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라 코리아', 폭탄이 터지다
        2011년 01월 17일 12: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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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에 일어나 / 얼음을 끈다 /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정희성 시 ‘이 곳에 살기 위하여’ 중에서)

    국민승리 21이 결성되다 

    “정의를 꿈꾸는 이는 모두 달려오라.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작은 출발이 장차,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첫걸음으로 기록되리라는 것을 감히 선언한다.”

    97년 8월 18일 413명이 참가한 국민승리 21의 선언문 중 마지막 부분이다. 서로 각기 다른 조직에서 모인 이들은 국민후보 운동을 통해 21세기 국민적 대안세력으로 나갈 것을 선언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 각기 다른 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로 모였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그에 맞는 조직도 만들었다. ‘국민승리 21’이 그 이름이었다. 누구는 명칭부터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가 부른 ‘황국신민’에서 나왔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누구는 ‘민중승리 21 혹은 노동자 승리 21’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그대로 정해졌다. 지금 돌아보아도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승리 21은 당시 서로 다른 입장으로 적대시하고, 분열되어 진보운동을 하던 조직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시 하나로 뭉쳐서 만들어졌던 조직이었다. 갓 태어난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적 힘이 나뉘어 있었던 운동을 하나로 만든 셈이었다. 물론 그 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하나의 조직이라고 했지만 얼마 안 있어 한편에 속한 조직은 ‘계급성 부족과 선거과정의 문제’를 탓하며 국민승리 21을 떠났고, 다른 한편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는 김대중 지지를 노골적으로 선언하고 떠나기도 했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너희에게는 별 도움이 안되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어떤 조직들이 함께 했는지를 살펴보자. 그 조직적 흐름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조직들이 하나가 되다 

    92년 대선에서 민주대연합 방침에 따라 당시 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했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97년 2월 22일에 열린 6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민족민주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민주적인 정권교체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보면 권영길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후보운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저렇게 보면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한 상호모순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다가 6월 14일 ‘반신한국당, 민주개혁’을 위한 국민후보 추대운동을 결의함으로써 국민승리 21로 결합한다. 뒤에 말하겠지만 그 이후에 또 달라지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정치연합이라는, 당시까지 정당운동을 해 온 조직이 있었다. 노회찬, 주대환, 황광우 등이 포함된 이들은 민중당 이후 진보정치운동의 맥을 이어 온 세력이었다. 그 중에는 과거 내가 속했던 지하조직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꾸준히 진보정당 운동을 해 옴으로써 정치활동 경험과 인적 역량을들 많이 축적하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7월 6일 국민후보 방침을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3월 27일과 7월 27일 대의원대회를 열고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공동선거대책 기구 구성에 나서기로 결의한다. 민주노총은 대통령선거 참여 자체에 대해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대선논의는 정치세력화라는 장기 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전술적 지점에 불과하다.”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선거결과와 무관하게 진보정당 운동을 펴나갈 것을 밝혀 두기도 했다. 

    이 조직들이 모여 공동선거대책기구 구성을 결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7월 25일에는 마포구 도화동의 삼창플라자라는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하였고 각 조직이 파견한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대의원대회에서의 상근파견 원칙을 확인하고 각 조직에 파견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활동 초기에 단 3명의 상근자만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전문노련은 9월 2일 숭실대 사회봉사관에서 58차 중집위 회의를 열고 당시 조직쟁의국장이었던 나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노회찬 기획위위원장과 함께 기획국장으로 일하게 되고, 대학노련의 김은주, 그리고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김진억은 양경규 조직위원장과 함께 일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전국연합 등에서 나온 사람들로 채워야 했다. 당시 전문노련은 위원장 포함 총 상근자가 9명이었는데 연맹 위원장과 조직쟁의국장 2명을 파견한 셈이었다. 그만큼 전력을 기울인 것이다. 새삼 다시 얘기하자면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9월 1일 국민후보 추천위원회가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추대하고, 9월 4일에는 전국연합이, 9월 5일에는 민주노총이 이를 받음으로써, 9월 7일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가 공개적으로 발족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다. 이와는 약간 결이 다른 사람들이 또 있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하게 하지 않은 개량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8월 16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준)’라는 조직을 만든다.

