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는 게 힘들어진 유럽"
        2011년 01월 04일 09: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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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경, 아일랜드에서 경제위기가 오면서 IMF구제금융을 받아들일 무렵에 아일랜드를 방문한 적 있습니다. 수도인 더블린에서 정부청사들이 몰려있는 거리를 걷다가, 수상관저 앞에서 수십 명의 시위대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회보장제도 근간 흔들려

    이들과 잠시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위대의 지도자는 “IMF구제금융을 받아들인 오늘이 아일랜드가 80년 전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가장 수치스런 날”이라고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일랜드는 영국에게 빼앗긴 북아일랜드를 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경제위기가 온 상태이니 그것마저도 힘들게 돼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탄식조의 말은 이제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습니다. 살인적인 고물가와 저임금은 유럽연합의 기본정책으로 자리잡았고, 이제는 이전부터 유지돼오던 사회보장제도의 근간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유로가 등장하면서 잠시나마 흥청거렸던 유럽의 밤거리는 다시 차갑고 어두운 19세기의 밤거리로 되돌아가는 듯합니다. 언제나 새해 0시를 기해 휘황찬란하게 하늘을 수놓던 불꽃놀이도 올해는 중단돼버렸습니다.

    지난 해는 유럽이 경제위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기였습니다. 2010년 초에 그리스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는 아일랜드로 불똥이 튀었고, 이제는 어디로 불똥이 튈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다음 순서로 예견되고 있습니다만 사실 어느 나라가 될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이탈리아나 영국도 경제위기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위기를 맞은 그리스나 아일랜드는 IMF와 유럽연합의 기금으로 겨우 ‘모라토리움’사태를 벗어났지만 부채는 모두 민중들에게 잔인하게 떠넘겨진 상태입니다. 날마다 총파업과 시위로 얼룩진 나날을 보내는 아테네의 거리는 더 이상 이전의 평화스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리스 시위 모습. 

    영국 대학생 등록금 저지투쟁의 의미

    돈을 빌려주면서 IMF가 제시한 조건들은 대체로 유럽이 전통적으로 자랑해왔던 사회보장제도의 파괴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대량실업을 야기하는 동시에 정부에는 긴축재정을 요구함으로써 사회보장제도의 유지비용을 삭감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연금제도 등 사회보장제도는 경제위기라는 구실로 이렇게 힘없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12월 초, 영국의 런던시내에서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처절하게 벌였던 등록금인상 저지투쟁은 유럽의 사회보장제도의 위기를 단적으로 잘 표현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의 개별대학에서 벌이는 등록금인상 저지투쟁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영국이 그토록 자랑해왔던 “무덤에서 요람까지” 일생을 보장해주던 사회보장제도가 붕괴되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무상교육은 기회의 균등보장이라는 평등의 정신에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물론 왕가가 건재한 입헌군주제국가에서 평등이 실현된다는 것도 모순된 얘기지만, 그나마 노동계급의 짐을 덜어줬던 제도의 한 축이 무너진 것입니다.

    유럽의 단일통화 유로가 등장하면서 단일통화에 가입한 국가의 국민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선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10년도 채 가기 전에 단일통화에 위기가 온 것입니다. 지난 해 12월 말에는 유럽연합에 속한 국가 수장들이 브뤼셀에 모여 단일통화인 유로를 수호하겠다는 결의와 선언을 했지만, 단일통화에 대한 불신을 해소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위기의 피해자는 언제나 민중

    도리어 불필요한 의혹만 눈덩이처럼 커져버렸습니다. 가령 스페인 같이 큰 나라에서 2011년에 국가부도사태가 터진다면 유로의 운명은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울 전망이며, 유럽연합의 미래도 암울해질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유로나 유럽연합이 어떻게 되든 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위기상황으로 인해 수많은 민중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재정위기를 맞은 상태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날이면 날마다 복직을 위해 때로는 연금삭감에 항의해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아테네의 중심가에서 목숨을 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국가의 재정파탄은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그리스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한 정치인들은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의 정치행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거대 양당과 소수의 공산당과 좌파정당이 존재합니다. 권력도 거대 양당 사이에서만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길거리에서 과격하게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도 선거 때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관철시킬 자신들의 대표에게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 이익과 명예를 위해 출마한 사람들에게 표를 던집니다.

    이런 선거행태도 한국과 비슷합니다. 당연히 이런 정치인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익이나 장래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나 호주머니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스나 아일랜드가 망한 이유도 바로 이런 정치인들 때문이며 이런 정치인들을 뽑아준 노동자들과 시민들 때문입니다.

    "남북한, 지금 전쟁 중 아냐?"

    어쨌든 위기 상황이 오면 가장 크게 당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노동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 IMF사태가 왔을 때는 삶을 절망해 하루에도 수십 명씩이나 자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IMF사태를 초래한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 중에서는 누구도 자살한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IMF사태로 인해 삶이 어려워진 정치인이나 재벌총수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외국에 살면서 우리나라에 관해 좋은 얘기를 들으면 저절로 흥이 나고,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들뜨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 관해 안 좋은 소식이 전해질 때는 기가 죽고 자연히 말이 많아집니다. 우리 민족을 변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식이란 주로 북한과 관련된 소식입니다. 지금도 내게 “남한이 지금 쑥대밭이 된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연일 TV에서 방영하는 연평도 포격장면을 보고서는 지금도 북한과 남한이 전쟁중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해, 북아일랜드에 있을 때 연평도 포격사건을 들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들은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어떻게 전쟁이 났는데 외국으로 나왔느냐? 전쟁을 피해 도망해나왔느냐?”는 등의 가시돋힌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단지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이들로부터 농담거리가 된다는 사실에 조금은 불쾌했습니다. 연평도 포격사건은 세계인들에게 한반도정세가 대단히 불안정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진보진영, 북한문제 정면돌파해야

    이제는 싫든 좋든 진보진영에서도 북한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진보진영은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움츠러들면서 그나마 힘들게 쌓아왔던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에서 포탄이 날아올 때마다 남한에서는 반공우익집단이 만세를 부를 것이고, 미국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남한에 엄청난 양의 무기를 팔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려왔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은 그토록 증오하는 “철천지원수 미국”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 셈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Z>의 원작가 바실리 바실리코스를 만났을 때, 그가 지적했던 말은 지금도 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시작된 그리스 내전은 공식적으로 1949년에 종결되지만 좌우 분열과 대립은 1994년 그리스 사회당의 안정적인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지속됐다”는 그의 진단을 따르면, 그리스 사회에서 내적 갈등을 치유하는 데만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은 파괴된 자기 나라를 건설한다고 정신없이 일할 때, 그리스 민족은 서로 싸운다고 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역사적 결과물이 현재의 경제위기와 민중들의 지속적인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 민족이 겪었던 6.25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25전쟁은 그리스의 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면전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어나갔고 오랫동안 헐벗음과 굶주림을 안겨줬던 우리 민족에게는 개국이래 가장 큰 재앙이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우리민족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겨우 다른 나라들에 구걸하면서 목숨만 연명하는 노예민족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당연히 전쟁을 주장하는 자들은 남북한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완전히 제거돼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겨우 피난민 처리문제만 걱정할 것입니다. 올해는 노동자들이 기를 펴고 살고, 한반도에는 평화가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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