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못지 않게 광신과 위협 가득찬 남
    2010년 12월 31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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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련 말기에 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가다가 유대민족에 속하는 탓으로 상처를 받곤 했습니다. 물론 큰 것은 아니었으며 예컨대 재일조선인들 – 특히 조선적의 재일조선인들 – 이 겪어야 하는 구조화돼 있는 차별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사르트르 읽으면서 눈이 열리다

재일 조선인 같으면 (‘빨갱이 조선인들’을 백안시했던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일본 정부의 독단적 결정으로 국적을 박탈당해 졸지에 난민이 되고 말았고, 거기에다가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는 전후 일본에서는 비(非)가시화되고 주변화돼야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와 달리 유대인들은 분명히 소련 공민이었으며 특히 학계나 예술계 등에서는 결코 주변적인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단, 유대인이 많았던 구(舊)볼셰비키 그룹에 대한 스탈린파 반감의 유산이 있는데다가 냉전이라는 상황 하에서 적국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갈 권리를 가지는 유대인들을 국가적으로 신뢰할 수 없어 어느 정도의 활동 제약(예컨대 군 고위직 진출 제한 등)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죠.

거기에다 유대계라면 ‘잠재적 이민자/배신자’로 보는 인식이 민간 사이에서까지 퍼져, 가끔가다 상처를 받을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반유대주의란 도대체 어떤 괴물인지 왜 생기는지 상당히 궁금해왔는데, 마침 저의 고교 시절에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돼 그때까지 불어 해독자만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외국서적도서관에 가서 원본으로 빌릴 수 있었던 사르트르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단상> (1946)이 드디어 러역돼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제가 그걸 보고 개안 (開眼)을 경험한 것이죠.

사르트르에 의하면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들에게 증오가 필수 되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모든 문제들을 혐오집단의 책임으로 돌리면 세상이 덜 공포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예컨대 근대 자본주의의 확창 혹은 근대적 대도시 문화 등을 싫어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근대의 모든 불확실성과 문제점들을 ‘유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순간, 이 문제들이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유대인만 격리되거나 없어지면 문제도 없어지니까요.

신과 악마의 이분법

둘째, 유대인들이 혐오집단이 되는 순간, 그들을 혐오하는 비(非)유대인, 즉 ‘정상인’들은 본인들의 눈에 당장 선하게 보이고, 또 서로서로 계급이나 민족을 초월해서 혐력하는 가능성들까지 생기죠. 유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정상적이니까요.

그리고 셋째, ‘혐오집단’에 대한 증오가 이성을 초월하는 만큼, 그 증오에 매몰되는 이들은 이성을 벗어나도 된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주장의 확실성을 부단히 회의하지 않아도 되고, 본인들이나 상대방의 복합성 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그 어떤 성찰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는 착하고 저들이 나쁘다", 이는 중세 신학의 신과 악마의 이분법만큼이나 편한 논리죠. 계몽기의 사상가들이 이성을 인류의 해방 도구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 퇴락기의 상당 부분 인류는 오히려 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셈이지요. 참 슬픈 아이러니네요.

저는, 반유대주의란 결국 다른 방식의 자기확립이 불가능한 이들의 타자 배척을 통한 자기확립 시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정말 해방감을 느꼈어요. 소수에 속한다고 해서 더이상 자기혐오나 자기 부정에 빠질 일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도 그 일로 사르트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정도에요.

제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그 책을 쓴 사르트르에게야 당연히 유대인의 사례는 눈에 선했지만, 사실 그가 제시한 집단 배척 메카니즘의 논리는 꼭 유대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집단혐오의 매커니즘

지금 이스라엘의 주류 유대인 집단의 아랍인에 대한 타자화를 봐도 그 내재적 논리는 사르트르가 묘사한 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아요. 아랍인들이 후진적이고 호전적으로 인식돼야 이스라엘의 주류 유대인 집단은 선진적이고 "평화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방어만 하는 평화세력"으로 보이는 것이고, 만악의 근원을 ‘아랍 테러리즘’에서만 찾으니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각종 치명적 모순들(예컨대 아랍지역 출신 유대인에 대한 유럽 출산 유대인의 극악무도한 집단 이지메라든가, 극단적 양극화 등등)도 다 호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같으면,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던 집단혐오의 메카니즘은 요즘은 일차적으로 북한에 대해서 적용되는 것 같아요. 제2차 대전 이전의 유럽 우파들이 유대인을 ‘우리/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봤듯이, 북한은 남한이나 일본에 대한 ‘무시무시한 위협’으로 묘사돼요.

북한의 총국내생산(미화 약 260억 불)은, 대체로 세계 11위(즉, 브라질이나 인도와 같은 지역 패권 국가 수준)로 알려져 있는 남한 국방비 정도밖에 안되고, 거기에다 ‘큰형’ 미국과 실질적인 동맹국인 일본의 전투력과 국방비까지 가산하면 아예 그 어떤 비교도 불가능해질 터인데, ‘북한 위협론’은 한-일 양국 보수주의자들의 전가의 보도처럼 계속 애용되고 있지요.

게다가 북한은 꼭 국가 단위로만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도 아니죠.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하나의 커다란 ‘세계에 대한 음모’의 일부분들로 인식됐듯이 남한에서는 ‘친북, 종북 좌파’가, 일본에서는 조선적 재일 조선인, 그 중에서는 특히 조총련 활동가들이 각각 ‘내부의 적’으로 지목돼 전(全)사회적 이지메 대상이 되고 있어요.

