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딴 섬에서 소주 들이키다, 절망도 함께
        2011년 01월 24일 09: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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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 눈 맞으며 세상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중략)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정호승 시, <맹인 부부 가수> 중에서)

    위 시는 노래로도 불린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도 있다. 아빠가 매우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한번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맹인 부부 가수’를 치면 나온다.

    왜 항상 대통령 선거는 추운 겨울에 하는 걸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춥고, 굴뚝과 거리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많아 더욱 춥지만 그 때도 역시 춥고, 배고팠던 것 같다.

    참패로 끝난 선거

    권영길 후보는 대선을 며칠 앞두고 대통령선거 후보로서는 파격적으로 삭발을 감행했다. 당시 경제위기를 앞두고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등의 위협아래 놓여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머리를 박박 깍은 채 “일하는 사람들의 한표 한표, 작은 힘이 아닙니다. 200만표를 주시면 정리해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300만표를 주시면, 재벌경제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노동법 개정투쟁을 끝내고 불과 1년만에 다시 머리를 깍은 셈이다.

    그리고 선거가 끝났다. 현실을 냉혹했다. 권영길 후보는 19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보다 겨우 7만표가 더 많은, 306,026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야말로 참패였다.

         후 보      정 당      득 표 수     득 표 율
        이회창     한나라당     9,935,718      38.2%
        김대중     국민회의     10,326,275      39.7%
        이인제     국민신당     4,925,591      18.9%
        권영길     국민승리21     306,026      1.2%
        허경영     공화당     39,055      0.1%
        김한식     바른정치연     48,717      0.2%
        신정일     한국당     61,056      0.2%

    그러나 그 한표 한표에 녹아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기며 거리 곳곳에서 선전전을 했던 사람들.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열정을 모두 바친 그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다. “아마 천재지변으로 선거를 일주일 연기한다고 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그만큼 모두가 있는 것을 모두 바쳐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가난한 선거

    항상 돈이 문제였다. 돈이 부족해서 정부에서 투표와 개표참관인에게 주는 돈을 받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직하기도 했다. 투표 참관인은 1인당 5만원의 수당과 식사가, 개표 참관인은 1박 2일로 봐서 10만원의 수당과 식사가 제공된 것으로 알고 있다.

    투표구 참관인은 총 27,810명이, 개표구 참관인은 총 1,754명이 가능했다. 산술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는 계기였다. 물론 네 엄마와 나도 참관인을 했고, 그 돈을 고스란히 선거운동본부에 주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책자형 법정홍보물의 경우, 책자로 제작하는 것은 꿈도 못꾸고, A4용지 4면으로 줄여서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전국의 각 가정으로의 송부는 포기하고 부재자에게만 보내야 했습니다. 전단형 법정홍보물의 경우, 1550만부를 A4규격 2면으로 제작하더라도 전체 소요 비용이 2억 6천만원이나 됩니다.

    종이 값 일부라도 우선 지급해야 인쇄에 걸어 선관위 제출 시간을 맞출 수 있는데, 그 돈 역시 당장은 부담스런 1억원이었습니다. 몇 천억씩 사기를 치고, 몇 조원씩의 부채를 안고도 큰소리치는 사람에게는 작은 돈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돈을 마련하느라고 중앙상임집행위원들이 초를 다투는 긴급 차입 작전을 펼쳐 극적으로 12월 3일 오후에야 인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선관위 제출시한인 12월 9일에 맞추어 지역에 발송하려면, 12월 6일까지는 잔금 1억 6천만원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또 미디어 선거라고들 하는데 TV유세를 몇 번이라도 하려면 늦어도 12월 13일까지 최소한 몇 억원이라도 마련해야 합니다.

