집

    98년 안에 회원 1만명을 확보하기로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내부 홍역을 치른 민주노총에서는 “대선평가가 제대로 안되었다.” “투쟁이 곧 정치세력화다” 라는 등 내부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었다. 

    심지어 4월 중앙위원회에는 “민주노총에서 파견한 사람들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상집의 제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후 대의원대회에서 국민승리21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후에 결정한다.”고 하여 유보되기는 했지만 선거를 끝낸 민주노총마저 진보정당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 셈이었다. 

    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경로, 방향, 이념, 정치형태 등에 대해 많은 토론과 공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것을 논의할 수 있는 기본 토대는 살려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권영길이라는 한 인간의 정치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중요하다는 판단을 대의원대회를 통해 했으면 그것을 어떻게 이어갈지, 그 불씨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를 고민해야지 이제 와서 원론적인 얘기만 뱅뱅 돌려서 하면 어떡하자는 거냐?”며 민주노총 태도를 비판했다.

    또한 “죽일 거면 빨리 죽여야지, 서서히 죽이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다.”, “정히 국민승리21의 계급성이 문제라면 노동자가 더 많이 들어와서 계급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약 25명의 상집위원 중 겨우 5명 정도만 민주노총 사람이었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4월 중순이 되었지만 가입한 회원은 겨우 200명을 넘겼을 뿐이었다. 

       
      ▲서울역에서 열린 1차 실업자대회. 

    전국실업자동맹을 만들자

    그 즈음 ‘밥’을 준다고 하면 실업자들이 지하철 역내를 가득 메우는 충격적인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소설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구절이다. 경제위기가 심각했다. 정부 설명에 따르더라도 하루에 1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오늘 서울역에 갔지요. 잠깐 들렀지요. 그 잠깐 사이에 서울역에 새까맣게 모인 노숙자들을 봤습니다. 화장실 옆 텔레비전 앞에 의자가 몇 줄 있잖아요. 그 의자에 빈틈없이 모여 앉은 사람들은 겉은 멀쩡했는데,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서 텔레비전은 안 보고 목을 외로 꼬고 병든 닭처럼 앉아서 자고 있더군요. 태반이.

    갈 곳이 없어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서울역 의자에서 불편한 잠을 자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날씨가 따뜻한 것이 다행인지, 기차시간 기다릴 것도 없는 사람들 한 무더기가 여기 저기, 무리로 모여서 말하지 않아도 다 속내를 아는 고통의 함성을 지르고 있더군요.” (1998년 4월 8일 심재옥의 글에서 재인용)

    우리는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는 실업자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기로 했다. 4월 23일 1차 실업자대회를 서울역에서 하기로 하고, 유인물을 뿌리고 거금 백만원을 들여 한겨레신문에 의견광고도 냈다. 전국실업자동맹(준)을 만들기로 하고 전화도 새로 하나 마련했다. 알기 쉽게 “747보다 빨리(82) 일자리를 구하자(19)”는 뜻에서 747-8219라는 번호를 땄다. 

    “실업자 여러분! IMF사태와 현재의 실업문제는 실업자 여러분의 잘못이 결코 아닙니다. 함께 모여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찾아 나갑시다. 실업자 스스로 ‘전국실업자동맹’을 결성하여 실업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찾읍시다! 실업자 여러분! 4월 23일(목) 12시 서울역광장에서 첫 번째 실업자대회가 열립니다. 실업자 여러분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줍시다. 국민승리 21은 실업자 운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기대 이상의 반응

    돈이 없었던 우리는 서울지하철노조를 통해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작은 판들을 구하고, 현수막을 걸 수 있는 구조물을 직접 세웠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 나왔다. 기자들도 많이 왔다. <경향신문>은 다음날 “국민승리21 실업자대회, 생계보장 정부 대책 촉구”라는 제목으로 사회면 한복판에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다른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승리 21(대표 권영길)은 23일 낮 12시 서울역 광장에서 실업자 대회를 열어 실업자의 생계보장과 일자리를 요구했다. 20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실업자선언을 통해 ‘노동은 국민의 권리이며,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 라며 장기적인 실업방지대책 수립, 실업자 대표가 참여하는 실업대책기구 구성, 모든 실업자에 대한 실업수당 지급 등을 촉구했다.” 

    탄력을 받은 우리는 서울역에서 노동시간 40시간제 쟁취와 실업급여기금 10조원 조성을 위한 서명운동을 하기도 하고, 5월 16일 2차 실업자대회로 이어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송에서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어 오고, 인천방송에서는 40분 가량의 다큐멘터리로 우리의 활동을 방영하기도 했다.

    아빠와 당시 상근자들의 젊은 날의 활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상인데 민주노동당이 잘 보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실업대책본부 활동을 통해 우리는 국민승리21이 살아 있음을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실업자들의 삶

    실업대책본부 활동을 하면서 찾아오는 실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높은 토익점수를 받고도 취업이 안되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기억에 남는 친구는 조일영이라는 아주 젊은 실업자였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그는 당시 29살이었다. 내가 공장생활을 했던 반월공단 노동자였었다. 거의 상근을 하면서 실업자 대회 등을 도와주었다. 멀쩡한 사람이 노숙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공장에서 잘리고 처음에는 여관에서 지내면서 취직자리를 알아봤어요. 그러다가 점점 돈이 떨어져 여인숙으로 옮겼지요. 근데 그 돈도 다 떨어지는 거예요. 마땅한 자리는 안 나타나고. 그래서 서울역으로 왔어요. 사람들이 서울역으로 모이는 이유는 가장 많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에요.” 