각국의 유대인들이 서로 이해관계부터 완전히 다른데다가 그 사이에서 극우부터 극좌까지 정치의 모든 색깔들이 다 섞여 있듯이, 일본의 조총련계 교포나 한국의 좌파민족주의자들은 사실 대개 북한 지배자들과 처해 있는 입장도 생각도 상당히 다른 것이죠.

이성의 마비와 뜨거운 증오

그럼에도 자칭 ‘정상인’들에게 그들 모두 다 하나의 커다란 음모의 구성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단순히 위협으로 인식됐을 뿐만 아니고,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의 뜨거운 증오를 당해야 됐듯이, 한-일의 반북주의도 ‘상징적 폭력’의 극치를 달립니다.

북한 문제를 다루는 <조선일보> 기사들에 달려 있는 댓글들을 한 번 보시지요. 기사들이야 얌전하다 싶은 어투로 ‘위협, 김일성 왕조의 야욕, 평양 조정의 패륜’ 등등을 논하지만, 댓글에서는 "부셔버려야 할 사교집단", "처형당해야 할 개정일"에 대한 원초적 증오심밖에 거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럽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좋은 점 하나 없는 ‘사회의 암적 존재’, ‘병균’이었듯이, 북한을 광적으로 증오하는 이들에게 북한도 그저 ‘순수한 악’일 뿐입니다. 선임자에 의한 폭력이 거의 없는 북한 군 내부의 분위기가 남한보다 어쩌면 인격을 덜 파괴하는 점이라든가, 남한에서 지금쯤에 이루어질까 말까 하는 학교 체벌 폐지는 북한에서는 적어도 원론적 차원에서 일찌감치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그들에게 이야기해봐야 듣는 척하지도 않죠. ‘병균’들을 ‘살균’해야 할 뿐이지, 그들에게 배울 것이라고 하나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제게 "반유대주의는 모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반북주의는 – 적어도 남한에서는 – 원칙상 북한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한다"라는 반론이 제기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맞는 이야기에요. 남한에서는 민족이라는 이념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극우주의자들도 제거 대상인 북한 지도층과 흡수통일 이후에 최하급 비정규직 노동자나 비공식 부문 종사자로 전락해 세계로 도약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저임금 노동으로 뒷받침해줄 ‘일반주민’들을 구분하긴 하죠.

‘우리’의 노예가 될 후자에 대해서는, 대개 온정주의적, 시혜주의적 언사들이 많이 쓰이죠. ‘후진적’이고 ‘우민화’되고 ‘세뇌’ 당한 이들은, ‘선진화’되는 대한민국에 의해 ‘해방’돼야 한다는 것이죠. 60여년 전에 우리를 해방시켜준 은인 나라는 큰 형 미국이었지만, 이제 청출어람 격으로 미국만큼 위대해진 우리는 ‘불쌍한 북한 동포’에 대해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야 할 셈이죠. 승어사(勝於師)의 숭고한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불쌍한 동포의 전제

그런데 ‘불쌍한 동포’는 일단 그들이 개별적으로 ‘우리’의 손에 들어가 그들이 마땅히 들어가야 할 자리, 즉 최하급 도시빈민의 자리에 들어가고 나서, 혹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우리’에게 흡수되고 ‘착한 원주민’답게 ‘우리’로부터 개화의 세례를 받고 나서의 이야기죠.

그들이 그 ‘왕조’를 버리지 않고 남쪽으로부터의 ‘문명의 십자군’에 감히 저항을 계속 시도하는 한, 그저 멸시와 증오의 대상일 뿐이고 적당한 ‘응징의 목표물’로 보일 뿐입니다. 남한이 강경 응징할 경우에는 그 선진적인 포탄을 맞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나감으로써 무적 아군의 전과가 될 북한 일선 군인들이 다 일반주민의 아들딸들인데도, 남한 보수들은 그들에 대한 하등의 자비를 보이려 하지 않죠. 그들은 인간이기 전에 일차적으로 목표물일 뿐입니다.

‘광신적이고 위협적인’ 유대인을 짓밟음으로써 ‘문명적이고 평화로운’ 집단으로서의 (허위적) 자의식을 얻으려 했던 유럽 반유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후진적 북한 광신도’들을 열정적으로 짓밟는 ‘선진적 우리’는 타자에 대한 배척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치명적인 문제, 갈등들을 잊으려고 할 뿐이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안수기도를 통한 치료를 포함한 온갖 기적들이 가장 정기적으로 잘 일어나는 교회, 세계에서 최장의 노동시간, 그리고 OECD 가입국 중의 가장 규모 작은 복지예산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누가 봐도 이북 못지 않게 내지 이북 이상으로 광신과 각종 위협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단, 국가적으로 누굴 위협한다기보다는, 그 관할 영토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모든 빈민, 모든 약자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이지요.

반북 히스테리 속에서는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산재와 가정폭력이 제일 많은 나라의 현실은 잊혀지고 ‘후진적 그들’에 비해 ‘우리’는 아주 ‘선진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제 최첨단 대포, 미사일과 함께 증오와 망각의 기술로 중무장한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궁극적으로 행복해질까요? 이성이 마비될 때에 온갖 단꿈들을 다 꿀 수 있지만, 언젠가 깨어나야 할 순간은 결국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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