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악구 신사동, 구로구 첨단동?
    By mywank
        2011년 01월 01일 07: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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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동네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서 집과 동네를 중심으로 살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고, 다시 노년이 되면 귀소(歸巢)하듯 다수는 동네를 활동 근거지로 삼습니다.

    그래서인지 ‘동네’ 하면, 보통 아이들이 뛰어놀고, 나이 드신 분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연상됩니다. 젊은 이들은 그곳을 떠나 있죠. 적어도 낮에는. 물론 실제로 동네가 이렇게 정적인 곳만은 아닙니다.

    때론 재벌과 구멍가게 사이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현장도 되고,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벌이는 전쟁터가 되기도 하지요. 우리 동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손기영 기자의 동네사람들’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조세희의 소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도시 빈민인 ‘난장이’ 가족이 살던 동네 이름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물론 그곳은 낙원도 아니고, 그곳엔 행복도 없다. 모순된 현실을 아프도록 날카롭게 드러내주는 작명법이다. 

    그런데 이게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서울시의 대표적인 달동네 지역은 낙후된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강남구의 동네 이름과 같은 삼성동, 신사동을 새 이름을 고른 곳이 있다. 또 과거 구로공단 주변에 있던 지역은 ‘첨단동’(尖端洞)을 새로운 동네 이름의 후보작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동네 이름의 ‘강남화’,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 속 행복동과 2011년 삼성동·신사동

    하지만 한나라당 출신 구청장들이 추진한 동명 개정(변경) 사업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별다른 실효성이 없고, 혼란과 불편만 가중시킨 대표적인 ‘전시행정’으로 꼽히고 있다. 또 오는 2012년 1월 1일부터 동명과 지번 대신 도로명과 건물번호가 사용되는 ‘도로명 주소’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치구 예산을 들여 새롭게 바꾼 동네 이름은 쓸 일이 많지 않은 ‘애물단지’로 전락할 신세가 됐다.

       
      ▲지난달 22일 찾은 서울시 관악구 삼성동(옛 신림6동·10동)은 주민센터 등 관공서를 제외하고 동네에서 새 이름인 ‘삼성동’을 찾기 어려웠다 (사진=손기영 기자)

    서울시 관악구(구청장 유종필, 민주당)는 한나라당 김효겸 구청장 시절인 지난 2008년 9월 1일, 대표적인 달동네 지역이었던 신림동(신림본동~13동)·봉천동(봉천본동~11동)의 동네를 통·폐합하고 이름을 모두 바꿨다. 이중에 특히 기존 신림6동·10동 통합동의 새 이름인 ‘삼성동’(三聖洞)과 신림4동의 새 이름인 ‘신사동’(新士洞)은 강남구에 있는 동네 이름과 ‘한글 표기’가 같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08년 4~5월 관악구청 측은 동네 통·반장·주민자치위원장·유관단체(부녀회, 청년회 등) 대표자 등의 의견을 수렴해 새 동네 이름의 후보작들을 정했고, 이후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주민의견 조사)를 실시해 가장 많이 나온 이름 1개를 최종 결정했다. 당시 조사는 관악구 각 동장의 책임 하에 주민들에게 ‘의견 조사서’를 배부하고, 이를 수합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이어 관악구청 측은 같은 해 7월 관악구의회에서 동명 개정을 골자로 한 ‘서울시 관악구 행정기구 설치 조례 일부 개정조례안’(구청장 발의)을 통과시켰다.  

