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6시 전국총파업, 나라 뒤흔들다"
        2010년 12월 22일 1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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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는 법을 배워야지 / 쉽게 타협하지 않고 /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말하고 / 독초처럼 퍼렇게, 여우같이 / 독사와 같이 가시나무 같이 살아 / 이기는 법을 배워야지….” (김영현 ‘싸움꾼의 노래’ 중에서)

    노동교육이 없는 나라

    언젠가 KTX 집회에서 “아무도 학교에서 우리가 졸업하고 나가서 일할 사회가 이런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비정규직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라고 절규하는 조합원을 본적이 있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항의로 들었다.

    KTX 비정규직 언니들 알지? 은지 네가 중학교 3학년 땐가 오미선 지부장이 너희들에게 비정규직에 대한 특강도 했었다. 96년 말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노동법 개정 투쟁을 말하기에 앞서 ‘노동’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자. 

    사실 우리나라는 노동문제에 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하종강이라는 분의 강의록을 보면 독일에서는 중등사회과목 340쪽 분량 중 93쪽을 노동교육에 할애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모의 노사교섭’이 교육으로 잡혀 있다고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가르친다고도 한다.

    이탈리아 어느 버스회사 노동자들이 3년 동안 500번이나 파업을 했는데 시민들에게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그들도 파업을 할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불편하다고 불만이나 늘어놓으면 나중에 내가 파업할 때 누가 나의 권리를 이해해 주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기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비난하면, 지금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우리 시민들의 권리까지 빼앗게 되는 것을 왜 모릅니까? 노동자 권리부터 지켜야 시민들의 권리도 지켜진다는 것을 왜 모릅니까?”라는 그들의 시민의식과 파업만 하면 “시민을 볼모로 자기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려 한다.”는 비난에 휩싸이는 우리와는 너무 많이 다르다. 그만큼 우리가 가야할 길이 멀다. 

    노동법을 둘러싼 공방 

    노동법이라는 게 있다. 자본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동자들을 지켜주기 위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다. 물론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오랜 투쟁의 결과로 확보한 것이다.

    자본과 권력은 호시탐탐 이 법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하든가 아예 없애려고 한다. 군사정권만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그랬다. 지금은 더 심하다. 2009년 노동부 산하 국책연구원인 노동연구원장이었던 박기성이라는 자는 “헌법에서 노동3권을 빼야 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는 온갖 나쁜 짓을 다하다가 결국 쫓겨났다. 

    전두환은 1980년 12월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만들고, 기업별 단위노조를 강제하는 등 노동법을 개악했었다. 물론 87년 투쟁으로 부분적으로 고쳐졌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인 1988년부터 노동법개정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었다. 그리고 96년이 다가왔다.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금지 삭제,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보장,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삭제, 제3자개입금지 및 정치활동금지 조항 폐지” 등과 “주40시간 노동제 확립,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반대, 경영상 해고의 요건과 절차 신설, 근로자파견법 도입 반대” 등을 주요 요구로 하며 노동법을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법이 안고 있는 많은 독소조항을 없애려는 노력이었다. 마침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대통령도 노동법을 개정하려 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투쟁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김영삼 정부가 만든 노사관계위원회에 들어가는 게 맞냐, 아니냐?” “원래 12월 13일로 정한 파업을 했어야 한다, 아니다 전술적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투쟁 동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매일 파업이 아닌 매주 수요일 파업으로 전환한 것이 맞다, 틀리다” 등등. 이와 관련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 위원장은 13일 파업을 불과 30분 앞두고 총파업을 유보하면서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저의 이같은 판단과 결정에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비판적인 견해와 시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비판 또는 지지와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노총에 대한 애정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이 어떤 개인이 아니라 1천 2백만 노동자의 대의와 희망으로 굳건하게 서 있을 때만이 권력과 자본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내린 파업 유보 결정을 ‘싸움을 완전히 접어 둔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에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투쟁의 시점이 재배치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너희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얘기니까 빼자. 당시 나는 전문노련의 조직쟁의국장이었고, 연맹 위원장이었던 양경규 위원장이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하기도 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흐름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투쟁 이후에 연맹 차원에서 두 권짜리로 된 노동법투쟁자료집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13일 파업 투쟁을 불과 며칠 앞두고 11일에 쓴 글이 하나 남아 있다. 

    “피할 수 없는 투쟁이라 판단됩니다. 죽음이라는 잔이 자신을 비껴가기를 그렇게 바랬으면서도 결국은 십자가에 매달렸던 인간 예수처럼, 뻔히 알면서도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언론은 14일이 되면 첫 기사로 이렇게 쓸지도 모릅니다. ‘민주노총 총파업 불발!’ 이전부터 계속 해 온 작태이기도 합니다. 민주노총 산하전체 노조가 한꺼번에 총파업에 돌입하지 못하는 현실을 부풀리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 연맹이 처한 조건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투쟁이 한 점 불씨가 되어 전체 노동자가 분발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지금은 서로를 감싸고, 최선을 다해 전체가 하나 될 수 있도록 투쟁을 조직할 때 입니다." 아마도 당시 모두가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연말연시를 틈탄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애초 문제가 있는 조항을 바꾸기 위해 노동법 개정을 요구했지만 현실은 거꾸로 흘러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법을 문민정부에 맞게 고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최악으로 개악된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날치기로.

