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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1월 06일 08: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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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햇볕정책에 대한 환상

연평도 포격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던 정치적 ‘진리’는 무엇인가? 적어도 현 시국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 즉 그것에 대해 동물적인 반응 (이 사태 이후 북한관련 논쟁에 관하여 신문지상과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대부분이 동물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이상의 유의미한 것들을 분절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연평도 사태가 가르쳐주었던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관건은, 연평도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근본적인 교훈이 일종의 동어반복에 불과한 국가 안보의 중요성이라든가 혹은 이제는 빛바랜 햇볕정책에 대한 향수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보수와 진보로 일컬어지는 저 두 진영이 공유하고 있는 두 가지 진부한 교훈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서야 비로소 북한과 남한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출발점은 여기에 놓여있다.
조윤호라는 한 젊은 좌파 논객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햇볕정책 옹호론자들과 그 반대자들이 통상적으로 북한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근본환상’은 바로 한국의 정책적인 접근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심지어 외설적이기까지 한 바로 그 자신감이다. 정전 후 최초의 민간인 지역 포격이라는 이 유례없는 사건이 오히려 우리에게 ‘실증’해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근본환상’의 오류 그 자체였다. 즉 다시 말해 연평도 포격사건의 근본적인 외상적 지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면, 이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대답은 이 사건이 단순히 햇볕정책으로 표상되었던 대북 유화책이 부적절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어떤’ 정책적 수단도 북한의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우리의’ 통제 하에 두지 못한다는 것에 놓여야 한다.

“내 생각에 햇볕정책 지지자들과 강경론자들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상반적이지만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바로 ‘한국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다시 풀어서 묻자, 한국의 대북정책은 과연 강경론자들의 주장대로 북한의 붕괴를 가져올 만한 변수인가? 또한 한국의 대북정책은 과연 햇볕정책 지지자들의 주장대로 북한의 양보와 이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을 불러올 만한 변수인가? 이들 쌍방의 대북정책에는 놀랍게도 ‘대(對)’만 있고 ‘북(北)’은 없다. 물론 한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대북정책을 가지고 공방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권유지 혹은 정권교체에 있기 때문에 이런 복잡한 상황을 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정치인들이 양자택일의 대북정책 중에서 무엇이 옳으냐를 가지고 무한랠리를 벌이는 동안 이 쳇바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계속 돌아가는 이 쳇바퀴는 결국 과열해서 폭발해버린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현재의 햇볕정책과 강경 대응은 모두 틀렸다!”

[출처] 강경론과 햇볕을 넘어서 (공동생활전선) |작성자 조본좌 (http://hook.hani.co.kr/archives/16775)

이러한 교훈은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오늘날 북한의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심급은 단순히 남한 측의 대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 내부사정,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 등 남북관계 외적인 맥락에도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체제수호를 목적으로 감행하는 모든 정치외교적 반응들의 원인을 정의상 남북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없다. 만일 남북관계를 그러한 방식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남북 분단사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사건들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남북 간의 우호적인 공동성명들이 반공을 기치로 내건 군부정권 하에서 체결되었다.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의 유례없는 긴장국면은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귀결되었고,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이후에도 공식적인 정부담화에서는 평화통일에 관한 원칙이 유지되었으며, 기타 등등.