    강남구 따라하다 법적소송 굴욕 당해

    관악구청 자치행정과 측은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동네 이미지를 개선하고, 행정 편의적인 ‘숫자 나열식’ 동명 대신 지역 실정에 맞는 동명을 부여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구청 측은 또 "삼성동은 신림10동에 삼성산이 있어서, 신사동은 신림4동을 ‘신사’로 줄여 편하게 부르기 위한 이유가 있었다”며 새 동네 이름의 선정 사유를 설명했다. 당시 동명 개정을 통해 구청 측이 옛 봉천6동을 ‘행운동’(幸運洞)으로 바꾼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관악구는 동네 이름 변경 문제를 놓고 강남구에 법적 소송을 당하는 ‘굴욕적인’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강남구청 측은 관악구의 새 이름이 시행되기 직전이 지난 2008년 8월 "삼성동과 신사동의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며 관악구청을 상대로 법원에 ‘행정동 명칭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결국 관악구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 삼성동과 신사동 등 새 이름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 관악구 삼성동의 골목길 (사진=손기영 기자) 
       
      ▲신림6동·10동에서 삼성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동네에는 ‘신림 열쇠’, ‘신림 상회’ 등 옛 이름을 유지한 상점들이 많았다 (사진=손기영 기자) 

    지난 해 12월 22일 저녁 찾아간 서울시 관악구 지역은 동명 개정이 이뤄진 지 2년이 넘었지만, 상점 간판 등 동네 곳곳에서 ‘삼성동’과 ‘신사동’이라는 새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시촌이 밀집해 있는 삼성동 인근 관악구 ‘대학동’(大學洞·옛 신림9동) 역시 새 이름이 쓰인 곳이 거의 없는 등 주민들 속에서 새 이름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 지하철 2호선 신림역 부근에 있던 버스정류장 안내판에는 여전히 ‘신림4동 동사무소’라고 표기된 반면, 이곳에서 탑승한 버스의 안내방송에는 ‘신사동 주민센터’로 나오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다만 주민센터 등 동네 관공서에만 새롭게 바뀐 이름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삼성동 앞에 ‘관악구’ 붙여야 이해

    삼성동(옛 신림6동·10동) 주민들은 동명 개정 이후, 다른 지역에서 발송된 우편물이 강남구 삼성동으로 보내져 택배비를 더 물고 찾아오거나, 옛 신림본동부터 신림13동(14개 동네에서 11개로 통폐합)까지 모두 바뀐 동네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등의 애로사항을 겪고 있었다.

    또 ‘거대 재벌’ 삼성그룹을 연상케 하는 새 이름이 신림동과 어울리지 않다며 불만을 표시하거나, 삼성동 앞에 꼭 ‘관악구’를 붙여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알아듣는다며 불편함을 호소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다만 노후 주택이 많은 옛 신림6동과 달리 경제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아파트 밀집지역인 옛 신림10동 주민들은 새 이름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삼성동에서 만난 신선택 씨(62)는 이곳에서 40여 년째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동네 토박이 중  한명이었다. 그에게 바뀐 동네 이름 이야기를 꺼내자 “우편물이 엉뚱하게 강남구 삼성동으로 보내져, 택배비를 더 주고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옛날부터 삼성동하면 강남구에 있는 동네로 알지, 누가 관악구 삼성동을 떠올리겠느냐”며 답답해했다. 

       
      ▲서울시 관악구 삼성동과 신림동에서 만난 주민들. 왼쪽 상단부터 삼성동 양복점 사장 신석택 씨,  삼성동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최창욱 씨(좌)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60대 남성, 삼성동 시장 상인 차복순 씨, 신사 시장 상인(왼쪽 조끼 입은 이) 임정민 씨 (사진=손기영 기자) 

    동명 개정 과정에서 다수의 옛 신림6동 주민들은 ‘신림’이라는 이름을 남기고자, ‘원래 신림동’을 뜻하는 ‘원신림동’, ‘원신동’을 제안했지만, 옛 신림6동보다 인구가 많은 옛 신림10동 주민들의 제안이 채택돼 삼성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결정됐다고 신 씨 등 주민들은 전했다.

    ‘동네 토박이’들이 많은 옛 신림6동과 달리, 옛 신림10동은 아파트 밀집지역이며, 대부분 건물이 새롭게 지어진 이후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온 이들이 살고 있다. 신 씨는 “우리와 달리 신림동에 대한 향수가 별로 없는 아파트촌 사람들에게는 삼성동이 더 세련되고 멋져 보일 수 있을 것 아니냐”며 서운함을 나타냈다. 한편 새 이름의 선정 사유가 된 삼성산(三聖山)은 옛 신림10동에 위치하고 있다.

