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취소멸과 공동부유
        2010년 12월 21일 05: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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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착취소멸과 공동부유
    -사회주의 본질의 주체가치목적상의 구현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개괄은 단순히 생산력 해방과 생산력 발전 뿐만 아니라, 연이어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분화를 해소하여, 최종적으로 공동부유를 달성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필히 이 두 측면을 연관시켜 통일적으로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제일 측면의 개괄(즉 생산력 해방과 발전)이, 하나의 사회경제 형태로서의 사회주의를 그 운동발전의 법칙과 객관 요구의 측면에 역점을 두고 사회주의 본질을 밝힌 거라고 한다면,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관한 두 번째 측면의 개괄(착취 소멸과 공동부유)은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이 추구하는 숭고한 사회적 ‘이상(理想)’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를, 그 역사 활동 주체가 추구하는 "가치목표와 최종적인 목적"의 각도에서 사회주의 본질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본질의 두 번째 측면

    유물사관은 사회형태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自然史)적 과정의 일부로 간주하는 동시에, 또한 역사는 인간이 창조하는 것임을 함께 강조하며, 역사 활동의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해가는 능동적인 과정으로 본다.

    개괄하자면, 어떠한 사회의 발전도 ‘합법칙적 과정’이면서 또한 ‘합목적적 과정’이며 양자의 통일이다.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은 역사발전의 합목적성을 부정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역사발전의 합목적성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데, 왜냐하면 만약 그것의 작용이 없다면 역사발전의 객관법칙은 저절로 실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점이 인간사회의 운동이 자연계의 운동과 다른 특징이다.

    사회주의 운동발전은 사회주의 실천주체의 활동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의 실천주체는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이다. 인민대중은 사회주의 실천주체이자, 또한 역사 활동의 이익주체이고 가치주체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사회주의의 발전은 인민대중의 자신이익과 자신해방을 위한 분투의 과정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객관적 본질, 즉 발전목표상에 있어 다른 사회형태와 질적 차별을 갖는 규정성을 지니고 있다. 등소평이 여기서 밝힌 것은 바로 이 측면의 본질이다.

    등소평은 1986년 미국 기자를 접견할 때 일찍이 간결하고 명료한 말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사회주의원칙은, 첫째가 생산력 발전이고, 둘째가 공동부유이다." 여기서 우리가 응당 주의해야 할 사항은, 등소평이 논한 것은 사회주의의 두 개의 측면이며 하나가 아니라는 점, 즉 사회주의 본질의 ‘합법칙성 측면’과 ‘합목적성 측면’을 모두 언급함으로써 완전한 논술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합법칙성 측면과 합목적성 측면

    동시에, 등소평이 논한 두 개의 측면에 있어서 첫째와 둘째 사이엔 차별성이 존재하며, 앞뒤 순서 구분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사회주의 본질의 ‘합법칙성 측면’을 앞에 놓고, 사회주의 본질의 ‘합목적성 측면’을 뒤에 놓았는데, 이것은 객관 법칙성(즉 생산력발전)의 일차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객관 법칙성을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만 비로소 인민대중의 목적(즉 공동부유)을 실현할 수 있다. 이점은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 문제에 있어 유물사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능숙한 응용을 보여주는 것으로, 맑스주의가 중국적 실제와 시대적 특징을 잘 결합하여 발전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본질의 첫 번째 측면을 지적한 연후에 반드시 연이어서 사회주의 본질의 두 번째 측면을 지적하여야만 하는 것은, 어떤 사회라 할지라도 단지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키는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시에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과 ‘결과’라는 문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 부단히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키는 사회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와의 본질적인 차별성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점만 가지고서는 사회주의 본질을 완전하고 명확히 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역시 모종 의의 상, 일정한 단계와 정도에 있어선 생산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킨다. 물론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에 있어 제한적이기에, 이 점만 보더라도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우월하지만 말이다.