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사건의 배경에는 북한과 미국 혹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의 어떤 정책수단이 북한을 어떻게 길들인다는 식의, 고상하게 말하자면 남한 측의 유화적이고 평화적인 정책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전달했다는, 더 천박하게 말하자면 북한에게 퍼주었던 쌀(현금)이 핵무기로 되돌아왔다는 식의 진술들이 화장실 농담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너무나 자주 사용되곤 하는 이러한 유사-행동심리학적 진술들의 (이라크 전쟁을 포함해 언제나 정세판단을 잘못하기만 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네오콘 싱크탱크들에서 생산된 이러한 논변들의) 부적절함은, 어떤 ‘신호’가 당사자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는 사전에 미리 결정할 수 없다는 (스키너의 표현대로라면 자극-반응 체계의 전체 메커니즘은 모종의 블랙박스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오늘날 행동심리학의 가르침에서 실증된다. 우리는 행동심리학적 견지에서 북한이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행동 메커니즘이 외부에서 주어진 신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의 여부이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 궁극적으로 북한은 우리에게 블랙박스, 내지는 전적인 타자로서만 알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북한에 대한 모든 기술관료적 담화들의 무력함이 드러난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대북강경책과 대북유화책 모두 북한에 장기간에 걸친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기는 데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관료들과 기술관료의 언어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몰이해로부터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감정적 폭발이 시작된다. 기술관료들의 부적절한 원한감정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 “나의 정책은 완벽했는데, 그것을 망친 것은 북한의 잘못이다!” 이러한 반응의 전설적인 사례들 중 하나로는 11월 24일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나왔던 김황식 총리의 발언을 들 수 있다. “그때(*2002년 서해교전) 저는 ‘북한이 이래도 되는가, DJ 대통령께서 동족으로서 얼마나 북한을 껴안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시는데, 세계인의 축제가 한반도에서 이뤄지는데 북한 사람들 참 이상하다. 납득하지 못할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이러한 정서를 놀랍게도 전 참여정부 측 인사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조차 흥미롭게도 줄곧 사석에서 김정일에 대한 공공연한 적개심을 표출하곤 했었다는 것이다.
관건은 이러한 원한감정이 오늘날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어느 정권의 퍼주기가 오늘날 북한의 잘못 길들여진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식의 진술 역시, 스스로의 근본적인 무능력함을 마스터베이션의 형태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마스터베이션에 탐닉하는 것은 정신건강상 필수불가결한 배설적인 쾌락을 주기에는 충분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외상적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만년-햇볕정책-실패론자들 혹은 만년-퍼주기-망국론자들은 지난날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들이 햇볕정책의 그것과 다름없는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이었으며, 보다 엄밀히 말해서 그동안의 대북정책 중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나아가 그동안의 소위 대북정책이란 자신이 낳은 실패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의 과정이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처해있는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쉽게 외면한다. 만일 햇볕정책의 실패가 있었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 이전에 우리는 닉슨 독트린을 통해 북한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 닉슨 행정부의 실패, 섣부른 평화선언을 발표하면서 남한 내의 친북좌경세력(?)과 북한의 테러리즘을 고무시킨 전두환과 박정희의 실패, 더 나아가 결정적으로 (위험천만한) 핵 발전소 지원 프로그램에 합의한 김영삼-클린턴의 실패에 대해서도 동일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요새 널리 행해지는 인터넷 개드립을 근본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인다면, 김대중 개새끼 해봐, 라는 농담은 결국 박정희 개새끼 해봐, 라는 농담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농담들을 단순히 자신의 절망감을 퇴행적으로 표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퇴행적인 분출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우리가 어떤 정치적 책임을 발견할 수 있느냐이다.