    신 씨의 양복점 옆에는 간판에 ‘소 허파 볶음, 뼈 없는 닭발’이라고만 적힌 가게 이름도 없는 식당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옛 신림6동(삼성동)에서 30여 년간 산 최창욱 씨(50)와 옛 신림7동인 ‘난향동(蘭香洞)’ 주민인 60대 남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건설 현장에서 ‘벽돌 쌓기’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였으며, 소주 한잔을 건네며 이들에게 동네 이름 이야기를 꺼내봤다.

    삼성그룹 연상되는 동네 이름

    최 씨는 “ 어느 잘나가는 재벌처럼 동네에 ‘별’이 세 개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구청에 있는 놈들이 어울리지 않는 동네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듣기 거북하다”며 불쾌한 반응이었다. 최 씨의 말이 끝나자 60대 남성 역시 “신림동이란 이름이 얼마나 구수하고 좋은데, 그동안 한나라당 놈들 할 게 없으니까, 멀쩡한 동네 이름이나 바꾸고 탁상공론을 해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옛 신림6동 시장에서 30여 년째 생선 가게를 하고 있는 차복순 씨(67)는 작은 연탄난로에 몸을 녹이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차 씨 역시 “동네에서 누굴 찾을 때 (그 사람의) 큰 아이 이름 불러야 알지, 막내 아이 이름 부르면 알아듣겠냐. 동네 사람들이 원래 이름인 신림6동이라고 하면 다 알아듣지만, 삼성동이라고 하면 어리둥절해 한다. 또 신림동의 새 이름들을 어떻게 다 외우겠느냐”며 불평했다.

       
      ▲동명 개정에 따라 ‘신사 시장’으로 이름을 바꾼 옛 신림4동 시장 (사진=손기영 기자) 

    삼성산 인근 식당에 동네 지인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이경숙 씨(57)는 “강남 따라가면 좋겠지만, 주민들이 잘 살게 하는 정책을 펴야지 이름만 바꿔놓으면 무슨 소용 있느냐”고 따졌고, 일행인 박옥주 씨(54)도 “다른 사람들이 어디 사는지 물어보면, 꼭 삼성동 앞에 ‘관악구’를 붙여야 알아듣는다. 왜 구청까지 나서서 창피를 주냐”고 하소연했다. 두 사람 모두 옛 신림10동 ‘주택가’에 거주하는 주민이다.

    반면 옛 신림10동 아파트 밀집지역을 찾아가자, 삼성동이란 새 이름에 대한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4년 전 옛 신림10동 ‘벽산 블루밍아파트’로 이사왔다고 밝힌 김 아무개 씨(43)는 “처음에는 왜 바꾸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같은 아파트 주민인 서 아무개 씨(58)도 “신림동 이미지가 좋지 않은데, 삼성동은 아무래도 낫지 않느냐. 세련된 것 같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옛 신림10동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주민이기도 한 ‘삼성공인중개사’의 김명자 대표는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동명 개정 조사 당시 옛 신림10동 아파트촌 엄마들 사이에서 신림동이 달동네 이미지가 나니까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동네 이름이 세련되게 바뀌면, 아무래도 집값이나 땅값이 예전보다 오르지 않겠느냐고 기대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택시 타면 강남구 신사동으로 직행

    ‘신사동’(新士洞)으로 이름을 바꾼 옛 신림4동에서도 동명 개정 이후, 택시를 탔지만 관악구 신사동이 아닌 강남구 신사동에 도착한 해프닝 등 주민들의 웃지 못할 사연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제법 규모가 컸던 ‘신사시장’(옛 신림4동 시장)이 있었으며, 상인들은 시장 이름이 ‘강남스럽게’ 바뀐 이후에도 장사가 잘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신사시장’에서 만난 상인 박 아무개 씨는 이곳에서 12년째 생선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술 먹고 택시타면서 신사동으로 가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재수 없게 택시가 강남구 신사동으로 간 적이 있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토로했다. 