    “야, 근데 아침에 노가다라도 나가면서 생활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물론 나가죠. 새벽에 남대문 시장 근처에 인력시장이 열려요. 몇 번 갔죠. 근데 일이 많은 게 아니에요. 그리고 노가다 하면서 가볼만한 직장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아요. 대부분 낮에 면접을 보잖아요. 당일치기 일자리도 없으면 하루 종일 할 일이 없는 거죠. 그러면 삼삼오오 술을 먹어요. 술을 먹다보면 신세 한탄이 나오고, 그러다가 술이 취하면 다음날 인력시장에 못 가고… 그런 자기가 한심해서 또 술을 마시고 하다보면 알콜 중독이 돼요.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되는 데 한 달도 안 걸려요.” 

    “그럼 정부에서 하는 농촌 일자리에 가서 돈을 좀 모았다가 그 돈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직장을 알아보면 어때?” 

    “그래도 제대로 된 직장을 알아봐야 하잖아요. 점점 나이는 먹어가는 데 아무 직장이나 선뜻 들어갈 수도 없고. 시골로 갈수록 정보가 적어요.” 

    ‘밥이 되는 정보’의 집산지, 서울역

    처음에는 교회 등에서 노숙자에게 주는 밥도 창피해서 못 먹었다고 했다. “정말 누가 알아볼까 쪽팔려서 줄을 못서겠더라구요. 4일 동안 굶으면서 수돗물만 먹었어요. 근데 한 번 먹으니까 하루에 여덟 번도 먹을 수 있더라구요.” 

    노숙자들 사이에는 무슨 요일, 어디에서, 언제 밥을 주는 지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했다. 이런 ‘밥이 되는’  중요 정보는 서울역에서 가장 많이, 가장 활발하게 유통됐다고 한다. 찾아온 노숙자 중에는 하루종일 종이를 주워서 생활하는 부부도 있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요. 종이 줍는 것도 이제는 어려워 지고 있어요.” 

    그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실업의 고통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울산에서 올라와서 직업을 구하러 다녔던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실업자 대회를 준비하고, 내용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딘가에 취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일영을 포함하여 실업자대책본부에는 정말 실업자들이 함께 일했다. 갓 제대한 청년 한 명, 청년실업운동을 하는 대학생 두 명, 그리고 소식지 편집을 도와주던 지하철노조 편집위원 출신의 손희경 등과 함께 그나마 인력을 확보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난 후 사무실로 찾아와 일을 도와 준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있기도 했다. 주로 연맹 산하 간부들을 불렀다. 소식지를 만들면 실업자들이 직접 서울역 등에 뿌렸고, 그 덕분에 실업자 대회 등을 진행할 수 있었다. 

    4월경 계속 연맹에서 파견 나와 있는 관계로 조직쟁의국장에서 정치국장으로 업무가 바뀌었다. 아마도 민주노총 산하 조직 중에 정치만을 전담하는 사람을 배치한 건 처음인 것 같다. 당시 정치위원이었던 강용준은 “정치는 드러운 건데 정치국장도 드러운 사람이 되었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연맹 정치위원회는 매주 월요일 국민승리21 사무실에서 개최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서로간의 일체감을 높여 나갔다. 

    지방선거와 복귀

    김대중 정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대는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98년 메이데이는 종묘에서 열렸다. 우리는 실업문제를 들고 그 대회에 참석했다. 나는 6시 30분경에 마산 MBC와 생방송 인터뷰가 있어서 사무실로 들어왔는데 그 사이에 최루탄이 터지고, 경찰들의 폭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 병원에만 7명이 있을 정도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같이 국민승리21 조직부장으로 일하던 박용진이 잡혀갔다가 며칠 후 영장실질심사를 통해 석방되기도 했다. 그는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지금은 진보신당의 부대표다. 

    6월 4일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공익노련은 다시 대전 유성구에서 3명의 구의회 의원을 당선시켰다. 국민승리21과 민주노총 후보 중에서는 울산 북구청장 조승수, 울산 동구청장 김창현, 남해군수 김두관이 당선되어 3명의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 2명, 기초의원 18명이 확보되었다. 전체 49명이 출마하여 23명이 당선된 셈이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나마 희망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국민승리21은 6월 26일 정치 1번지인 여의도로 다시 이사했다. 장맛비가 많이 내려 이사를 포기하려다 그냥 했다. 짐은 뚜껑이 달린 탑 차를 이용했지만 정작 짐을 나른 우리는 비를 많이 맞아야 했다. 지금의 여의도 렉싱턴호텔(당시 맨하탄호텔)과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이사 후인 6월 30일 권영길 위원장과 커피 한잔을 하면서 이후 진로를 얘기한 것을 마지막으로 국민승리21 파견을 끝내고 연맹으로 돌아왔다. "뼈를 묻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연맹의 정치사업을 잘해야 정치활동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그런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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