여기서 조금 더 정치적 공정성을 기하자면, 한국사회가 북한에 관해 표출하는 이러한 히스테릭한 증상의 배경에는 지난날 햇볕정책에 대한 다소간에 무분별한 환상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햇볕정책에 걸린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기서 소위 남한 내의 좌파들조차 지난 정권의 햇볕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 무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닌지에 관한 반성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제기되었던 ‘비판적 지지론’의 배경에 김대중-노무현의 대북노선에 대한 민족주의 좌파들의 호의적인 평가가 있었음을 기억해본다면(햇볕정책이란 좌파들에게 부르주아 정당과 연대할 근거를 마련해주는 일종의 ‘최소강령’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반성은 오늘날 결정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적 지지론이 혹은 햇볕정책 자체가 옳았냐 아니냐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에서야 드러난 것이지만,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는 곧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에 있어 남북한 양국의 국가관료들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즉 햇볕정책이라는 국가적/정책적 수단을 통해 ‘분단모순’을 완벽히 ‘관리’할 수 있다는 환상에,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6자회담에 거는 환상과 바로 동일한 그 환상에, 좌파들 자신이 굴복해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햇볕정책=친북좌파라는 공식을 즐겨 사용하는 저 냉소적인 멍청이들에게는 다소 안 된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햇볕정책이 노정하는 관료적 환상에 굴복한 이 시점부터 남한 내에서 (김무성이 ‘친북좌파’라는 말을 통해 의미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좌파 노선은 종언을 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저 악명 높은 민족주의 좌파 세력이 여전히 살아있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6개국을 통해 분단모순을 경영하든지, 2개국(남북한 당국)을 통해 경영하든, 어느 선택지이든지 똑같이 ‘기만적’이라는 것을 단언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분단상황의 돌파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인민’들의 결정권에 달려 있다는 노선을 단언했으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통일을 향한 지름길은, 저 햇볕정책 이데올로그들이 지향했던 것과 같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재화와 자본의 우선적 교류가 아니라, 남북한 운동단체들과 사회단체들 간의 민간교류를 지금-당장 개방하는 것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통일에 대한 어떤 미사여구들도 사실은 통일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놀랍게도 통일에 관한 정부 측의 수사는 박정희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통일에 대한 진정한 급진적인 지향은 바로 이러한 ‘내기’에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여전히 유의미한 정치적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통일에 대한 관료주의적 정책 수단 이외의 통일문제에 대한 민간 측의 ‘개입’을 ‘금지’한 두 정권, 국가보안법과 같은 억압적 수단들을 여전히 존속시킨 김대중-노무현 정권 역시 ‘반통일’ 정권에 불과했음을 단언했을 것이다. ‘진짜 민족주의’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3. 분단모순은 여전히 우회 불가능하다!

여기서 나는 불가피하게도 ‘분단모순’이라는, 오늘날에는 이미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저 고색창연한 용어를 다시금 꺼내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 스스로의 당혹스러움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불필요해 보이는 자전적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나 스스로 진보신당 당원이며, 강준만이나 진중권에 매료되었던 학창 시절을 보냈고, 소위 NL이나 민족주의 주사파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을 몸에 익히게 되었던 경험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매우 당혹스럽게도 나는 그 동안의 대북정책의 근본적 무력함에 대한 반성을 통해 오늘날 보수와 자유주의 세력 모두로부터 경멸당하는 민족주의 좌파 세력이 즐겨 사용하던 용어를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햇볕정책 이후 만연하게 된 대중적 환상과 정 반대로, 연평도 포격사태는 한반도의 분단모순이 오늘날 여전히 우회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저 입보수들과 더불어 인터넷 입진보들이 연평도 사태를 앞에 두고 ‘자제력’을 잃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무엇에 대해 자제력을 잃은 것인가? 이제는 과거로 흘려보낸 줄만 알았던 바로 저 ‘분단모순’의 우회 불가능성을 다시금 날것의 모습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력감에 대해서가 아닌가? 분단모순의 경영 능력에 관한 남북한 당사자와 주변 강대국들의 무능이 터져 나올 때마다, 이제는 남북한의 관계가 정상국가의 관계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숨 쉬며 안도했던 우리들에게, 지나간 유물로만 치부했던 과거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은가? 여기서 바로 ‘주체사상’에 대한 또 다른 악몽이 유령처럼 튀어나온다.
