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보다 노동자들이 먼저 바뀌었다"
        2010년 12월 26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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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우면 크게 노래 불러야지 / 가슴 뜨거운 동지들과 만나던 밤의 노래를/ 이 땅에 살다가 불꽃으로 죽어간/ 동지들의 노래를..”(김영현 ‘싸움꾼의 노래’ 중에서)

    투쟁하지 않을 거면 나가라

    당시 전문노련은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은 노조에 대한 징계를 하기도 했다. 1월 28일 그동안 연맹 차원에서 시행해 온 총파업을 포함한 각종 사안에 대해 하나도 실행하지 않은 노조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여 경고 8개 노조, 정권 3개월 5개 노조, 제명 7개 노조로 안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표자회의에서 “사랑으로 감싸고, 오히려 더한 노력을 해야지 징계로 문제를 풀려고 해서는 안된다”라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 1월 30일 표결에 의해 7개 노조만 경고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너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노동조합의 연합체인 연맹에서 그렇게 하기는 매우 힘든 구조다. 

    “모든 노동자가 함께 하는 투쟁과정에서 어떤 노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파업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노조들은 단위노조의 사정을 들어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으나, 어느 노조를 막론하고 쉬운 노조는 없다.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노조들은 탄압을 받아가면서 조합원들을 투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 왔다. 

    동지들의 피눈물로 자신의 노조를 지키겠다는 생각을 버리자. 징계를 받는 노조들이 이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 조직보존 논리를 얘기하는 데 이런 투쟁에도 함께 하지 못할 노조를 보존해서 도대체 어디에 쓸 생각이냐? 징계를 받는 노조들은 투쟁하는 동지들의 발목을 잡아 노동자 전체의 삶을 해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양경규 당시 연맹 위원장의 말이다. 이 말은 화살이 되어 많은 노조의 투쟁을 부추겼다. 너희가 ‘빼빼로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나 역시 “우리 연맹이 가지는 원칙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르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연맹 가입을 재고하라”는 말을 신규가입 노조에게 말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활동이 받침이 되어 거의 모든 노조가 참여한 가운데 투쟁기금도 1억 2천만원 넘게 모을 수 있었고, 조합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2만통 넘게 발송하기도 했다. 당시 조합원이 불과 2만 5천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모든 힘을 모았던 투쟁이었다.

    안락한 가정의 문을 잠시 닫자

    당시 여섯 살이었던 은지 너는 오랜만에 집을 찾은 나에게 “아빠 회사는 왜 그렇게 일을 많이 시켜?”라고 묻기도 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96년 노동자대회에 한 번 데려 왔었는데, 그 이후에는 TV에서 시위하는 장면만 나오면 “아빠 나와?”하고 엄마한테 묻기도 했단다. 너만이 아니었다. 너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정민이 엄마인 당시 연맹 선전부장 조귀제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는 왜 안와요?’ 정민이가 잠지리에 들면서 보챈다.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서. 정민 아빠가 집에 못 들어온 지 나흘째다. 그런데 5살 정민이는 벌써 아빠가 그리운가 보다… 오늘 결혼식을 올린 권영길 위원장님의 따님도 지금쯤 결혼식장조차 올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가슴 아픔을 지닌 채 이 밤을 보내고 있으리라.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양경규 위원장님의 딸들(소영, 신영)도 혹시나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아빠의 흔적을 찾으려고 늦은 밤까지 화면 속으로 눈길을 던졌으리라… 투쟁의 강도를 높이지 않을 때 많은 노동자들의 가정은 저들의 탄압 속에서 짓밟히고 깨진다. 정리해고, 파견근로, 변형근로 등 진정한 가정의 행복을 앗아갈 수 있는 노예법을 없애는 그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편안하고 안락한 가정의 문을 잠시 닫아야 한다.”(96년 12월 29일) 

    지금은 진보신당 대변인인 심재옥은 당시 연맹 조직부장이었는데 집회에 나오도록 강요(?)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심재옥은 당시 경제사회단체 산하 노조를 담당했다. 그녀가 관할했던 관세무역개발원의 간부는 심부장의 압박을 조합원들에게 전했다.

