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무슨 노선투쟁을 말하는가?
        2011년 01월 27일 03: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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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두리반에서 열린, <싸우는 20대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의 발제자로 얼떨결에 참석하게 되었다. 토론자로서 본인의 역량 부족을 통감하는 만큼 아쉬움도 많고, 또한 한편으로 흥미로운 점도 많았던 토론회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소위 진보적 지향을 지닌 20대 내부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의미심장한 ‘간극’들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진보 야!>에 실린 20대 논객 조병훈의 전혀 상반된 평가를 읽어보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노선대립을 말하는가?

    조병훈의 말을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토론회에서 형성된 대립구도(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가 ’10년 전 대학가의 논쟁’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또한 조병훈은 한 ‘윗세대 명망가'(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의 말을 인용하며 (본문 중에는 이니셜로 처리되었지만) 그날 토론회가 ‘꼬마 최장집과 꼬마 이진경의 싸움’으로 보였다는 감상을 소개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다만 최장집과 이진경으로 대표되는 어떤 유의미한 노선투쟁이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거니와, 저 둘이 사민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을 대표하는 쌍이라는 것에도 의아할 느낄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노선대립을 말하는 건가?

    토론회 당시의 포인트를 잘못 잡았거니와 의미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조병훈씨는 그 말이 무려 ‘아찔하고 살 떨리’게 느껴졌다는 감상을 덧붙인다. 마치 거기에 어떤 ‘의미심장한’ 요점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이건 전략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러한 수사가 담지하는 전략적 의도이다.

    내친 김에 더 인용해보자. 조병훈에 따르면 거대정파가 주체가 되어 조직생산을 하던 과거의 ‘선배’들과 달리 ‘다양성’에 있어서 파괴력을 잠재하고 있는 ‘젊은세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앞서 소개된 모종의 고착된 노선대립(사회주의 대 사민주의?)이 ‘진보라는 열린 판에 들어오려는 젊은 세대’에게 진보진영의 매력을 반감시킬 것이라 우려한다. 이러한 그가 ‘대안’으로서 주목하는 것은 앞서 말한 정파들의 ‘진흙탕 싸움’을 우회한 채, 자발적으로 형성된 단위를 통해 결합된 젊은 활동가들이다.

    물론 그러한 젊은이들이 새로운 (예컨대 저 재기발랄한 ‘혁명적 육식주의자 동맹’과 같은) ‘정치적 주체’들로서 등장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미리 결론을 앞질러 말하자면, 그의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아주 약간의 진실을 제외하면 그의 진단들은 상당 부분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

    조병훈의 우려할만한 화법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당시 토론회에서의 불일치와 간극들이 10년 전의 노선투쟁과 비슷해 보인다는 건가? 무엇보다 같은 20대로서 나는 ‘젊은 진보’를 자처하는 저 조병훈의 ‘전략적 화법’에 우려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정파 대립을 우회하여 두리반이나 홍익대 농성장과 같은 ‘현장’에 결합하는 젊은이들에게 거는 그의 기대를 조금 더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잠시 접어두자. 그의 발언이 매우 낙관적인 방식으로 마치 젊은 비정파적 활동가들이 전면적인 현실적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처럼 오도한다는 점도 잠시 접어두자.

    문제는 젊은 진보정치의 주체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서는 그가 윗세대 명망가의 저 우스운 ‘평가’를, 액면 그대로 당시의 토론회에서 오갔던 논의들에 ‘인입하는’ 방식이다. 그의 그러한 방식은 정확히 그가 비판하는 바로 그 ‘윗세대의 관점’으로 토론회에서 확인된 논쟁의 지점들을 섣불리 ‘재단’하는 것은 아닌가?

    조병훈보다 한참 후배인 나는 10년 전 대학가를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가 말하는 그 당시의 노선대립과 갈등들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에게 조병훈의 화법은 정확히 ‘윗세대’의 그 고리타분함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진보라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 역시 바로 그러한 ‘젊은 진보’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는 어떤 정파에 속하지도 않으며, 이진경과 같은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대리하여 토론회에 나선 것도 아니다. 그리고 분명 ‘리틀 최장집’쯤으로 비하된 상대 토론자(socio)에게도 마찬가지의 것을 말할 수 있다.

    지극한 꼰대스러움

    또한 마치 내가 대단한 노선투쟁이라도 한 것처럼 묘사된 상대 토론자(socio)는 한 명의 진부한 ‘의회 지상주의자’쯤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 그의 문제제기 자체는 분명 무시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문제 제기는 정당 바깥에서 싸우는 20대 활동가들이 ‘정당’과 어떤 관계 설정을 가져갈 것인지였다. 그의 발제문들이 지닌 몇몇 사실관계 상의 오류들(두리반의 활동가들이 정당과의 연계에 소홀했다는 이야기)은 접어두자.