    공동부유, 사회주의 우월성

    그러나 동시에 더욱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자본주의가 비록 생산력을 발전시키더라도 그 성과는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사회적 부의 대부분은 단지 소수인이 점유할 뿐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인구의 0.2%의 초특급 부호들이 미국 60%의 재산을 점유하며, 인구의 1.6%인 백만장자들이 미국 80%의 주식을 장악하고 있고, 사회 빈부격차와 양극분화는 엄중하다. 때문에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은 건전하고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은 그것이 사회생산력이 전대미문의 속도로 발전(물론 이것은 정확한 정책 선택을 전제로 하지만)하는 것을 용납한다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한 측면은, 등소평이 말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의 재화는 인민에게 속하며, 사회주의가 부유해지는 것은 전 인민이 공동으로 부유해지는 것이다."

    공동부유와 근로인민의 근본이익을 떠나서는 생산력발전은 하등의 실제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등소평은 시종 공동부유가 사회주의에 대하여 갖는 근본적 의의를 매우 중시했는데, 그는 "사회주의 최대의 우월성은 공동부유이며, 이것은 사회주의 본질을 구현하는 또 하나의 측면이다."라고 하였다.

    사회주의 본질의 이상 두 가지 측면을 완전하게 논하는 동시에 또한 그 앞뒤 순서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사회발전의 합법칙성과 합목적성간의 상호관계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류사회의 운동은 객관 법칙이 지배하는 역사의 ‘필연성 운동’이자, 또한 역사 활동의 주체가 일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능동성 운동’이며, 이 양 측면은 서로를 제약한다. 한편에선 역사운동의 법칙은 자발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역사 활동 주체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

    과거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큰 실수

    다른 한편에선, 역사 활동 주체의 실천추구는 또한 사회발전법칙의 제약을 받으며, 만약 객관 법칙을 위반한다면 그 목적 실현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사회주의사회의 운동발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사회주의를 역사 활동 주체의 목적 추구의 각도에서 볼 때, 그것은 민중이 주인되는 평등하고 공동부유한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은 인민대중을 위주로 하는 사회주의의 가치목표의 구현이자, 또한 중국 공산당이 중국인민을 수십 년 간 이끌면서 각고분투하며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정반(正反)두 측면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러한 공통의 이상(理想)과 가치목표의 실현은 반드시 사회발전의 객관법칙 즉 ‘생산력’을 기초로 하는 생산방식의 발전과 결합하여야만 하며, 필히 생산력의 객관적인 물질운동법칙의 존중을 전제로 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공동부유’라는 근본목표의 실현은 반드시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의 현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는 오직 부단한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의 이러한 현실 경로를 통해서만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며, 생산력발전이 아직 낮은 수준에 있는데 "사회주의 제도를 도입한다는 사실만으로" 즉각적으로 한꺼번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떠한 아름다운 이상이나 목표도 모두 공상과 유토피아로 변하고 말 것이며 결국은 현실적 벽에 부딪쳐 좌절되고 만다.

    맑스와 엥겔스는 일찍이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지적하길, 사회주의에서 "생산력의 이 같은 발전이 절대적이고 필수전제인 이유는, 만약 이러한 발전이 없다면 단지 가난과 극단적인 빈곤의 보편화만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 빈곤 하에선, 필수품을 위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게 되며, 모든 낡고 지저분한 것(예컨대 계급투쟁, 인간의 인간에 의한 착취 등)들의 이미 꺼져버린 재가 다시 타오르며 부활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과거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적 교훈은 이 말의 진리성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과거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큰 실수는 공동부유를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의 현실적 기초 위에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며, 사회적 이상을 사회역사의 객관운동의 기초 위에 세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약 생산력발전을 현실적 기초이자 전제로 삼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단지 빈곤 기초 위에서의 평균주의이자 공동의 가난일 뿐이며, 여기서 공동부유는 말할 필요도 없게 된다.

    모순과 통일

    등소평이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을 첫 번째로 놓고,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의 기초 위에서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분화를 해소하며, 최종적으로 공동부유에 이른다고 한 것은 과거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깊은 통찰이며, 또한 사회운동의 합법칙성과 합목적성의 통일이라는 맑스주의 사상의 빛나는 구현이다.