    한 조합원은 “경총 앞 집회에 20명이 안 나오면 제명이 되고,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간부의 말에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집회에 갔다가 하필이면 최루탄이 바로 그들 부부 앞에 터져 고생을 했던 기억을 남기고 있다. 

    “정말 밉다. 연맹에서 짤린다고만 안 했어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나의 아내도 노동자의 아내이기에 힘들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런 기록들은 끝도 없이 많다. 그만큼 치열했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투쟁이었다. 건설기술연구원에는 “노동법은 법이 아니다. 노동법은 삶이다”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고, 누군가는 “노동법은 노동자를 지키는 법이어야지, 노동자가 지키는 법이어서는 안됩니다.”라는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명동성당에서 새해맞이를 하기도 하고, 드럼통에 지핀 불 하나를 가운데 놓고 밤 10시부터 불침번을 서던 여성 노동자들도 많았다. 

    노동자로서의 반성과 자각

    은지야. 아래의 생생한 글들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너희가 촛불을 통해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듯이 커다란 투쟁은 인간의 삶 전체를 바꾼다. 

    “그러나 나는 또 한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의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들에 대한 부처장들의 호통과 징계를 하겠다며 날아 온 경위서 제출 요구, 그리고 더욱 더 내 발목을 잡아 온 것은 그동안 노조활동에 열성을 보인 사람들에 대한 인사상의 불이익. 이러한 것들이 갈등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나는 나를 합리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래 어차피 이번 싸움은 회사하고 싸움이 아니라 정부와 노동자와 싸움이다. 이번 싸움에 나 하나의 참여가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번 싸움에 나의 희생을 각오하고 참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대세를 지켜보고 판단하자. 다음번 싸움에 참여하면 되지 않는가?’

    결국 나는 파업의 대열에서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갈등에 빠지고 말았다.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한 나의 양심이 힘들었고, 더욱 집회에 참여했던 조합원들에게 또 다시 경위서의 공세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후회한다. 나의 나약함을 탓해본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후회와 좌절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동법 개악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직도 내게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 노보에서)

    “일신상의 편안함, 뒷전에 빠져서도 실익을 챙길 수 있었던 대다수의 노동자들도 엄동설한 추운날씨에 언 손 후후 불어가며 개악 노동법을 무효화하기 위한 총투쟁에 가슴 뭉클한 진한 감동을 느꼈다.” (가스안전공사 노조 설현길) 

    “학창시절 제대로 시위 한 번 못했던 나로선 큰 무리의 엄청난 힘의 크기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벅찬 일체감과 단결의식이 집회 내내 느껴졌다. 아울러 그 느낌은 다음 집회 참석을 유도했고 주체의식을 갖게 했다.”(서은시스템 노조 오일숙) 

    “흩어진 모래알처럼 느껴졌던 노동자들이 뭉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역사적 총파업투쟁의 중심에 서 있다는 현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노동자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며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자랑스럽다.”(대림엔지니어링 노조 이문영)

    “역사적 투쟁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권력의 독재성향을 꺾는 쾌거로써 이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데 있어 일대 전환기가 될 것이다.”(전기안전공사 노조 이영원) 

    “노개투를 참여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정확한 의지와 결의도 없이 참여한 자신이 원망스럽다.”(이름 없는 노동자) 

    “노동악법 날치기 통과에 분개하였으나 우리의 힘이 이렇게 강력히 작용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따라서 뭉치고 함께 하고 하면 그리고 우리의 주장이 온전하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과기노조 김진영) 

    “재미있고 좋았다. 생산직만의 싸움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사무직들도 2단계 파업 후 힘차게 결합한 것이 좋았다. 특히 방송 4사의 결합은 인상적이었다.”(중소기업협동조합 노조 심충택) 

    “난 소시민의 작은 가슴으로 그저 나만 탈 없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 신념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에게 오늘 탈 없이 바라는 그 작은 걱정이 몇 년 뒤 그 사람들의 아들딸들이 직장에서 정리해고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중소기업진흥공단 노보에서) 