과거 주체사상이 남한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운동부문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그 핵심적인 아이디어, 분단모순은 조선민족 자신의 주체적 처분에 달려 있다는 김정일-황장엽의 아이디어에 있었다. 그것이 주체사상의 말하자면 ‘합리적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반공 이데올로기의 요점이 바로 이러한 주체사상에 대한 ‘절망’에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북한의 이론적 엘리트였던 황장엽 자신이 반공투사로 전향한 원인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절망’에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오늘날 반공주의가 여전히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다름 아닌 그 반공주의적 노선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전히 주체사상에 대해, 혹은 민족주의적 열정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이 결코 온전한 정치적 주체성을 노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 포지션이 내적으로 바로 그 유토피아적 ‘희망’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자, ‘희망’ 대한 반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징후’에 불과하며, 따라서 우리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정세 속에서도 결코 그 자체로 정합적인 사상으로서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반공주의는 여전히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단지 히스테리컬한 감정적 배설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있다. 문제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노선이 오늘날 상황에서는 존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북조선의 인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차단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북조선의 인민들은 북조선의 관료장치 이면에 근본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짜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반면 ‘가짜 문제’란 진중권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것과 같은 친북좌파와 종북좌파의 존재/비존재에 관한 저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시 한 번 재정식화되어야 한다. 정말 문제는 자유주의 논객들이 즐겨 표현하듯이 북한 인민들이 북한정권에 인질로 붙잡혀 있다는 것, 나아가 이에 따라 한국의 양심적 평화세력들(?) 역시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논변이 오늘날 진보진영 내에서 북한에 대한 원한감정을 낳는다) 남북간의 화해무드가 무르익었던 김대중 정권 당시의 저 좋았던(?) 시절을 추억해보자면, 예컨대 북한의 일상을 취재하던 영상매체나, 혹은 북한 사람들과 조우한 남한측 인사들의 표준적인 반응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대다수 북한사람들조차도 그 이면에서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동포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진부한 증언들. 그러한 휴머니즘적 동포애 속에서 우리는 통일에 대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오늘날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은 과거 햇볕정책을 지탱했던 이러한 휴머니즘적 환상들이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북한 인민들에 대해 가졌던, 즉 그들의 ‘인간성’ 내지는 ‘동포애’에 대해 가졌던 ‘상상적 동일시’ 자체가 처음부터 틀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가져야 하는 민족적 동일시(동질감)의 층위가 이데올로기적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얼굴이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견지하는 저 이데올로기적 신념 그 자체라면 어쩔 텐가? 즉 우리가 북한 동포들을 따뜻하게 ‘이해’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정말로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북한 인민들에 대해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바로 그 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아닌가? 여기서 바로 오늘날 새로운 ‘민족적 동일시’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이 제기된다. 후기-자본주의의 후근대적 사회 속에서 왜 다시 ‘민족’ 내지는 ‘민족적 동일시’를 거론해야 하는가? 오히려 연평도 사태는 우리가 왜 후근대적 환상 속에서 더 이상 ‘민족주의는 허구’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유사-탈민족주의 옹알이에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주체사상의 위대한(?) 합리적 핵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주체사상에 관해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 주체사상을 지지했던 운동가들의 근본적인 테제는 분단모순 하에서 남북관계는 결코 ‘정상국가’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민족’에 대한 강조는 바로 그러한 정세인식으로부터 연역된다. 이러한 정세인식 속에서 도출되는 ‘우리민족’에 관한 강조점은 따라서 언어와 풍경의 동질성에 대한 낭만주의적 매혹에서 나온 민족주의(독일 관념론 철학)라든가, 혈통과 대지에 뿌리박은 민족주의(파시즘)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저 반공주의자들이야말로 그런 파시즘적이고 낭만적인 의미에서의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다. 저들에게 있어 민족이라는 대의는 오히려 전쟁을 일으켜야만 하는 근본이유이다. 