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키리크스 거울을 통해본 전복된 세계
        2010년 12월 24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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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의 프란체스코(1182-1226)라는 위대한 성인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의미 있는 – 무속 언어로 표현하자면, 신탁에 해당되는 – 꿈들을 자주 꾸었던 그가 한번은 그의 도시 아시시를 꿈에서 거꾸로 봤다는 것입니다. 건물마다, 성벽의 탑마다 다 그대로이었지만, 오직 모든 게 거꾸로 보였을 뿐이고, 평상시에 무겁고 압도적이었던 석조건물들은 이제 아주 아주 가볍게, 날아가듯이 보였던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꿈

    프란체스코는 위대한 종교인이셨기에, 이를 물론 속세의 궁극적인 무의미함 차원에서 해석하신 것이죠.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그 다음’부터니까, 그렇게도 압도적으로 보이는 ‘여기’에서의 삶은 결국 하나의 매우 가벼운 서곡이라고 해석하신 셈이죠. 종교적 차원에서 풀이하자면 이게 맞는 해석이겠지만, 사회철학의 차원에서는 이 뛰어난 팔백년 이전의 꿈을 또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죠.

    우리는 대개 우리가 속하는 공동체를 ‘도덕적 공동체’라고 전제하고 세계를 인식하게 돼 있거든요. 우리가 속하는 공동체란 깡패의 소굴이라는 앎을 짊어지고 살기가 버거운 것도 그렇지만, 본인이 속하는 공동체를 일단 긍정하는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의 우리에게 길러진 습관인지도 모르죠.

    어린 아이는 대개 엄마를 무조건 긍정하고, 엄마를 큰 우주로 자신을 작은 우주로 각각 파악하고, 엄마에 대한 그 어떤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지도 못하고, 하려 하지도 않는 것이니까요. 엄마는 꼬마의 절대선이죠.

    거기까지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는 커서도 어머니와 같은 의미축에 속하는 ‘모국’ 등에 대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돼 있는 것은 정말 큰 문제에요. ‘나’의 공동체, 나의 문화, 나의 나라라면 일단 선하다고 전제하고 들어가죠. 그리하여 내가 속하는 모든 공동체들을 ‘거꾸로’ 한 번 보는 것은, 유치한 ‘소속집단의 무조건적 긍정심리’를 벗어나게 하는 묘약이라 하겠어요. 제게 있어서는, ‘익숙해진 것들을 낯설게 보는’ 것이야말로 프란체스코 성인의 그 위대한 꿈의 의미에요.

    그러한 면에서는, 이번 위키리크스 사태는 우리에게 귀중한 성숙의 기회를 안겨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산지씨가 어떤 인간이든 간에,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 덕택에 세계촌을 한 번 거꾸로 본 셈입니다.

    모국에 대한 순진한 발상

    그 소감은 어떤가요? 우리가 우리들의 모든 ‘모국, 모체’들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들이 아주 순진한 발상으로 판명되고 만 것이죠. 예를 들어서 절대 다수의 노르웨이 사람들이 노르웨이를 이 세계의 가장 도덕적 국가로 인식합니다. 아니, 국민총생산의 1%나 제3세계에 ‘인도적 지원 및 개발’ 예산으로 주는 나라인데 그 도덕성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뭐, 1960년대 초반의 중국은 대외지원 예산으로는 국민총생산의 5~6%를 주었는데, 그 사실을 중국사를 공부한 노르웨이인들도 잘 모르죠. 알아도, ‘전체주의자 모택동’이 어차피 도덕적일 수 없다고, 대부분이 생각하겠지요.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전체주의자가 그저 그 본질상 선할 수 없으니까요. 선한 우리들과 본질상 다르니까요. 뭐, 그 ‘국민총생산 1% 지원 예산’의 약 삼분의 일이 사실 노르웨이 회사들에게 수주로 돌아간다는 사실, 즉 노르웨이 국가가 그저 그 자본을 살찌우고 그 NGO들에게 할 일을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기에서도 드물죠. 안다 해도 자국의 도덕성을 전혀 의심 못합니다. 우리가 세계 제일의 도덕적 백성인데, 수주를 좀 하면 어때요?

    그러면, 위키리크스가 전해준 노르웨이의 ‘거꾸로 본’ 모습, 즉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2006년, 주노르웨이 미국 대사를 만난 노르웨이의 노동당(사민주의적 정당) 출신의 외무부장관 요나스 갈 스터레는 관타나모라는 무법 수용소의 폐쇄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게 노르웨이의 소망 사항이 아니라고 강조까지 했다는 게 우리가 이제 안 진실에요.

    노동당과 함께 연립내각을 꾸리고 있었던 사회주의좌파당과 국제사면위원회가 관타나모라는 커다란 고문실의 폐쇄를 요구했음에도, 노르웨이 사회는 이 문제로 여론이 비등했음에도, 우파 사민주의자인 외무부장관은 나 몰라라 하고 미국 측과의 ‘친선’ 다지기에 주력했던 것이죠.

    진실로의 여행을 떠날 자들은?

    참, 이 부분은 과연 노르웨이 대기업인 아케르 괘르네르가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공사 수주를 받은 것과 무관했다고만 여겨야 할까요? 그리고 아케르 괘르네르의 대주주와 주요 임원들, 그리고 우파 사민주의 지도자들은 서로 전혀 정치적, 그리고 인간적 관계가 없다는 것인가요?

    이렇게 위키리크스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논리적 사고를 펼친다면 우리는 노르웨이라는 사민주의적 국가의 실체를 약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노르웨이의 선량한 국민들 중에서 이 위험한 진실로의 여행을 하려고 하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라는 부분이죠. 어쨌든 눈이 있는 이는 보게 될 것이니, 이번의 개안은 앞으로 우파 사민주의의 한계에 대한 보다 큰 자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야겠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들여다보는 ‘모험’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한반도에 관계되는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중국의 젊은 지도자들이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이권을 나누어주면 찬성할 것이므로 북한정권이 붕괴되면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한민국 관료들의 모습을 직시해주시기를.

    북한에 대한 이 사람들의 태도를, ‘제국주의’와 ‘침략주의’ 이외에 과연 어떤 용어로 묘사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자들의 바람대로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영토와 인구가 남한에 흡수되면 남한 사회에서의 북한 주민들의 처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요?

    ‘큰형’ 미국이 언제나 뒤를 봐주겠다고 믿고 사는 벼락부자의 오만 말고는, 이 남한 관료들의 태도를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우리는 지금도 대개 우리 아닌 북한을 ‘도발자’로 보지 않습니까? 한번 위키리크스 자료를 참고하면서 거꾸로 봐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여간, 우리는 위키리크스 덕분에 이 세계에 대한 ‘위험한 진실’의 몇 개의 편린을 흠쳐보게 된 셈입니다. 우리는 위키리크스라는 거울을 통해 한 번 우리 세계촌을 거꾸로 본 뒤로는 우리의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인지, 바로 그 다음의 가장 중요한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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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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