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주의 사회 육아론에서 배울 것들
        2011년 01월 21일 10: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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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세계를 분석하는 주요 도구로 ‘착취’, 즉 잉여가치 수취라는 관념을 이용합니다. 만약 우리 분석 대상을 확대재생산의 세계, 즉 ‘일’의 세계로 국한시킨다면 이는 당연히 가장 적합한 분석틀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주변화

    우리는 ‘기업인’처럼 적어도 중립적으로 들리는 듯한 어휘를 자주 쓰지만, 땅투기로 번 돈으로 자동차부품 공장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백만원 이하의 월급을 주면서 다달이 수천만원의 이윤을 챙기는 이는 분명히 착취자일뿐이죠.

    그러나 이 세계는 단순한 착취/피착취 관계로만 설명되어지지 않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심부 세력들의 침략을 받는 주변부-이라크나 아프간-의 민중들은 직접적 착취를 당한다기보다는 그 땅에 있는 지하자원을 강탈 당하거나(이라크의 경우), 그 땅의 지정학적 위치를 노리는 제국주의자들의 직간접적 지배를 강요당하는 셈입니다.

    착취, 강탈, 지배 이외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축은 바로 주변화죠. 예컨대 더이상 시장에 내다팔 만한 노동력을 보유하지 않는, 즉 더이상 착취할 만한 가치도 없는 노인들은 폐기물처럼 사회의 주변에 밀려, 가난(한국 노인의 약 40%는 국가가 정한 기준으로 봐도 빈민에 속합니다)과 사회적 괄시 속에서 그 인생의 쓸쓸한 내리막을 걸어야 합니다.

    노인을 폐기물로 만들어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자살로 끌고 가는 일에서만큼은 선진화돼 가는 우리 조국은 물론 세계 일류이며 세계명문입니다. 1998년만 해도 10만명 당 연간 50명에 불과했던 80세 이상 노인 자살율은 이제 115명 정도 돼, 12년간 130% 성장율을 보였으니 한국 자본주의의 관리자들은 자축할만도 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렇게 많은 ‘폐기물’들을 스스로 세상을 떠나도록 유도하여 사회의 ‘망국적인 복지 지출’을 이렇게도 잘 줄여줄게 하는 지배자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의 괴물과 용감하게 싸우는 위대한 우리 지도자들의 기념비적 업적입니다.

    노인 자살률 12년 동안 130% 증가

    착취, 강탈, 지배, 주변화 내지 폐기물화 이외에는 자본주의 세계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축은 바로 탈인간화입니다. 이 사회의 상당 부문에서는 정상적 인간의 맨정신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기에 그 분야의 종사자들을 항시적으로 비정상적 정신상태로 몰아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민중들에게 정기적으로 곤봉세례를 퍼부어야 하는 전경이나 의경들은 이와 같은 일들을 정상적인 심신 상태로 하기가 매우 힘드니, 그들 부대에서의 살인적 수준의 구타 풍토를 방치 내지 조종하여 운 나쁘게 거기에 끌려온 피지배층 젊은이들을 항상적 공포 상태로 몰입시키는 것이죠.

    그들이 곤봉세례를 열심히 퍼붓지 않으면 살인적 구타와 각종 모욕을 당할 줄을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뻘인 늙은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잔혹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탈인간화의 선구적 실험장이지만, 예컨대 스포츠계나 연예계는 이 차원에서 꼭 뒤지지도 않습니다.

    구타를 당하거나 술시중, 성상납 강요를 당하는 그쪽 종사자들은, 몸을 망가뜨리더라도 경쟁자를 물리쳐 몸값을 올리는 일, 그리고 자기 섹시한 몸과 사생활까지 상품화시킴으로써 출연 드라마 시청률을 높여 협찬사들의 수익을 올리게 하는 일을 결국 당연한 ‘일생일’"으로 익혀야 합니다. 탈인간화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것이죠.

    그런데 어쩌면 군대나 스포츠계, 연예계보다 더 철저하고 악질적인 탈인간화의 현장은 다름이 아닌 일반 학교입니다. 군대에 끌려가거나 프로 스포츠, 연예계에 몸과 마음을 파는 이들은 적어도 10대 중반 이상이니 비인간적 세계에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고, 가장 어렵고 무서운 부분들을 적당히 피해가는 등 나름의 ‘생존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가장 악질적인 탈인간화 현장