관건은 그러한 형태의 퇴행적인 형태의 민족적 관념에 대한 경계를 거두지 않고, 여전히 남북한 인민들에 관한 동일시의 지점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요청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청이 과거의 주체사상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주체사상이 추동했던 열정은, 분단모순 하에 처해 있는 남북한 인민 모두가 각자의 생존에 관해 서로에 대해 운명공동체로서 ‘묶여’ 있다는 강렬한 감수성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남북간의 민족적 동질성을 여전히 호명해야하는 것은, 그러한 요청이 어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남북한 인민 모두의 집단적 생존권에 대한 긴급한 요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주체사상’인가?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어쨌든 그것은 개인숭배의 산물에 불과한, 절대 용납 불가능한 전체주의적 사상이 아닌가? 이러한 진부한 반응들이 놓치는 첫째 문제는 ‘주체사상’ 자체가 이미 공식적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오늘날 남북한 모두에게 끝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남한의 ‘개인숭배’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점에 있다. 이것은 주체사상 자체가 선험적으로 사상적 층위 그 자체에서 거부될 이유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주체사상이 아니어도 좋다.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 단지 ‘괴물로’만 보이는, 최소한의 주체성도 상실된 채 이데올로기적 노예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저 북한 인민들에 대한 정확한 ‘동일시’를 재발명해 내는 것이다. 어떻게? 처음에 이데올로기적 관제동원 속에서 상실되었던 것처럼 보이는 바로 저들의 무기력한 ‘주체성’ 자체가 바로 저들의 자발적인 이데올로기적 동원능력에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즉 폭압적인 정권 하에 놓여 있는 저 북한인민들의 민중적 에토스 자체가 바로 자신의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충성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에는 그 자체로 어떤 ‘이상한’ 점도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북한 민중들의 기묘한 정치적 감수성에 관해 이해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도자들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바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주요한 산업적 수단들로부터 박탈된 그들의 처지 속에서 표현 가능한 ‘유일한’ 신념이자 정치적 주체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천재적인 표현대로, 우리는 정확히 북한과 북한 인민 전체의 행동방식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감정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새로운 민족주의적 동일시 속에서 수행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이다.

3. 북한문제와 감정교육

우리가 그 동안 북한에 관해 들어야 했던 상투어들 중 하나는 북한 인민들을 북한 정권과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을 분리시키는 것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명박과 진중권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권과 분리된 북한 인민들의 ‘본래의 모습’이 자유주의적-휴머니즘적 감수성에 기초한 우리 자신의 기대와 매우 다르다면 어쩔 것이냐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이러한 ‘차이’를 매개할 수 있는 것은 ‘민족’에 대한 감수성, 즉 김영하가 북한에 대한 ‘감정교육’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러한 북한 민중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없다면 북한 인민들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북한 전체를 희화화하는 인터넷 동영상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주체성이 전적으로 박탈된 표정 없는 좀비들, 전쟁으로부터 소모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인간부품들로 손쉽게 취급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사in에 정기적으로 연재되는 굽시니스트의 만화에서 자주 묘사되듯이, 헐벗고 무기력한 북한인민에 대한 진보진영의 따뜻한 연민은, 정확히 북한인민에 대한 극단적인 경멸과 ‘구분 불가능’하다. 즉 그러한 동일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이야말로 북한인민에 대한 연민과 경멸의 ‘동일한’ 원인이라는 근본적 역설을 지금의 진보진영이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하게 ‘이중적’인 방식으로 북한 민중을 타자화하는 가장 극명한 대중적 인터넷 용어들 중 하나는 ‘부카니스탄’이다. 이 용어에 걸린 애매함은, 바로 그 용어가 북한인민의 헐벗은 처지에 대한 공감과 동시에, 그들의 처지를 타자화하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북한 인민들이란 (저 철학적 용어로 정식화하자면) 윤리적으로 배려해야 할 절대적 ‘타자’인 동시에, ‘-스탄’으로 끝나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의 얼굴 없는 익명의 군상들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북한인민들의 주체성과 도덕적 행위능력에 대한 최소한의 인정조차 제거해 버린다. 적어도 ‘품성론’으로 무장되었던 옛 시절의 주사파들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미덕 중 하나는, 이런 이러한 퇴행적인 대중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얼마든지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 북한에 대해 적절한 감정교육을 받지 못한 저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그러한 반민중적 태도는 아직 ‘인간’이 덜 되었다는 증거이다! 우선 ‘인간’부터 되고 나서 북한에 대해 논하라!