    다양한 세력이 모여서 만든 조직으로 무엇보다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정치세력화를 추진한 조직이다. 이들은 “대선투쟁은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실현하는 투쟁의 공간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하자.” “노동자, 민중의 이해에 기반한 정강정책을 갖고 자본과 정권에 맞서 사퇴하지 않는 노동자, 민중후보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국민승리 21 발족식에 함께 하지 못했고, 선거를 불과 2달여 앞둔 10월 11일에야 합의문을 발표하고 대통령 선거에 함께 하게 된다. 

    이들이 함께 함으로써 명칭도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로 고치고 97년 10월 26일에야 정식으로 발족한다. 선거가 12월 18일이었으니까 불과 두 달도 채 안 남겨둔 시기였다. 그만큼 힘든 과정이었다는 것을 너희 세대가 이해할 수 있을까? 

    많은 문제들

    이렇게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국민승리 21’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탄생하고, 독자적인 후보 운동을 하게 된다. 87년과 92년에 전개되었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유령은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새로운 말로 나타나긴 했지만 적어도 노골적으로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을 지지하자는 세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총 안에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세력화에 대한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 “정치세력화에 대한 방향성에 문제가 있다”, “위원장의 공백이 가져 올 문제가 크다”라는 등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다. 물론 내심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 많은 토론이 있어야 했지만 그냥 만장일치의 결의로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승인하였다. 대신 그만큼의 실천은 따르지 않았다.

    대의원대회를 통해 결정한 “모든 인적 물적 역량을 대선투쟁에 총력으로 집중한다”는 결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각 조직별로 전현직 임원 및 간부 1인 이상의 상근자를 파견한다”는 결정을 모든 조직이 지킨 것도 아니었고, 25억원을 목표로 한 돈도 그만큼 모이지 않았다. 따라서 선거는 매우 어렵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서로 각기 다른 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것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다보니 참으로 어려웠다. 민주노총을 만들 때야 누구나 공감하는 ‘하나의 목표’가 분명했다. 따라서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승리 21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사안마다 지루하고, 날선 토론을 해야 했다. 

    너도 어렴풋이 알겠지만 목표와 지향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다. 그러고 보면 선거운동만으로 놓고 볼 때는 92년 백기완 선거운동이 더 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일어나라 코리아” 폭탄 터지다

    “어차피 치르는 선거이고, 선거 이후 진보정당을 만들기로 한 만큼 정당법에 따라 선거용 정당을 우선 등록하자”는 주장에 대한 찬반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른 직후에 선거 포스터 및 주요 슬로건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홍보위원회가 만든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주 슬로건이 문제가 되었다. 

       
      ▲논쟁을 폭발시킨 문제의 포스터. 

    한편에서는 첫 번째 표어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그에 이어 “일어나라! 노동자” “일어나라! 농민”등으로 후속 주체가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 표어 자체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노동자, 민중적 문제의식과는 많이 떨어진 것이라는 점 등을 강조했다.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전대미문의 외환위기에 빠져 들었으며 이로 인해 IMF를 불러들이게 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튼 그 문제는 커질 대로 커져서 도저히 봉합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렸다. 

    가장 곤란에 빠진 것은 민주노총이었다. 민주노총은 “일어나라! 노동자여!”라는 벽보와 현수막을 새로 만들어 현장에 내려보내고, 노동자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해서 선거운동원용 수첩, 선거 마스터 플랜 등 선거 전반에 대한 기획을 끝낸 나는 전국 버스투어를 제안했다.

