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파업 다음 수순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2011년 01월 03일 12: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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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조기 아래서 대한민국이 태어나고 / 마흔 여섯해 그동안 대통령도 서너 개 생겨났다 없어졌다 / 하나는 제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 섬으로 쫒겨났다 / 하나는 제 심복의 총에 맞아 술잔에 코 박고 쓰러졌다 / 하나는 제 집에 살지 못하고 절간에 유배되었다… / 나 태어난 이 나라 금수강산에서 / 아름다운 추억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 나 죽어 이 땅에 묻히기 전에 / 존경하는 이름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 자본가들 헌금이나 미제 총구에서 나오는 그런 대통령이 아니라 / 산과 들에서 공장에서 조국의 하늘 아래서 /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대통령 하나.”(김남주 시 ‘대통령 하나’ 중에서) 

    정치세력화 시동을 걸다 

    투쟁이 끝나고 전문노련은 여러 가지 형태로 노동법 개정투쟁에 대해 평가를 하고, 이후 대안을 모색했다. 너희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지금도 노동조합은 각 계기마다 평가를 항상 한다. 너무 지리한 과정이어서 그렇지 잘만 하면 좋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투쟁 직후인 4월에 열린 가맹조합대표자들을 대상으로 이후 과제에 대한 물어보았다. 그 중에는 “정치세력화,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을 것 같은 데 왜 아무런 시도도 없는가?” “노동법 개정투쟁을 풀 수 있는 방법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판단된다면 독자후보가 나서서 우리의 표를 인식시켜야 한다. 설사 우리가 실패할지라도 노동계에서 감싸 안을 숙제라고 판단한다.”는 등 새로운 문제의식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97년 5월에는 조합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다. 노동법 개정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알아보고 12월 18일로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설문지는 4,500부를 뿌려 1,136부를 수거, 분석했다. 많은 한계가 있었으나 77% 정도는 “승패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승리”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통과된 노동법을 볼 때 결과적으로 패배했다”고 보는 사람은 23% 정도였다. 

    12월 18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도 물었다. “재야 시민단체 연대를 통한 범국민 독자후보”에는 36% 정도가, “여야를 막론하고 개혁정당과 정책연합”에는 40% 정도가 찬성하고 있었다. 김대중과 김종필이 손잡은 DJP 연합을 찍겠다는 사람은 16% 정도였고, 민주노총 및 재야 국민후보에는 43%가 찍겠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투쟁을 통해 기존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깊어지고 있었다. 

       
      ▲진보정당 전신인 국민승리21과 단독  대통령후보인 ‘국민후보’를 위한 선언자 대회.(97년 8월 18일) 

    총파업의 성과를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나는 95년 대전시 유성구 선거에 과학기술노조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1명의 광역의원, 3명의 시의회의원을 출마시켜 3명의 시의원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선거 직후 당시 월간지였던 [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어떤 여론조사든 항상 ‘지지할 만한 정당이 없다’는 대답이 수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막상 선거에 들어가면 ‘당을 찍자니 사람이 마음에 안 들고, 사람을 찍자니 당이 마음에 안 들지만’ 결국에는 누군가를 찍을 수밖에 없다. 이런 기형적인 정치풍토는 어디, 누구로부터 개선될 것인가?

    노동조합이 지나간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것인가, 아니면 이불 밑에서 자족어린 목소리로 ‘노동’과 ‘진보’를 외치고 있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노동조합의 이후 실천여하에 달려 있다. 한 때 공룡처럼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스스로의 한계에 빠져 멸종되었던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을 반복할 것인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현재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리곤 앞선 글에도 썼지만 96년 총선 당시 김천에 파견되어 이병무 당시 무역협회 위원장의 선거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전혀 교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3월 26일부터 연맹 CUG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인터넷이 그리 발전한 상태가 아니라서 40여명 정도만 글을 보는 소규모 공간이었다. 나는 대통령 선거에 민주노총이 독자적인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글이 길어 요약하는 바람에 너희들이 읽기엔 다소 딱딱하고 불친절하다. 

    “첫째, 총파업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이어받아 이번 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을 위한 토대를 건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노동조합의 확대․강화를 이루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민중운동의 구심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이전의 실패는 준비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 정치에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총파업을 통해 국민들 속에 만들어 진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긴 글이었으므로 다 옮기기는 힘들다.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을 경험하고, 몇 차례 선거에 참여한 이래로 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 건설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너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만 더 인용한다. 

    “….노동자가 이 사회의 주요한 구성원으로서, 이 사회의 주요 세력으로서 등장하는 것! 이것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누이 말한 정치세력화를 위한 모든 것일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독자적인 세력’,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독자적인 표’를 가지고 대응하자.

    또 이것이 단지 이번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보다 정확하게는 노동자 중심의 ‘정당’건설로 이어지는 계기를 형성하자…. 

    이번 총파업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는 전기로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임하자.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5년 이내에 현실의 장으로 끌어 내리자… 

    이번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이제 21세기에 접어들게 된다. 날로 보수화되는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물질적이고 향략적인 문화의 번성, 노동조합 활동의 서클 활동의 퇴색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개인주의화 등 커다란 변화의 와중에 우리는 위치하게 될 것이다….. 

    정치에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넘기면 지루한 ‘기다림’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조합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단정적으로 말하면 세 가지 뿐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마라’는 식의 태도, 가장 많이 해왔던 것처럼 우리가 가세하는 것을 꺼리는 보수야당에 이런저런 이유를 달고 합세하는 ‘기대기 전법’, 그리고 우리의 독자적인 ‘표’를 조직함으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 등 3가지 이외의 길은 없다. 

    현재와 같은 유리한 조건이 반드시 12월 18일까지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빨리 결심하고, 그것을 조직화해 나간다면, 만일 우리가 이번 총파업투쟁을 준비해 나갔던 것처럼 사력을 다해 교육하고, 선전하고, 조직해 나간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이번 총파업투쟁의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그중 하나는 아마도 ‘준비된 만큼 싸울 수 있다’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준비된 투쟁을 통한 자신감의 회복’일 것이다. 이번 총파업투쟁처럼 연맹과 민주노총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구속을 각오하고 투쟁을 한다면 그 미래가 여전히 불투명한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다. 그리고 결심할 때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결정 

    이와 별도로 총파업 투쟁이 끝난 직후인 97년 3월 14일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97년 1차 정치위원회를 개최하여 97년 정치사업 방침(안)을 수립하고 이를 3월 27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상정했다. 나는 96년초부터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기획팀에 참여하여 정치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업종회의에서 함께 일했던 전교조 해직교사인 최철호가 민주노총 정치기획위원을 맡고 있었고, 그와는 민주노동당 건설까지 계속 함께 일했다. 이후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 1번이 되고, 나는 2번이 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제출된 안은 이후 진행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의 최초의 기본방향이었던 셈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 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이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은 98년 지자체선거 대거 진출 → 98~99 정당 건설 → 2000년 국회 원내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화 사업을 힘차게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결정을 하긴 했지만 그만큼 결의가 뒷받침 된 것은 아니었다. 치열한 토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초로 대통령선거에 대한 대응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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