    분명히 말해두겠다. 그의 문제 제기를 단순한 과거의 고전적인 사민주의자 노선의 재탕 내지는 리틀 최장집의 치기 어린 흉내 쯤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일종의 분풀이 내지는 상대를 손쉽게 이겨먹는 수사 이상의 어떤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수사야말로 지극히 ‘꼰대스럽기’까지 하다.

    나의 요점은 명확하다. 토론회는 토론회고, 본인이 상찬해 마지않는 저 새롭고 다양한 취미를 지닌 20대들은 그들대로 전혀 다른 견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조병훈은 이 둘을 뒤섞어버린다. 이게 본질적인 문제이다.

    결국 그는 당시의 토론회를 평가하는 모양새로 운을 띄웠지만 결국 그는 토론회를 하나의 흥미위주의 선정적인 ‘소재거리'(리틀 뭐시기와 리틀 뭐시기, 혹은 사민주의와 사회주의의 진흙탕 싸움?)로 삼아서 ‘새로운’, ‘젊은 진보’라는 모종의 의심스러운 표상을 내세우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기 PR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

    20대의 참신함이라는 헛된 환상

    다시 토론회로 돌아가자.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토론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조병훈이 내세우는 저 젊은 20대들의 참신함과 세련된 감각에 대한 헛된 환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내가 보았을 때, 정당 바깥의 젊은 활동가들의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라도 결국 그들이 정당으로 복귀해야만한다는 당시 저 ‘의회지상주의자’의 논점은 지극히 ‘이론적’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것이 최장집의 이론을 대리하는 것이었든 아니든 간에, 문제는 토론회 당시에 사람들이 이러한 쟁점에 대해 아무도 정면으로 나서 반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의문은, 고작해야 그의 발제문의 사소한 결점들을 들춰내는 것 말고, 거기에 대해 제대로 된 근본적 ‘입장’을 정식화했느냐는 것이다.

    socio의 논점은 간단하다. 그에 따르면 정당 바깥에서의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활동과 정치적 개입들이 아무리 재기발랄하고 활력에 넘친다 해도, 그들이 정당 바깥에 있는 이상 지극히 취약하고 의심스러운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발제에 대해 불쾌해하면서도, 그가 말했듯이 정당 바깥의 젊은이들이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에 수긍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진보정당이 (독일의 사회당이나 녹색당처럼) 더 많은 자원과 역량을 동원할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당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 게 더 낫다는 유혹이 들지 않는가? 지금 여기서 누가 이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정리할 수 있는가?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조병훈 식의 화법은 이러한 명백히 ‘우리 세대’에서 자라난 자생적인 의회주의자들의 (분명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공세’에 대해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막연한 정치적 표상(새로운 젊은 감수성?)으로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20대 내부의 간극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젊은이들의 참신함에 대한 막연한 호소야말로 실은 지난 10년 간 반복되어 왔던 레퍼토리 아닌가? 내가 보았을 때 오히려 그러한 레퍼토리야말로 이제서야 끝장 낼 때가 된 것 같다. 분명 상황은 바뀌었다. 진보적 20대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신한 활동가들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socio와 같이 대학제도 안에서 학문적/이론적 훈련을 받은 젊은이들, 기술관료적 마인드를 가진 ‘진보적’ 젊은이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20대 내의 간극들은 분명 무시될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노선이 다른 젊은이들 모두가 ‘동등하게’ 이미 기존의 운동판의 ‘정파’들을 우회한 채 태어난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들이라는 점이다. 그게 지금 상황의 새로운 점이다.

    NL과 사민주의와 사회주의?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이다. 따라서 조병훈처럼 기존의 옛스러운 정파투쟁에 고착된 시대착오적 젊은이들과 그렇지 않은 참신한 재기발랄한 젊은이들만이 존재한다고 손쉽게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점이 당시의 토론회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었다.

    토론회로 다시 한 번 돌아가자면, 그때 우리에게 제기되었던 것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젊은이들의 이론적/담론적 쟁점이었다. 달리 ‘토론회’이겠는가? 그리고 토론회는 활동가들이 참신함을 겨루는 경연대회가 아니다.

    ‘싸우는 20대’에 관한 당시의 토론회는 분명 ’20대 자신’들이 이론적/담론적 주체로서 호출되었던 장소였지, ‘윗세대 명망가’가 주제넘는 품평을 하라고 만든 자리는 아니었다. 조병훈은 그 점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정리하자면, ‘진보정치’를 지향하는 젊은이들 내부에서 정파와 무관하지만 여전히 첨예한 간극과 쟁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관료적이고 의회주의적인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조병훈이 언급했듯 의회와 제도 바깥의 새로운 정치적 창안을 지향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이다.

    이러한 쟁점에서 명확한 (그리고 20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론적 입장을 정하는 것은 운동과 별개로 지향해야할 또 다른 과제이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제기됐던 의회주의적인 이론적 공세를 엄밀하게 사고해야 했다. 그것이 당시 ’20대’로서 ‘토론회’에서 ‘요구’되었던 바였다. 그러한 점을 토론회 바깥의 이런저런 우연적이고 쇄말적인 상황들과 혼동시켜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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