    그는 또 “이미 강남구와 은평구에 신사동이 있는데, 왜 쪽팔리게 관악구에서 신사동을 만드느냐. 공무원들이 쓸 데 없이 이름을 바꾼 것 같다”며 “얼마 전 이곳 시장 이름이 신사시장으로 바뀌었지만, 장사가 안 되긴 마찬가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장 ‘진행청과’에서 일하던 임정민 씨(30)도 “상인들을 위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지, 이름이 바뀐 이후 달라진 게 뭐가 있느냐”며 불만을 털어놨다.

    아이들과 함께 시장 어묵 가게를 찾은 신사동 주민 서보경 씨(36)는 “좋은 이름들을 놔두고, 굳이 다른 곳에 있던 동네 이름을 따라 쓸 필요까지 있겠느냐. 강남구, 은평구 신사동 주민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보겠는가”라고 말했다. 한편 옛 관악구 대학동(옛 신림9동)에 있는 ‘신세계 공인중개사’ 측은 "동네 이름이 바뀌면서 신림동 지역의 집값, 땅값 등이 올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기도 했다.

    동네 이름 바뀌었지만 장사 그대로

    동명 개정 조사와 관련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사동의 ‘연세공인중계사’ 대표는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3년 전부터 옛 신림4동에 살고 있는데 당시 시장 상인이나 주민들 중 조사에 진지하게 응한 이들이 거의 없었다. 또 아예 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며 "대부분 생계가 바빠서 ‘하자는 대로 하자’는 식의 분위기였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시장 ‘진행청과’에서 일하는 임정민 씨도 “이곳 상인들이 장사하기도 바쁜데, 그것까지 어떻게 일일이 신경 쓸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달 30일에 찾은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은 중국 지명과 붉은색 한자로 된 간판들 속에, 가리봉동의 ‘흔적’이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진=손기영 기자)

    우여곡절 끝에 동네 이름을 바꾼 관악구와 달리, 오는 2015년까지 재개발이 계획된 가리봉동의 이름을 바꿀 예정인 서울시 구로구(구청장 이성, 민주당)의 경우 현재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과거 가리봉동은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벌집촌’(쪽방촌)을 비롯해 주변에는 구로공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는 중국교포 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차이나 타운’이 형성돼 있기도 하다.

    구로구청 측은 한나라당 출신 양대웅 구청장 시절인 지난 2007년 10월, "과거 구로공단의 회색 이미지와 낙후·영세한 지역이미지를 탈바꿈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공모전을 통해 ‘첨단동’(尖端洞)이라는 이름을 우수상으로 선정했으며, 가리봉동을 대체하는 유력한 새 이름 후보로 물망에 오른 바 있다.

    ‘첨단동’ 선정 후, 청담동 연상돼 철회

    하지만 이후 ‘첨단동’이라는 새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고 강남구에 있는 청담동이 연상된다는 등의 지적이 제기되면서 사실상 이를 사용하지 않기로 의견이 모아진 상태이다. 당시 구로구청에서 동명 개정사업을 담당했던 동작구청 주택과(지난 9월 이직) 정윤모 씨는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첨단 디지털 도시를 만들겠다는 구의 사업 이미지와 맞아 첨단동이라는 이름이 채택됐다”고 밝혔다.

    현재 구로구청 측은 “필요하면 추후 별도의 새 이름을 찾겠다”는 입장이어서, 동네 이름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도로 가리봉동 재개발 사업(재정비촉진사업)을 맡고 있는 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 측은 이곳에 들어서는 비즈니스센터 및 주상복합건물 단지를 ‘Korea Advanced & Innovation Valley’의 영문 첫 글자를 따와 ‘카이브(Kaiv) 시티’로 부르기로 결정한 바 있다.

    지난달 30일 저녁 찾아간 가리봉동에는 연길 호프, 상해 노래방 등 중국 지명과 붉은색 한자로 된 간판들 속에, 가리봉동의 ‘흔적’이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 옛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지하철 2호선 구로공단역은 ‘구로디지털단지역’, 지하철 1호선 가리봉역은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디지털 이미지’로 과거 이곳의 공단 이미지를 지워가고 있었다.