    1996년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새벽 6시, 신한국당은(민자당이 이름을 바꾼 것이고 지금의 한나라당이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동이 트기도 전인 오전 6시, 마치 도둑놈들처럼 몰래 버스를 동원해 영등포에 집결한 신한국당 의원 154명은 단체로 국회본회의장으로 이동하여 단 7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거기에는 노동운동을 했다고 명동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던 김문수 현재 경기도 지사도 있었다. 항의엽서 보내기 운동을 하기도 했는 데 이런 내용도 있었다. 

    "김 : 김문수 의원 정신차리쇼! 문 : 문민정부라고 다를 게 하나 없다. 수 : 수치스러우면 노동법 하루빨리 철폐하라." 

    "12월 26일 그 새벽에 국회에 나가 ‘기립’하시느라고 참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앉으려 하니 엉덩이가 아프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당신 자신의 ‘양심의 칼날’에 푹 찔리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병들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낫지 않고 점점 썩어지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김영삼은 노동자들이 방심하고 있었고, 연말연초라서 투쟁을 하기 어려운 조건을 이용한 치사한 짓을 벌인 셈이었다. 1년 가까이 노동자와 학자들, 그리고 사용자와 정부가 만나서 논의한 내용을 무시하고 자본의 입맛에 맞는 노동법으로 완전 개악한 내용이었다.

    12월 26일, 새벽 6시, 날치기와 총파업 

    당시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연맹 위원장들은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12월 13일의 파업을 유보한 대신 12월 16일부터 머리를 삭발한 채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민주노총 지도부는 새벽 6시 즉각 총파업을 선언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전국의 50만 조합원 여러분! 다시한번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즉각 자리를 박차고 일어섭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작업장을 지킴은 역사를 거스르는 노동악법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일손을 놓고 거리로, 거리로 나갑시다.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온 국민에 알려나갑시다. 동지여러분! 역사는 우리, 노동자의 편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큰 투쟁이 되리라 예상 못했던 노동자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 날을 시작으로 해를 넘겨 97년 3월 10일 국회에서 여여합의로 다시 노동법을 만들 때까지 한 겨울 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주노총을 만든 지 불과 1년도 안된 시기에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노동자의 투쟁의 횃불이 올랐던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 삭발 모습, 나는 허영구 부위원장(맨 왼쪽)의 머리를 깎고 있다. 오른쪽으로 권영길, 배석범, 단병호. 불과 열흘뒤 나도 삭발을 했다.

    투쟁의 성지로 변한 명동성당 

    날치기 소식을 들은 모두가 명동성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정오에 열린 집회에는 모두 4천여명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기아 자동차 조합원 2,500명이 파업대오를 이끌고 성당으로 온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비록 전부 합해 700여명밖에 안되었지만 내가 속한 전문노련에서도 유신코퍼레이션, 대림엔지니어링, 생산성본부 등 작은 사무전문직 사업장에서도 조합원을 이끌고 명동성당에 모였다. 

    전문노련은 중앙집행위원회 성원 전체가 삭발을 했다. 물론 나도 삭발을 했다. 머리를 깎으니 겨울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작된 파업투쟁에는 26일 90개 노조 142,958명, 27일 163개 노조 206,220명, 30일까지는 190개 노조 234,126명이 참가한다. 당시 민주노총에는 929개 노조 496,908명이 가입해 있었으니 전체 조합원의 47%가 참가한 셈이었다. 이후 투쟁에 참가한 조합원은 80% 가까이 증가한다.

    전문노련도 97년 1월 15일 파업에는 전체 조합원 25,860명 중에서 23,108명이 참여한다. 누계로 따지자면 75일이 넘는 투쟁 동안 총 3,422개 노조 338만명이 투쟁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민주노총 산하 모든 노동자가 전국에서 “김영삼이 날치기면 노동자는 박치기다”, "쉴 때는 쉬고 학실하게(?) 투쟁하자" 등등의 새로운 구호를 만들면서 투쟁에 참가한 셈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사무직과 생산직을 넘어선 만남, 한겨울 매서운 추위와 맞서 지도부를 지키는 사수대(死守隊)가 되어 밤잠도 못자고 경찰의 침탈에 대비하던 기억, 최루탄을 쏘며 사람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선 투쟁 등등에 대한 기억을 그 많은 노동자들이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머리가 터져나가고 연행된 수백명의 무명의 용사들이 있음을 기억해 두자. 누차에 걸쳐 말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역사는 영웅을 만들고, 그 영웅을 세상이 기억하지만 그런 영웅을 만드는 것은 곳곳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적인 투쟁이다. 

    "가장 부끄러웠던 것은 우리가 사무직 노동자라는 것, 우유부단한 사무직 노동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사분란한 대오를 형성하고 치열하게 파업투쟁에 나서는 생산직 노동자의 행동과 결속을 보면서, 사무직 노동자들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자기 자신보다는 동료들을 먼저 챙기는 동지애를 보면서, 약간은 이기적이고 우리보다는 나를 생각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태도를 반성했습니다." (조흥시스템 노동조합, 97년 1월 7일) 

    커다란 투쟁은 수많은 자각을 남긴다. 그리고 그 자각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거름이 된다. 3.1운동이 그랬고, 광주가 그랬다. 그런 생각은 이런 글을 CUG에 남길 수 있었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노동자가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크게 남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믿음, 역사가 그래도 진보를 향해 나간다는 믿음, 우리 노동자들의 단결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절로 생기는군요.

    투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고 나중에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위에서 얘기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가는 투쟁에 의해 서로 간의 차이, 조직 간의 이견, 갓 태어난 민주노총 내의 불협화음 등은 쓰레기처럼 쓸려가는군요.”(97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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