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이명박 구호, 좋은 통치 못 불러내"
        2011년 01월 26일 09: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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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이 신년초 ‘최장집 인터뷰’ 기사를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닌 ‘좋은 통치’가 핵심”이라는 제목으로 뽑아 실었다.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년 11월 중순경 진보정당 활동가들과의 토론 석상에서, 미약한 군소세력인 진보정당마저도 저항의 주체가 아니라 ‘통치의 주체’라고 역설했던 나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년을 맞이해 가졌던 이러 저러한 모임에서 만난 언론인, 학자, 사회운동가들이 이 기사를 화제로 올렸다. <프레시안>이라는 매체, 최장집 교수의 학자적 명망과 무게감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지금 여기서’ 치열하고 진지하게 민주주의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시각에 대한 비판 혹은 옹호 모두 그러한 선상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최장집 교수에 대해 비판보다는 옹호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비판적인 평가들이 최장집 교수를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또 그것이 비판이든 옹호든 우리네 소통의 방식이 오해를 낳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왜 최장집 교수를 옹호하는가

    민주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 MB정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등의 문제에 앞서서, 난 민주화 이후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20여년의 세월 속에서 이미 저항의 주체일 수 없는, 통치의 주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아니, 이제와서 보면 더 거슬로 올라가 그것은 70~80년대 민주변혁운동을 했을 때부터 그러했고, 예비되어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두 가지 역사적 계기를 통해서였다. 하나는 민주개혁 세력의 집권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바로 그것이다. 즉 정부와 의회라는 공간을 기본적으로 ‘통치’의 문제가 다루어지는 공간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제기된다. 난 민주주의가 ‘반(反)통치’ 혹은 ‘통치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는 통치의 한 체제 혹은 방식으로서의 ‘인민의 지배’를 가리키는 것이지, 통치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이든 직접민주주의이든 간에 민주주의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민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개혁 세력에게 정권을 맡기고 진보정당에게 그것을 제한적으로나마 공유케 했다면, 그것은 ‘좋은 통치’를 하라는 것이다. 즉, 인민이 민주개혁 세력과 진보정당에게 크게 실망하고, 그런 끝에 이명박 정권을 출현시켰던 것은 좋은 통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지, 통치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민주개혁 세력과 진보정당이 다시금 인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선, 당연히 좋은 통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 통치란, 좋은 통치란 무엇인가? 통치란 기본적으로 여러 사회적 가치들을 배분하는 실천이다. 즉, 무엇이 지금의 상황에서 더 중시되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자원의 양적, 질적 소요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때 좋은 통치란 그러한 판단과 결정을 인민의 동의에 기반해 ‘권위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권위를 만들어내는 인민의 동의는 소수를 배제하지 않는 공적 논의의 과정과 결론을 이끌어내는 다수의 배려와 지혜를 통해 창출되어진다. 소수에 대한 고려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비롯해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다양한 집단들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궤멸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바탕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통치는 자신이 기반해 있는 당파성을 부분과 부분 간의 조화, 그래서 만들어진 전체와 부분 간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삼아낼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해선 나중에 기회가 있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는 단지 이상적인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민주화 이후 20여년 동안의 경험, 즉 민주개혁 정부 10년과 진보정당의 원내진출 이후의 7년, 그리고 보수정부 출현 3년을 통해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비판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그런데 지금, 반MB라는 구호는 좋은 통치를 기대케 하는가? 최장집 교수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말과 글에 바탕해볼 때, 그가 반MB를 비판하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문제 없다’고 본다 해서, 이명박 정권을 ‘좋은 정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최장집 교수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좋은 통치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이 반MB라는 구호를 갖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가장 중대한 책임을 은폐, 호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MB라는 구호가 효과적이려면 그것을 주창하는 세력이 기본적으로 좋은 통치의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갖추고 있다는 인민의 승인과 신뢰에 바탕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가 김종철 선생의 말처럼(한겨레 20101년 1월 17일자) “권력의 횡포에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느끼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장집 교수는 반MB라는 구호의 동원 속에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을 우습게 여기는 통치로의 귀결’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최장집 교수의 사색이 이계삼 선생과 같은 이들에게 ‘냉정한 민주주의’(프레시안 2011년 1월 21일자)로 이해되는 것은 아마도 좋은 통치를 가져오는 ‘사회적 힘’을 간과하고 정치 엘리트들에게만 시선을 맞추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오해라고 본다. 최장집 교수는 열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식었을 때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열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반MB가 인민에게 진정 ‘열정’을 가져다 주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엘리트들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민초를 중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중요한 민초의 운명을 ‘현실적으로’ 엘리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왜 오해가 계속 되고 있는가

    난 정치에 관한 우리들의 공적 논의에 정보화 사회가 주는 폐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즉, 나는 정보화 사회에 따른 우리네 소통방식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장점은 다른 이들이 워낙 많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우선, 그것이 공적 논의에 기필코 필요한 ‘시간’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간의 확보를 통해 어떤 누군가의 발언으로부터 갖게 된 불편한 마음과 생각, 그것에 의해 생겨난 화를 진정시키고, 발언의 맥락과 행간의 의미를 보다 사려깊게 짚어가며 정확한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필요한 것은 그러한 파악이 적어도 부풀림과 곡해, 속임이 없는 신뢰관계에 바탕한 주변인들과의 직접적이고도 집단적인 소통 속에서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비판적 논쟁의 결과가 보다 풍부하고 탄탄한 관계의 맺음에 바탕해 있음으로, 좋은 통치를 강제할 수 있는 ‘보다 큰 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적의 소통과 관계맺음의 방식, 난 우리네 인터넷 매체를 포함한 진보적 대안매체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 김종철 선생이 ‘독립언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해서 든 생각인데, 어쩌면 그러한 ‘전형’의 창출이 독립언론의 영향력을 만들어가는 한 방법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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