    하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정신병적 ‘경쟁교육’에 노출돼 있는 아이들 같으면 이와 전혀 다른 입장이죠. 부모를 아직 우주 전체로 아는 10대 이전의 나이에, 그들은 바로 부모의 강요로 알아먹지도 못하는 영어로 아무 뜻도 발견할 수 없는 노래들을 이미 달달 외워야 하고, 친구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경쟁적으로 수학 문제풀이에 몰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주고 예뻐할 줄 배워야 하는 이 나이에 남자아이들은 "인생은 전장, 남자는 전사"라는 적자생존식 철학의 차원에서 벌써 ‘국기 태권도’를 익혀 ‘맞는 아이’가 아닌 ‘때리는 아이’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리고 싶지 않는다면? 그러면, 무수한 시체들을 밟아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나 ‘지지율 1위 정치인’이 되는 ‘최고’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 ‘진정한 사나이’로 사는 걸 포기해 낙오자, 주변분자의 삶을 감수하거나 이민 준비쯤을 착수해야 하는 셈입니다. 무간지옥은 따로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무간지옥 속에서도 아이를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 아닌 정상적인 인간으로 키우고자 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지금 하나의 희소식이 들리게 됐습니다. 수호믈린스키의 전인교육론인 『선생님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이 며칠 전에 고인돌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이야말로 경쟁교육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성도 높은 대안인 셈이죠.

    반평생을 우크라이나 한 마을의 시골학교 교장으로 보낸 바실리 수호믈린스키(1918~1970, 그의 교육론에 대한 연구 등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www.sukhomlinsky.net/)는 비록 경직성이 높은 스탈린주의 관료체제 속에서 살았음에도, 그의 교육론은 공산혁명 원래의 인도주의적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교육관료들의 상당한 저항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부모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은 교육론

    그 저항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호믈린스키 교육론이 소련과 동구 등지에서 널리 알려지고 수호믈린스키가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는 등 비교적으로 공식적 인정을 받은 것은, 그의 교육론이 일선교사와 학부모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명저 『아이들에게 내 심장을 준다』(그 영역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www.gyanpedia.in/Portals/0/Toys%20from%20Trash/Resources/books/Vasily.pdf)는 일찍부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었죠.

    지금 우리 선진적 조국에서의 처세서처럼 말이죠. 단, 그 내용은 우리가 서울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세서들과 정반대이었습니다. 수호믈린스키는 교육의 요체를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 지식에 대한 기쁨, 타자와 연대하는 데에 대한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을 남들과 나눌 줄 아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적 인간을 키우는 데에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있고 애국조회는 있지만, 수호믈린스키 학교에서의 주된 매일 의례행사는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숲의 들판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샘물 소리에서의 위대한 음악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날아다니는 나비의 모양새에서 자연 속의 균형과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구름과 바람의 심포니를 배웠습니다.

    이 ‘자연 수업’의 결과물은? 아이들은 종이에다가 자연을 접하고 나서 느낀 자기들의 소회를 그림으로 발표하고,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서로의 자연사랑을 발견하고 서로서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죠.

    수호믈린스키의 교육론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은, 공부를 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약간 더딘 아이들에게 개인지도하면서 그들을 돕는 연대주의 교육이었으며, 화학이나 생물학의 추상적 원리들을 자연 속에 나아가서 발견해야 하는 실사구시적 교육이었으며, 이론공부와 함께 비료나 사료를 만들고 비행기나 배 모형들을 손으로 만드는 실기교육이었으며, 철저하게 아이들의 수준과 개인특성, 연령적 특성에 맞추어진 맞춤형 교육이었습니다.

    고학년 아이들은 교과서 이외에 대중적 과학 책을 탐독하면서 물리학이나 수학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갖게 됐는가 하면, 저학년 아이들은 나무와 다람쥐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가를 상상하면서 이를 ‘창작 동화’ 형태로 발표하여 자신의 창조력을 단련했습니다.

    일선 농민들의 아이들인 수호믈린스키의 제자들은,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도 부모들에게 ‘재미있는 물리학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남과 나누는 일까지 배웠습니다. 그들이 자기 개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고 그 분야에서의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등 철저하게 ‘개인’으로 컸지만, 동시에 그 창조력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그들에게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이와 같은 배움이 가능해진 것은, 비록 관료화되긴 해도 어쨌든 개인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민중의 생계가 보장돼 있는 사회주의 조국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호믈린스키가 서거한지 이미 4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사회주의 조국이 무너진 자리에서는, 밑에서는 마피아에 의해서, 위에서는 안보꾼들에 의해서 각각 관리되는 가장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원자화돼 공포감에 사로잡힌 개개인들이 각자 살아남으려고 절망적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아직 남아 있는 이유

    그래도 그의 교육이론이 계속 관심을 끌고 학습되는 한,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이 야만의 시대를 뒤로 하여 보다 나은 수준에서 관료제의 폐단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다시 한 번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사회주의 없이 살 수 없는, 사회주의를 공기처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성장되면, 옛 혁명 가요의 구절대로 언젠가 "인류의 황금시기"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걸 믿지 않고서는 이 고통의 바다에서 왜 식량을 축내면서 계속 망국 유민의 부끄러운 몸으로 살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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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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