    버스노조로부터 버스 한 대를 제공받았으며, 김영찬이라는 분을 기사로 파견해줬다. 후보가 차안에서 쉴 수 있게 의자 몇 개를 들어내고, 전국을 돌았다. 버스에는 자원을 한 활동가들과 민주노총 산하 연맹 위원장들이 번갈아 가며 탑승했다. 나는 그 버스의 조수였다. 운전사 옆에 의자를 두고, 운전기사가 졸지 않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 후보의 상태에 맞게 비서실과 이런저런 조정을 하기도 했다. 몇 가지 기억이 있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

    장면 1

    대통령 후보에게는 무장 경호요원이 배치되었다. 당선 가능성에 따라 달랐는 데 권영길 후보에게는 2명이 배정되었다. 버스에도 같이 타고 다녔다. 물론 권총을 가진 채. 

    “미안합니다.”
    “뭐가요?”
    “김대중 후보나 이회창 후보 경호를 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요.”

    사실 그랬다. 돈이 없는 우리는 기껏해야 여관방에 떼거리로 뭉쳐 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후보와 운전기사, 경호요원만은 별도로 방을 얻어주긴 했지만 먹는 것과 자는 것이 천양지차였을 것은 뻔했다.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적어도 대통령에 출마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임무라고 봅니다.”
    “다음 선거에서 다시 만나지요.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잘 해 드릴게요.”

    장면 2 

    정확하지는 않지만 울산유세를 끝내고 남해로 넘어갈 때 였던 것 같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는데 깜박 졸았던 것 같다. 창문에 나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형님! 지금 졸았죠?”

    깜짝 놀란 내가 기사에게 말했다.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깜박했던 거다. 그럴만도 했다. 보통 한 지역에 도착하면 새벽 1~2시가 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잠깐 자면 7시 정도부터 출근 인사, 시장방문, 간담회, 작업현장 순회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저녁에는 대중 강연회를 하고, 그게 끝나면 주요 인사들과의 간담회, 그 지역 선거운동본부와의 만남 등이 이어졌다. 간단한 술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여관으로 향하면 이미 몸은 파김치였다. 그것도 하루 종일 큰 소리로 유세를 해야 했다. 우리만이 아니라 운전기사도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는 이동 중에 토끼잠을 잤지만 종일 운전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형님, 피곤하면 꼭 말을 해요. 지금 여기서 교통사고로 몽창 죽으면 진보정당운동도 끝입니다요.”

    장면 3

    우리는 주로 노동자가 있는 현장을 중심으로 유세를 했다. 작업 중인 노동자들을 만나기도 했고, 민주적인 집행부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점심시간 등을 이용해서 야외 집회를 잡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겨울이었고, 몹시 추웠다. 가능하면 간단하게 해야 했는데 후보는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많을수록 신이 나서 어떤 때는 길어지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거야? 이번에는 꼭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데… 별 표도 없는 게 왜 나와서 난리야? 민주노총 위원장이면 다야?”

    마치 나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누가 말하는 거였다. 내 기억으로는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이었던 것 같다. 

    장면 4

    “근데 왜 자원봉사를 하려고 왔어요?”
    “진보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 전에는 뭐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국민승리 21에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온 황정아라는 후배를 면접하면서 오간 대화다. 어렸을 적 치약광고 모델도 했었다는 예쁘장한 여자가 도대체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아무런 보수도 없이 와서 일하겠다고 찾아 온 게 이상했다. 마침 같은 대학 후배라고 나보고 만나보라고 했다. 결국 기획위원회에서 함께 일했는 데 나중에 그 후배가 나에게 되물었다.

    “선배, 그 때 내가 프락치일지 모른다고 의심했었죠?”
    "….." 

    장면 5

    권영길 후보는 재정사업도 할 겸 후보 인지도를 높일 겸 책을 하나 출판했다. 당시 월간 [말]이라는 잡지 기자였던 김경환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우리는 이 책을 강매해서 선거자금을 만들었다. 『권영길과의 대화』가 제목이었다. 아마도 당시 그 책을 강매한 사람들과 혹은 강매당해서 책을 구입한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꽤 많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 선거운동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아마도 너희는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을 거다. 어느 도시, 예를 들어 춘천의 실내 체육관에서 유세가 있으면 우리 버스를 경찰차가 호위해주는 것은 물론 모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교통경찰들이 우리 차가 막히지 않게 가는 곳마다 차량 통행으로 바꾸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사람이 우쭐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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