북한의 인민에 대한 민족적 동일시, 혹은 민족적 감정교육의 필요성은 오늘날 북한에 대한 ‘분명한’ 태도의 표명을 요구받게 될 좌파들의 처지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미리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 모름지기 어떤 사상적 태도의 합리적 핵심과 그것이 함축하는 유해한 ‘독소’는 엄밀히 말해 ‘분리 불가능’하다. 목욕통에 담긴 아이를 버리지 않고 목욕물만을 버리는 것은 적어도 사상적 층위에서는 불가능하다. 북한민중의 처지에 대한 ‘민족적’ 공감은 북한의 체제 자체만이 아니라 북한에서의 김정일 부자의 ‘주권자’적 위치에 대한 인정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북한의 인민들이 지닌 정치적 주체성, 즉 민중적 에토스를 민족적 견지에서 ‘긍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김정일 체제가 정의롭다든가, 현재의 군사독재와 그들이 자행한 테러리즘이 용납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정권에 대한 지지를 조국에 대한 충성의 유일한 표현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북한인민들의 민중적 처지에 대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NL들의 담론적 전략은 전적으로 폐기처분될 수 없다. 즉 만일 그러할 경우에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즉 분단문제에 관해서 남북한 인민들이 ‘연대’할 수는, 물론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저 유토피아적 가능성 자체를 기회주의적인 이유로 완전히 포기하는 파국적 상황으로 스스로를 이끄는 것이다. 연평도 사건을 통해 파탄에 이른 남북관계가 정부와 기술관료들에게 있어 재앙이라면, 오늘날 남북관계에 관한 집단적 결정의 가능성이 봉쇄되는 것이야말로 남북한 인민 모두에게 더욱 더 근본적인 재앙이다. 분단모순에 관해 남북한 인민들이 ‘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 상황에서, 오히려 관건은 정확히 그러한 ‘불가능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아니 그것을 ‘상상’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데 있다. 오늘날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NL의 담론적 ‘유산’이란 정확히 바로 그러한 ‘상상력’을 발명해내고자 하는 긴급한 요청이다.
좌파적인 의미에서의 북한에 대한 ‘개입’은 북한인민들의 정치적 주체성과 저들의 행위능력 자체가 ‘김정일에 대한 충성’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한 인정을 추동하는 감정교육이 지난날 분단문학과 NL의 정치적 담론 속에서 수행되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그런 감정교육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발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좌파들과 탈북자 선교사들 간의 차이가 다시 한 번 식별될 것이다. 좌파들과 선교사들 모두에게 있어서, 북한인민들이 자신의 체제를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좌파들에게 있어 그러한 자유는 오직 ‘사회주의’ 안에서만 가능하다. 햇볕정책에 대한 환상이 붕괴한 이후, 분단 문제에 근본적으로 직면한 오늘날 좌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우리가 탈북자 선교사들 이상으로 북한에 더욱더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좌파들의 정치적 당파성이 다시 한 번 단언되어야 한다. 즉 북한 민중들에게 체제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자주적-집단적 결정을 반복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제스처는 모종의 ‘신념의 도약’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는 북한인민들이 김정일 정권에 대해 던지는 (암묵적 의미에서든 적극적인 의미에서든) 지지를 어떤 의미에서는 ‘긍정’해야만 한다는 ‘위험’을 초래한다. 그리고 우리가 단언해야할 것은, 햇볕정책이 종언을 고한 현재의 시국에서 그러한 ‘위험’이야말로 좌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감수할만하다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위기에 처한 대의를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정치적 행위의 모범적 사례에 관해서, 최근에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미발표 원고들이 어떤 실마리를 던져주지 않는가? 4.19 시국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은 김수영의 한 시의 제목은 "김일성만세"였다. 비공식적인 ‘괴담’에 따르면 이 원고의 한켠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휘갈겨져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만세다, 이 개새끼들아!’ 우리는 동일한 위대한 제스처를, 오늘날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더불어 북한인민에 대한 동정심을 고백하도록 강요받는 오늘날의 시국에 대해 던질 수 있다.

“김정일 만세다, 이 개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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