    이상의 분석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관한 두 측면의 개괄은 각기 주안점이 다르다. 제일 측면의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은, 사회주의의 존재근거 측면에서와 사회주의 운동법칙의 객관필연성 측면에서 사회주의 본질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측면인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분화를 해소하며, 최종적으로 공동부유를 달성한다."는 사회주의 ‘주체 요구’와 ‘최종목적’ 그리고 ‘가치목표’ 측면에서 사회주의본질을 밝힌 것으로, 이로써 합법칙성과 합목적성 양자의 통일로부터 사회주의사회의 본질을 전면적으로 규명해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본질의 이 양 측면은 통일을 이루면서도, 또한 동시에 상호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은 사회주의의 부단한 운동발전 과정에서 비로소 현실적 해결을 획득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본질 양 측면간의 ‘모순’은 다음에서 표현된다. 즉,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은 사회주의 발전의 본질적 요구이자 역사법칙성의 요구이어서, 그것은 반드시 사회주의 발전의 ‘전 과정’에서 구현되도록 해야 하고, 필히 사회주의 발전의 매 발전단계 모두에서 충분히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존재한다.

    이에 반해 "착취소멸, 양극분화해소, 최종적인 공동부유"는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 본질개념에 들어가며, 그것의 실현은 하나의 ‘점진적인’ 장기간의 과정을 필요로 하고, 처음 시작부터 바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근본목적과 근본임무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 초급이나 중급 단계에서 막바로 "완전한 착취의 소멸"을 요구하고 공동부유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역사발전단계를 초월하는 것이며 사회주의가 종국에 가서야 이루어야 할 목표를 지금 당장의 현실적 요구로 삼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발전법칙을 위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편에서, 사회주의가 곧 바로 착취소멸과 공동부유를 이룰 수 없음을 핑계로 사회주의의 이러한 근본적인 발전방향을 모호하게 해서는 또한 아니 된다. 사회주의 본질 중의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다.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관한 이상 두 측면의 개괄은, 바로 일반적인 추상적 개괄의 형식을 빌어 이러한 모순을 심도 있고 전면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즉 공동부유를 ‘근본목적’으로 제출하면서도 또한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을 ‘근본임무’로 삼고, 사회주의의 ‘발전방향’을 명확하게 하면서도 또한 사회주의의 ‘발전과정’과 ‘발전동력’ 그리고 ‘발전경로’를 명료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편에선 흔들림 없이 "착취소멸, 양극분화해소, 최종적인 공동부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사회주의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또한 이것은 생산력발전에 따라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임을 익히 알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생산력발전의 법칙과 요구를 위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본질의 두 측면간의 상호제약 중, 주요한 측면은 생산력해방과 생산력발전에 두어져야 한다. 만약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해방되고 발전하지 못한다면 다른 일체의 것들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게 된다.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지금까지 중국에선 일부 지역과 일부 기업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성실한 노동과 합법적 경영의 기초 위에서 먼저 부유해지는 것을 제창해 왔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중국은 현재 자신의 발전단계를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하고 있다.), "생산력발전에 유리한지 여부"를 제일의 판단기준으로 삼아, 사회주의의 큰 틀 안에 공유제뿐만 아니라 사유제 등 여러 종류의 소유형태가 함께 발전하는 것을 용인하고, "일정 범위와 한도 내"에서 착취를 허용하는 것 등은, "착취를 확대하고 양극분화를 가속화"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생산력해방과 발전에 유리하기 때문이며, 결국 최종적으로 착취소멸과 양극분화 해소 그리고 공동부유에 도달하는 것을 촉진시켜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역사가 요구하는 필연성의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바로 등소평이 말한 바와 같이, "일부 지역이 발전을 조금 빨리하여 다른 대부분 지역을 이끄는 것, 이것이 발전을 가속화하고 공동부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중국은 이미 그간의 경제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현 후진타오 지도부 집권 2기가 시작되던 2007년부터는 이러한 개혁개방의 성과를 전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새로운 발전전략, 즉 ‘과학적 발전관’을 통해 초기의 ‘선부론’적 전략을 대체해가고 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자율적인 자기 조절은 앞서 언급한 사회주의 본질 중 ‘생산력발전’을 위한 부단한 ‘생산력해방’, 즉 끊임없는 자기개혁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적 변화와 성과가 기본 밑바탕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현재의 세계적인 금융위기 가운데서도 유독 중국만이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선 필자의 다른 글 "중국경제 8.7% 성장의 의미"를 참고하기 바라며, 새로운 발전전략인 ‘과학적 발전관’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전문적으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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