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시민의 느닷없는 ‘애국가 사랑’
    [말글비평] ‘국민’에 사로잡힌 진보…입당 운동은 ‘오버’
        2012년 05월 16일 02: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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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사태가 비당권파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어가던 중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비당권파의 수장 격이 된 유시민이 밑도 끝도 없이 “우리도 애국가 부르자.”고 주장합니다. “우리 당은 왜 공식행사 때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인가?”

    그러면서 그 근거를 이렇게 댑니다. “주관적인 이념 체계에 얽매이지 말고,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양식 속에서 함께 호흡하면서, 때론 내키지 않아도 국민들에게 져주는 자세로 일해 나가야 한다.”

    전 이 말을 읽으면서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유시민의 노림수랄까, 아니 진보의 종말까지 읽었다면 호들갑일까요? 이 말에는 당권파를 견제하는 용도 외에도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공격이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그가 이후 어떤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진보의 탈색을 주문하다

    얼핏 보기에는 당권파를 겨냥하는 말 같습니다. 보수 언론은 이미 당권파를 ‘주사파’로 낙인 찍어버린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일단은, ‘당권파=주사파=주관적인 이념 체계’라는 공식을 기정사실화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일까요? 이 말을 뒤에 나오는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양식’과 연결하면 어떨까요? 국민 정서와 다른 어떤 이념도 ‘주관적인 이념’이 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사회주의 같은 이념은 발붙일 여지가 없어져버리는 거지요.

    지금 국민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정서에 맞는 이념이라면 결국 그가 터 잡고 있는 ‘자유주의’ 정도 아닌가 말이죠. 이리하여 국민과 진보가 대립 관계에 놓이고 맙니다. 아니면 진보가 국민 정서에 맞게 자기 색깔을 지우든가요. ‘자기 색깔 없앤 진보당’, 이것이 유시민이 바라는 통합진보당의 미래상이라는 것을 보여준 거지요.

    예정된 수순대로 가다

    유시민의 이 발언은 그의 말대로 ‘어차피 물러날 것이기에 평소 생각을 피력’한 정도일까요? 그렇게 보기엔 시점이 묘합니다. 잠시 유시민의 행보를 좇아보지요.

    연초에 유시민은 당권파의 전횡에 반발하여 당무를 거부합니다. 큰 성과를 얻진 못했지만, 패권주의에 맞설 인물이라는 은근한 인상을 남깁니다. 선거가 끝나고 참여계인 이청호 부산 금정구 지역위원장이 당내 부정선거를 고발합니다.

    조사위가 활동 중이던 4월 22일, 유시민은 당 게시판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립니다. “아무리 추악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진실을 진실 그대로 보게 될 것”이라며 “이것은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상식의 문제이며 이해다툼을 넘어서는 정치적 공분의 문제”라는 내용이었죠. 참여계의 고발과 그 수장의 호응입니다. 사정이야 어쨌든 앞뒤가 잘 맞는군요. 조사위원회의 발표는 5월 2일이었죠.

    2일 조사위의 발표가 나고 3일 드디어 유시민이 입을 엽니다. “그 행위를 한 당원 개개인의 책임을 논하기 전에 하나의 정당으로서 국민 앞에 분명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정희가 당원(사실은 정파 조직원) 보호로 향할 때, 유시민은 국민으로 나아간 겁니다. 이 순간이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명암이 갈리는 출발점입니다.

    4일에는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투표ㆍ득표 현황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지적과 함께. 이쯤 되면 이 싸움은 무조건 이깁니다. 아무리 큰 선거라 하더라도 투표ㆍ득표 현황이 공개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상식’의 문제니까요.

    이날 이정희는 전국운영위원회를 17시간 동안이나 질질 끌더니 사퇴를 선언하고 퇴장해버립니다. 이미 한 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버럭질’로 공감을 얻었던 유시민이 의장권을 이어받습니다. 그리고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민주적 절차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었죠.