       
      ▲가리봉동 시장 주변에 있던 ‘가리봉 식품’ 간판 (사진=손기영 기자) 
       
      ▲ 가리봉동에는 중국식 이름들이 곳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진=손기영 기자)

    가리봉동 주민들 역시 동명 개정을 추진한 구청 측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가리봉동 시장 주변에서 수선 전문점을 25년째 운영하며 ‘동네 소식통’으로 통하는 이춘근 씨(57)는 “이제 동네에서 중국 이름이나 디지털·…. 그런 이름만 볼 수 있는 것 같다”며 “대한민국에서 가리봉동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없어지는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또 “이곳에 재개발이 된다면 우리 같은 세입자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다. ‘가라봉동의 발전을 위해 동네 이름을 바꾸겠다’는 식의 말은 한마디로 주민들을 내쫒겠다는 말이다. 이곳에 신식 건물·시설들이 들어서니까 촌스럽고 오래돼 보이는 동네 이름을 바꾸려는 것 같다”며 “‘첨단동’이 뽑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다. 이러다 동네 이름이 ‘디지털동’이 되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

    가리봉동 없어지는 건 말도 안돼

    34년째 가리봉동 시장 주변 ‘온양이불’에서 생계를 일궈온 김 아무개 씨(57)는 “사람이나 반려동물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정이 드는 것처럼, 가리봉동이라는 이름 역시 그동안 정이 들은 것 같다”며 “개발이나 발전 그런 게 이곳을 지켜온 동네 사람들의 추억까지 빼앗으려는 것 같다. 동네 이름 때문에 생활하는데 불편한 것도 없었는데, 가리봉동이라는 이름은 그대도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씨의 이불 가게 근처에 있던 ‘만과상회’의 사장인 조한수 씨(57)는 “구청에서 동네 이름을 바꾸는 것은 동네 사람들 위한 것보다,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 뒤 “앞으로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면 동네 이름이 예전처럼 별로 필요가 없어질 텐데, 앞으로 구청에서 굳이 가리봉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이날 현장에서 만난 일부 가리봉동 주민들은 동명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가리봉동 5거리 주변에서 동네 구멍가게인 ‘가리봉 식품’을 12년째 운영하고 있는 문 아무개 씨(47)는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 가리봉동에 산다고 하면 한 단계 낮게 본다”며 “옛날에는 구로공단 공순이, 요즘은 중국교포 살인 사건 등으로 뉴스에 나오는 동네인데, 이미지가 좋아지게 이름을 바꿔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동명 개정문제와 관련해, 이재근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팀장은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서울시의 ‘디자인사업’처럼, 자치구들의 동명 개정은 대표적인 전시행정이다. 동명 개정을 하려면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한데, 그 돈을 주민들을 위한 민생·복지 예산에 쓰는 게 맞다. 이름만 강남처럼 바꾼다고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주민들의 혼란과 불편만 가중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 * *

    다음은 2008년 바뀐 관악구 동네 이름들 (신림동과 봉천동 변경, 남현동은 유지)

    (1) 신림동 지역 : 신림본동 → 서원동 / 신림1동 → 신원동  / 신림2동 → 서림동 / 신림3동+신림13동 →난곡동 / 신림4동 → 신사동 / 신림5동 → 신림동 / 신림 6+신림10동 → 삼성동 / 신림7동 → 난향동 / 신림8동 → 조원동 / 신림9동 → 대학동 /  신림11+신림12동 → 미성동

    (2) 봉천동 지역 : 봉천본동+봉천9동 → 은천동 / 봉천1동 → 보라매동/ 봉천2동+봉천5동 → 성현동 / 봉천3동 →청림동/ 봉천4동+봉천8동 → 청룡동 / 봉천6동 → 행운동 / 봉천7동 → 낙성대동 / 봉천10동 → 중앙동 / 봉천11동 → 인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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