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근대성, 최첨단 상품 & 체벌
        2011년 01월 14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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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신생의 딸 사라가 이제 분유를 듬뿍 먹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금주에 제게 있었던 개인적인 학술적 경험을 이 블로그를 통해서 한 번 사회화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정부가 주는 2주 출산 직후 휴가 중이라 원칙상 노동하면 안됩니다.

    아시아 교육의 국민화와 저항

    하지만, 이번 주초에 저는 노동환경감독청(http://www.stami.no/)의 시선을 과감히(?) 피해서 약간의 직업활동을 했습니다. 동료와 함께 아시아 교육에 있어서의 국민화와 저항 등을 다루는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해서 노르웨이의 학진으로부터 연구비를 신청하려 하는데, 그 예비적 국제 워크샵에 나아가서 제 연구주제에 대한 예비발표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 속에서 연구하려 하는 것은 한국 교육에 있어서의 군사문화와 체벌 등 육체훈육의 문제인데, 이번에 발표한 것은 바로 한국에서의 ‘체벌 정치’의 문제였습니다. 이 발표는, 대한민국처럼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스마트폰과 같은 최첨단 국제 장사로 돈을 버는 나라가 아직도 체벌을 널리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동료들의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여기에서 그 대강을 서술하여 강호 제현의 질정과 편달을 청하고자 합니다.

    어느 계급사회든간에 그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에서 (지배자에게) 복종심 등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늘 훈육 장치들을 다양하게 설정해 이용합니다. 아주 거시적으로 본다면 미셀 푸코의 이론대로 전근대의 훈육은 대체로 육체적 통증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반면 근대적 훈육은 시장사회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개개인의 경쟁심이라도 유발시켜 스스로를 통제케 하는 ‘자발성 유도형’에 더 가깝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곤장을 치게 하여 ‘문제 있는’ 이를 반주검으로 만들고 이 장면을 보는 이들을 다 겁에 떨게 만드는 것이 전근대라면, 수업 때에 하도 재미없어 잡담하거나 딴 일을 하는 아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영수야, 너는 이러다가 좋은 대학 못가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너의 부모의 희망을 다 꺾게 돼. 정말 그러고 싶니? 정신 차려이!"라고 이야기하여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영수의 신분상승 심리를 자극시키는 것은 근대적 훈육법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영수는 아무리 국, 영, 수 문제풀이의 천재가 돼도 세습적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아직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화는 살아 있으니 이와 같은 ‘자발성 유도형 훈육’은 충분히 가능하죠.

    자발성 유도형 훈육

    뭐, 이 신화는 당연히 10~15년 후에 죽고 말 터인데, 지금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빈민동네들은 이미 그 때에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리오데자네이로와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 수업 때에 졸고 있는 영수들에게 "너는 그래도 너의 부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라도 하고 싶지 않니? 마약밀수 갱단에 들어가서 총 맞아 죽을 마음 없지? 그러면 공부나 좀 해!"하면 될 듯합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대한민국은 위대한 근대적 선진국답게 ‘자발성 유도형 훈육’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수와 영희들이 졸음과 마려운 오줌통, 답답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자살충동 등을 물리치면서 부모님들을 울리지 않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인정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낙오자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죽을 일이 없기 위해서 암기와 아부적인 ‘모범적 품행’으로 하루 14~16시간 동안 승부를 열심히 가립니다.

    그런데 장시간 학습노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인접국가 – 일본, 대만, 중국 -와 달리, 대한민국은 거기에다가 영수와 영희들의 학습기계가 된 육체와 정신이 약간이라도 삐딱거리면 가차없이 그들에게 ‘매’라는 약을 강제 투여합니다.

    약간이라도 관리자 (옛날 말로 ‘선생님’이었지만, 이 옛말을 대한민국에서 사용하기가 불편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덜 열심히 따르거나 인사라도 15도 대신에 5도로만 올려 ‘건방지게’ 보였다가 당장에 볼, 종아리, 허벅지가 아플 것이라는 기억을 뇌에 새기게. 그리고 불복하면 당장 큰 통증이 온다는 등식을 아예 몸으로 기억 잘 하게.

    그렇지 않아도 영수와 영희들을 ‘자발적인’ 공포에 이렇게도 잘 빠뜨리는 이 위대한 선진국에서는, 왜 하필이면 매와 같은 다소 단순하고 후진적인 도구는 아직까지 이렇게 인기인가요? 한국형 훈육은 왜 전근대적인 ‘통증에 대한 공포 유발’과 근대적인 ‘경쟁심 유발’을 이렇게 조합시키게 됐는가요? 이 질문에 답하자면 대한민국의 위대한 계보부터 쭈욱 추적해봐야 합니다.

    적당한 체벌은 합법

    한국적 근대성의 원천이라고 할 명치시대 일본에서는, ‘근대’를 기치로 내걸어 체벌들을 아주 선구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금지해놓았습니다. 1879년의 교육령 46조부터 1941년 국민학교령 13, 20조까지, 명치기부터 소화 시대의 전쟁기까지, 군사주의의 극성에도 불구하고 원칙상 체벌은 계속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번지르르한 근대적 표피뿐이었고, 실제로 일본 ‘황군’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일제시대 학교에서도 매를 가하려는 교실관리자를 말릴 방법이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더욱더 그 체벌 관행은 심해, 법률적으로 ‘내지’에서의 체벌 금지는 ‘외지'(식민지)에서도 효력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1920~30년대에 교실에서 비명횡사하거나 불구자가 된 조선 아이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당시 ‘민간지’들은 전하곤 했습니다.

    일단 체벌로 조선인의 자존감이나 저항하려는 용기를 꺾어서, 그 다음에 겁이 나서라도 유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충성 경쟁과 학습 성과 경쟁을 부추기려는 것은 식민지 교육 관료들의 속셈이었죠. 총독부 조선인 출신의 교육관료와 함께, 이 이중적인(체벌 + 경쟁 유발) 훈육제도는 총독부의 법통(통치권)을 이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약간의 음성적 체벌 관행은 남아도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적 사범학이 도입돼 체벌이 불법화됐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예 일제시대에 비해 퇴보를 하고 말았죠. 식민지 때에 말뿐이었다 해도 그나마 명시적인 체벌 금지는 있었지만, 한국 교육법 76조는 체벌을 금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행’ 내지 ‘사회통념’의 문제로 남기고 만 것인데, 이 사회통념을 사실상 정의하는 것은 체벌 관련 재판에서의 대법원 판결들입니다. 최근까지의 판결들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흥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품위 유지’하면서 큰 상처를 내지 않았던 ‘적당한 체벌'(볼때리기, 종아리 치기 정도) 행사는 거의 ‘합법’으로 인정돼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민지적 이중 훈육 체제는 그대로 잔존해온 것입니다.

    한국 자본주의가 원하는 충성스런 노예들

    한국 자본주의에는 단순히 ‘열심히 하는 근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제한 잔업 지시를 당해도 저항할 생각을 못하는,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로 반주검이 돼도 자살할지언정 ‘국내 최고’의 무노조 기업을 상대로 투쟁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아주 유순하고 아주 충성스러운 노예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들을 관리할 체제의 성격 자체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노예들을 훈육하는 방식에도 전근대성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확언컨대 조중동은 끝내 체벌 금지를 반대할 것입니다. 군대 못지 않게 교실 체벌도 저들의 성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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