    당권파 참관인의 도발에 끈기 있게 대응하다가 도저히 진행 불가능함을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확인시키고 정회, 이어 전자회의로 속개, 통과! 속 터지던 구경꾼들은 시쳇말로 뻑, 갑니다. 자기 몫인 비례대표까지 사양하고 말이죠.

    6일 유시민은 기자들과 만나, “분당? 여기가 마지막 당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분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면서요. 이제 분열주의자 유시민은 없습니다. 대신 국민의 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믿음직한 투사로 거듭난 셈입니다.

    애국가 부르자는 말은 이처럼 그의 승리가 굳어진 상황에서 나온 겁니다. 이 말은 당원들, 특히 비당권파 운동권을 향한 다그침인 동시에 국민을 향한 구애의 성격도 띱니다. 이후 제가 만들 당은 이렇습니다, 하는 메시지를 날린 거죠.

    12일의 전국중앙위원회는 사실상 시작하기도 전에 승부가 난 것이었습니다. 당권파 참관인들의 행태는 관에 못질을 하는 것이었지요. 단상을 점거하고 대표단을 폭행하면서 유시민에게 ‘신사남’이라는 선물까지 주고요.

    진보, ‘국민’에 사로잡히다

    이 일련의 과정 동안 유시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명쾌합니다. ‘국민’의 시각에서 ‘민주주의의 원칙과 상식’을 지키자! 그러는 동안 진보적 의제는 깡그리 지워집니다. ‘진보는 비민주적’이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심습니다. ‘진보여, 국민의 품으로 오라’, 이것이 비당권파를 응원하는 메시지들의 주제입니다.

    심지어 심상정 같은 진보 진영의 대표 선수들마저 ‘원칙과 상식’, ‘국민 편’이라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노회찬도 14일 트위터에 “문제는 민주주의입니다. 당내 민주주의가 한국사회 평균 수준 이하라면 그 당은 존재할 이유도, 존속할 가치도 없습니다.”라 씁니다.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이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낸 적이 과연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요? 유시민의 ‘국민’, ‘민주주의’ 프레임은 이토록 위력적이었습니다.

    ‘유시민, 다시 봤다’, ‘원칙과 뚝심’, ‘신사남’이라는 찬사가 쏟아집니다. 주사파 척결의 선봉장 진중권은 ‘통합진보당 수술할 집도의’로 유시민을 꼽습니다. 그가 대선 출마를 포기한다는 말을 흘리는 가운데 대선 지지율은 상승을 거듭하여 4위에 오릅니다.

    유시민을 이용하려던 당권파는 거꾸로 유시민의 프레임을 굳히는 데 최대의 이용물이 돼버렸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 전체를 통째로 넘겨주는 짓을 해버린 거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당권파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일단은 민주주의부터! 다른 모든 의제는 다음 문제, 딱 이 짝이 돼버렸습니다.

    고쳐쓸 만한 당인가

    이런 와중에 통합진보당에 입당하여 당권파의 손아귀에서 당을 구하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전 이게 좀 ‘오버’라 봅니다. 지금 흐름상 당권파는 이미 자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의석 몇 개 지킨다 해도 국민 눈 밖에 난 의원이 제대로 활동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되든 당권파는 투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후의 구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원칙과 상식에 맞는 민주적 절차의 제도화로 총 매진하겠지요. 여전히 주도권은 유시민에게 있을 테지요. ‘운동권’ 냄새나는 것은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까 싶군요. 그러는 중에 대선을 맞이합니다. 민주적으로 재정비되고 애국가도 부르는 통합진보당은 다시 민주당의 야권연대 파트너가 되겠지요. 협상을 통해 연립정부를 따낼 수 있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요?

    고쳐 쓰자는 명목으로 입당을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적 의제를 되살리는 쪽으로 나아가기는 난망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통합‘진보’당은 제 이름값 하기가 힘들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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