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진보에 대한 기대와 실망 사이
        2011년 01월 24일 08: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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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착잡했던 20대 토론회

    얼마 전, 몇 가지 싸움에 참여한 20대들이 자기 현장의 경험을 공유하고 향후 어떻게 힘을 모을 것인지 비평전문 블로거들의 토론을 곁들여 논의하는 자리에 갔다가 착잡해진 적이 있었다.

    뒤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앞선 발표를 자료집으로 보며 20대 정치비평 블로거들의 토론을 듣게 되었는데, 각종 참고자료와 유서 깊은 개념어들로 조립된 토론문에 ‘싸우는 20대’의 싸움을 확산시키고, 이러한 ‘세대의 싸움’을 세력화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논리는 거의 없고, 정당에 들어가서 프로페셔널하게 정치하자는 입장만 길게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인터넷 기사검색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리반 농성자들이 지역의 진보정당의 도움을 받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어느 의회지상주의자의 발언 때문이었지만, 이보다 길게 가슴을 쓰리게 한 건 역시 토론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객석을 퇴장해 버린 한 참가자의 논평 때문이었다.

    ‘꼬마 A와 꼬마 B의 싸움’. 물론 A와 B는 윗세대 명망가의 이름이다. 마치 사민주의와 사회주의 논쟁의 입문 버전을 보는 듯했던 그날 토론의 한 단면을 꼬집은 이 표현은 같은 20대로서, 그리고 싸우는 20대들이 자기 발로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이, 다른 세계를 꾀하는 진영 전체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한 명으로서 아찔하고 살 떨리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2.

    10년 전 대학캠퍼스 논쟁과 똑같은

    그 날의 토론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모두 세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또래 중에서 정당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만, ‘싸우는 20대’를 북돋우면서 이들의 존재를 ‘정당정치’에 적절히 연결시키지 못한 코디네이터의 실책이 아쉬웠고, 이러한 실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오래된 진보진영의 논의구도가 새삼 답답해졌을 뿐이다.

    진보정치를 이야기하는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라면 거의 십중팔구 토론장의 그들처럼 A, B들을 대리하는 토론이 펼쳐진다. 진보정치가 믿을 수 없이 느린 속도로 몇 년 째 붙잡고 있는 진보대통합의 찬반론과 혁명-개혁을 둘러싼 수많은 각론들, NL을 둘러싼 논쟁들이 10년 전 대학 캠퍼스와 똑같이 펼쳐지는 것이다.

    원래 이 집담회는 세대론이 윗세대의 조직재생산 전략이었다는 해석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다소 극복해보려고 기획된 것으로 알고 있다. ‘윗세대를 위한 진보재생산’을 몸으로 움직이는 20대를 통해 ‘세대 간 공생’이라는 제 자리로 돌려놓자는 것이, 말하자면 이 행사의 취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곡절로 이런 괜찮은 기획이 윗세대의 복제판이라는 평을 들으며 뒷걸음질치고 만 것일까.

    3.

    매력과 거리가 먼 진보정당

    진보진영의 정파 간 갈등구도는 어려운 훈련코스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습득 가능하다. 진보신당 당원게시판만 한 나절 동안 탐독해 보면 누구라도 진보3당의 역사와 정파별 사상줄기는 물론 유명 진보인사의 신상이나 당 안팎의 야사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가 진보정당의 게시판을 둘러보며 입당을 고려한다거나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것은 볼만한 장면임에 틀림없다.

    이와 함께 정당에 속한 각 정파의 내용과 장단점과 당내 세력구도를 파악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과정이다. 앞으로 더 많은 당직자나 전문 활동가가 등장해야 하며, 이를 통해 진보의 비전을 정교하게 다듬고 다각적으로 수권능력을 확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돕는 글도 각 정당의 웹사이트를 뒤져보면 풍족하게 찾을 수 있다.

    헌데 문제는 위 과정을 거치고 나면 진보정당의 매력을 듬뿍 흡수해 당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대학에 입학한 경우라면 캠퍼스에서조차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운동정파 간 갈등이 진보진영이 배출하는 에너지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정파들끼리 서로 신상을 죄다 공개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입당이나 정당 활동을 결심할 젊은 세대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전에 <다음세대 ‘좌파’를 주목하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719>라는 제목의 글에서 일부 언급했듯이 최근 진보라는 열린 판에 들어오려는 젊은 세대는 과거 거대정파가 주체가 되어 캠퍼스 중심의 조직재생산을 하던 당시의 ‘후배’들과 다르고, 기본적으로 취향이나 특기의 ‘다양성’에서 파괴력을 잠재하고 있는 세력이라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각 투쟁사업장과 같은 현장과 결합하는 방식 또한 전통적인 조직을 통하는 대신 개별적으로 또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단위를 통해 결합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당연히 새로운 방식으로 활동하는 젊은이들이 증가했다.

    진보적인 젊은 뮤지션들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두리반 투쟁을 떠올리거나, 홍대 미화노동자들의 농성장에 방문해서 농성장 곳곳에 부착된 감각적인 문구의 선전문을 한 번 들여다보라. 혹은 이번 당대의원에 출마한 진보신당 젊은 당원들의 출마의 변을 찾아 읽어보라.

    4.

    세대 간 공존의 의미 되찾기

    하지만 이렇게 한 발 나서는 이들에게 진보정당이 가장 먼저 보여주는 언사들이 바로 골 깊은 정파 갈등의 피해자임을 경쟁적으로 드러내거나, 상호 혐오를 극단적인 불인정으로 배설하는 것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조합해야 할까.

    재차 말해두지만 노선투쟁은 진보의 재생산 과정에서도 분명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고착된 구도가 갑자기 해소되거나 이를 타개할 새로운 노선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현장과 정치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이나 새로운 조직유형을 특징으로 하는 젊은 진보들을 주시하면서, 이들로부터 새로운 노선이나 기존 노선들 사이의 다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좀 더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는 진보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는 윗세대와 밀려난 부문으로서 정치적 활동을 요구받는 젊은 세대가 ‘세대 간 공존’의 의미를 되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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