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의사들, ‘환자’보다 ‘질병’에 관심
        2011년 01월 08일 03: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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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시대의 의사』(카를 야르퍼스, 김정현, 15,000원)는 ‘의사’에서 ‘의료 전문 기능인’으로 변화해가는 의사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초정밀·최첨단 진단 및 치료 장비로 대표되는 의학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건강과 질병 치료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환자와 의료 장비의 관계로 대체하는 그늘을 만들었다.

       
      ▲책 표지 

    의료 장비의 끝없는 경쟁 무대가 된 의료 현장에서 의사들은 기술과 장비에 예속된 채, 환자와의 소통 없이 질병 치료에만 초점을 맞추는 ‘의료 전문 기능인’으로 변화해갔다. 저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근대 이후 의학이 질병의 객관화에 몰두한 나머지 환자의 고통과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질병만을 대상화해 ‘환자의 역사’를 ‘질병의 역사’로 바꿔버렸다고 질타한다.

    환자 실종, 질병만 대상화

    실존철학의 대표자로 알려진 저자는 철학뿐 아니라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 심리치료, 의철학 등의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자 정신병리학자이다. 의사 출신으로 선천성 기관지염이라는 만성질환을 앓으면서 환자의 고통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야스퍼스는 평생 동안 의철학/정신의학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사유는 그의 철학을 훨씬 포괄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야스퍼스의 의철학적 사유와 정신분석/심리치료 비판과 관련된 강연과 논문 5편(〈의사의 이념〉,〈의사와 환자〉,〈기술 시대의 의사〉,〈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정신의학·의학·정신분석·심리치료·철학 등의 다양한 영역을 관통하며 현대 의학의 한계 및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문제점 등을 철학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찾는 통섭적 사유를 보여준다.

    의사의 이념, 의술의 휴머니티, 의사와 환자의 관계, 현대 의학의 한계, 기술 시대가 의료 조직에 미치는 영향 등 의철학적 논의를 담은 이 책은 의료 기능인으로서의 의사를 넘어 진정한 의술에 봉사하는 히포크라테스적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의철학/정신의학이라는 야스퍼스 철학의 숨은 광맥을 소개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며, 실존철학에 대한 관심이 퇴색된 오늘에 야스퍼스의 철학을 ‘문제적’으로 읽을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의사의 이념에 대한 철학적 점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의사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점검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성찰하며, 현대에 실종된 의사의 인격과 휴머니티를 문제시한다. 의료적 이념 없이 조직 운영에만 관심을 두는 병원, 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병에만 관심을 갖는 의사, 휴머니티 없이 자연과학적 지식에 기초한 치료에만 몰두하는 의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환자와의 소통에 무관심하고 인간이 결여된 질병만의 관리술이 되어버린 현대 의학을 비판하는 야스퍼스는 의사와 환자, 의술과 인간이 함께 있는 의료 행위를 강조한다. 그의 주장은 의사가 환자와의 실존적 상호소통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 휴머니즘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의술은 의학적 지식과 환자라는 인간 사이에 놓인 실천적 휴머니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뇌 신화학(정신병을 뇌 질환으로 보는 가설)을 정신의학적 선입견으로 보고 정신병리학적 방법의 한계를 규정하고자 하며, 프로이트의 이론적 가정을 정신의학이 맞서 싸워야 할 편견으로 여긴다.

    저자에 따르면 정신분석적 심리치료에서는 초월성의 관계를 통해 본래적 인간 존재에 이르는 길이 막히게 된다. 심리치료는 암시, 정화, 실행 같은 다양한 방법과 상호 대화를 통해 환자를 일깨울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뿐 실존적 결단을 계획하거나 인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야스퍼스의 정신분석/심리치료 비판은 치료의 실천철학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사유는 심리치료의 한계뿐만 아니라 실존해명의 철학적 치유의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으며, 현대의 철학적 심리치료를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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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카를 야스퍼스

    독일의 철학자로 1883년 2월 올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하이델베르크와 뮌헨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후에는 의학을 공부했다. ‘향수와 범죄’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가 된 후, 심리학과 철학을 강의했다. 1947년 "프랑크푸르트 괴테상"을 받고 하이델베르크 학술 아카데미 회원이 됐으며 1969년 세상을 떠났다. 지은책에 <일반정신병리학>, <세계관의 심리학>, <철학>, <이성과 실존>, <대 철학자>등 여러권이 있다.

    역자 – 김정현

    고려대 철학과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해외 파견 교수 자격으로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연구했다.

    니체전집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 니체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에 <이성과 反이성>(공저), <니이체 철학의 현대적 이해와 수용>(공저), <니체 이해의 새로운 지평>(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니체 철학 강의 I>, <프로이트와 현대철학> 등이 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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