    TV유세는 방영일자 3일 전까지는 현금으로 방송국에 납입하지 않으면 자동 취소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돈 안드는 선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재정부족 때문에 TV광고나 신문 광고 등 필수적인 선거운동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당시 민주노총 공문 중에서)

    한 가지 기록만 남기고 선거 얘기는 그만하자. 선거운동의 막바지인 97년 11월 23일에 개최된 전국연합 제6기 2차 임시대의원대회는 “전국연합은 지난 6월 14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민주적 정권교체’의 대선 방침 중 민주적 정권교체를 위한 노력이 국민승리21에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며, 국민승리21 후보가 ‘민주적 정권교체와 야권후보 단일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이를 위해 전국연합은 국민승리21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결정했다.

    한마디로 권영길 후보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사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선거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내부 논란이 계속된 셈이다.

    선거가 남긴 것들

    전국적으로 80여개 지부와 220여개의 선거연락사무가 설치되었다. 700여명의 상근자와 1500여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가 찬바람을 맞으면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약 4만 여명의 회원도 생겼다.

    이와 관련 전문노련의 기록이 남아있다. 정치실천단 2,078명, 정치기금 1억6600여만원, 서적판매 721권, 조합원 주소록 64% 확보, 투개표 참관인 210명 등이 그것이다. 조합원이 3만명이 안되는 조직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결과는 비참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울산, 창원 등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권영길 후보 지지율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처참한 결과는 지워지지 않는다.

    투표 참관인을 마치고 삼삼오오 당시 선거운동본부가 있었던 마포의 일진빌딩으로 모였다. 최선을 다한 나는 개표를 보기보다는 술을 마시러 바깥으로 나왔다. 연애도 그렇듯이 최선을 다하면 후회도 덜하다. 때로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새벽녘에 술이 취해 최종 결과를 알았다. 무조건 서점으로 갔다. 그리고 『섬, 섬, 섬』이라는 책을 한권 샀다.

    “일주일만 갔다 올게”

    지금도 그렇지만 네 엄마는 항상 관대하다. 한 달 넘게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러라고 했다.

    “그래, 어디 가려고?”
    “그냥 아무데나 섬에 가려고..”
    “몸이나 잘 챙겨. 그리고 고생했어.”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었다. 일상적으로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겨울노래]라는 CD도 하나 샀다. 그리고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책에 나와 있는 삽시도라는 섬을 찾았다. 섬 전체가 화살을 닮아서 삽시도라고 부른다는 그 말이 좋았다.

    도착한 시간이 저녁이어서 대천항구에서 하루를 자고 섬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며칠인가를 바다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절망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민주노총 조합원수 55만명보다도 더 적게 나온 득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겨울바다는 혼자서 무슨 짓을 하든 자유였다. 혼자 마신 소주병이 어느 정도 방을 채웠을 때 결론을 내렸다.

       
      ▲삽시도

    “그래 좋다. 딱 10년만 더 해 보자.” 그리고 삽시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삽시도 얘기를 네게 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그 충격을 이겨내고, 다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삼선동으로

    선거가 끝나자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는 것은 무수한 평가였다. 처참한 패배로 끝났지만 92년 대통령 선거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흩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92년도 대선을 시작으로 노력을 기울여왔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국민대중을 설득하지 못한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30만표의 기반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당시 언론노련 부위원장이었던 네 친구 지원이 아빠 박강호의 말이었다.

    “이번 대선은 정치세력화를 위해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시험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정치세력화의 초기값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측정하는 무대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초기값은 정해졌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약한 출발을 정치세력화의 완결로 승화시킬 고민과 실천이다” 나와 같이 기획위원회에서 일했던 막내 김해근의 말이었다.

    선거가 남긴 과제를 이어가기 위해 사무실을 대폭 축소하고, 삼선동으로 이사했다. 남은 사람들은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등에서 나온 아주 적은 사람들뿐이었다. 마침 민주노총이 있었던 삼선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돈암성결교회 2층이었다. 선거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국민승리21이 남긴 성과와 과제를 이어갈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교수는 이런 평가를 남겨두고 있었다.

    “국민승리21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선거 때마다 분열되어 있던 진보운동 세력이 한데 결집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운동에서 한 단계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전례와 규칙에 따라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보수정치의 길이 쉬운 것과는 달리 노동자 정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앞 길이 험난하다.” 

    그리고 그 험난한 길을 삼선동에서 열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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