    “새해 복 받는 거 거부합시다. 파업 중이면 그것두 거부해야 하는 거 아님감? 좀 기달리다 03이 몰아내고 그 때 왕창 받아 봅시다. ”(과기노조 박근철) 

    “무소속 국회의원을 돈으로 삽시다. 그리고 나서….우리당을 만듭시다. 그리고 우리도 정치를 합시다. 당비도 내고….”(과기노조 박형기)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그 이후 노동조합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아니, 그 기억을 가지고 지금도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전국에서 4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소환장이 떨어지고, 손해배상 등이 청구되었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만큼 각성이 컸다. 월급쟁이로 살던 많은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을 너희가 글을 통해서나마 느꼈으면 좋겠다. 

       
      ▲97년 1월 1일 명동성당, 눈이 와도 꿈쩍하지 않았다.

    아쉬운 투쟁 마무리

    수많은 감동과 처절한 투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노동법은 개정되지 않고 투쟁은 끝났다. 개정된 노동법은 상급단체에 대한 복수노조 인정이라는 조항을 제외하면 날치기 노동악법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정리해고는 그 전까지는 “정당한 이유”만이 사유가 되었고, 따라서 많은 논란이 가능했지만 비록 2년의 유예기간은 두었지만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 등 4가지 규정을 둠으로서 이후 해고요건을 완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 되었다.

    퇴직금 중간정산이 도입되고, 다양한 노동시간 제도의 변화가 가능하도록 되었다. 복수노조 금지조항은 부분적으로만 개정되었고, 노동자의 정치활동금지 조항과 제3자 개입금지 조항도 형식적으로만 고쳐졌다. 2010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노조 전임자에 대해서도 비록 2001년까지 적용을 유예했지만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노조 전임자에게 급여를 주는 것을 금지하는 등 불씨를 남겨두었다. 

    누군가는 “죽 쒀서 개 줬다”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내용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투쟁으로 인해 각성된 노동자들이 성장했고, 연대가 강화되었고,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달라졌다. 

    “내가 지금 열심히 싸우면, 내 손녀가 태어날 때쯤엔 정말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이 제정되고, 일하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해도 최소한 이 다음에 내 딸에게서 ‘엄마는 그때 뭘 했길래 세상이 지금 이 모양이야’ 라는 소리는 정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난 싸울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총파업이 별 성과없이 마무리되는 것 같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분명히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노동자들의 힘으로 노동법을 개정하게 만들었고, 민주노총의 위상도 정립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성장했다. 

    우리 조합원들만 해도 총파업 이전에는 민주노총 위원장님이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뉴스나 신문을 볼 때마다 민주노총 기사를 먼저 찾아보고, 일간지 1면을 장식한 자본가들의 광고에 분노하고,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만하면 훌륭한 시작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한다. 조합원들에게서 발견하는 가능성을 희망으로 새기고, 때로는 그들에게 그 희망을 심어주면서. 총파업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투쟁은 이제 시작일 거라 믿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모두 함께 싸울 수 있기를 빌어본다. 사실 노동자들의 가장 큰 힘은 끝까지 싸운다는 것 뿐이니까.” (97년 3월 10일 제목 : 시작되는 투쟁을 위하여) 

    위 글은 여성이면서 사수대도 하고, 투쟁 기간 내내 최선의 모습을 보여 많은 사람들이 ‘미스 전문노련’이라고 불렸던 당시 조흥시스템노조 수석부위원장이었던 김영수 언니의 글이다. 너도 만난 적이 있는 키가 큰 언니다.

    그녀는 훗날 지금 진보정당 운동의 밑거름이 되는 CMS(Cash Management Service, 예금 계좌를 은행에 등록하면 이를 통해 자동으로 돈이 인출되는 제도)를 처음으로 프로그램화 한 사람이다. 아마도 현재까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성정하는 데에는 CMS 제도가 기여한 공로가 매우 클 것이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렇게 투쟁은 곳곳에 많은 사람들을 남기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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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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