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노련 재판, 그들의 노림수 잘 봐야
        2010년 12월 17일 08: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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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평도 포격의 자욱한 연기 속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일들은 참 많았습니다. 근로자 중의 다수가 비정규직인 이 나라 같으면, 사실 현대차 비정규직들의 초인적이다 싶은 점거농성 투쟁은 전국적 관심과 연대를 이끌었어야 했습니다.

    연평도 포연이 가린 것들

    하지만 정권과 현대 자본으로서 아주 운좋게(?) 겹쳐진 ‘안보 위기’가 가세한 데다가, 정규직 노조 상급 간부의 투쟁 배신에 가까운 ‘조절’이 이루어져서 적극적 투쟁의 횃불은 다수의 시선을 받지 못한 채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차 투쟁은 그나마 노동계 안에서라도 관심사가 돼서 소극적으로라도 많은 비정규직들에게 영감을 준 바 있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오세철 교수와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맹) 재판’이라는 아주 우려스러운 희비극은 아예 진보계 안에서도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을 일으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연세대 오세철 명예교수가 이론가이자 실천적 지도자로 돼 있는 사노련은 급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했으며, 실제로는 다소 노동자주의적 노선을 간직해 ‘노동계급조직’에 주력해왔습니다.

    ‘계급조직’이라는 말은 아주 거창하게 들리지만, ‘계급’이라는 단어를 대체로 군에서의 계급쯤으로만 아는, 노조 간부하다가 보수정당의 국회의원 되는 일을 ‘전향’이나 ‘배신’으로 여기지도 않을 만큼 계급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사리사욕을, 체제의 범위 내에서 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오세철 교수에 의해서 조직화된 노동계급은 – 제가 이해하기로는 – 대략 수십 명에 불과했습니다.

    노르웨이 같으면 사노련과 노선이 엇비슷한 ‘적색당'(일종의 노동자공산당)은 전국적으로 약 2.5%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게 사민주의적 후진국 노르웨이 이야기죠. 위대하신 선건(先建) 지도자이신 우리 대통령 각하의 현명하신 영도 하에서 일취월장 선진화하여 그 국격이 하늘을 찌르는 대한민국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죠. 아랍에미리트까지 파병해서 세계만방 사이에 무위(武威)를 떨치는 강성대국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현대판 특고에 시달리는 오세철

    강성대국이 돼버리면 모든 국내외의 가상적들도 무조건 아주 강성하게 보이나요? 하도 얌전하게 생기셔서 급진사회주의 조직의 지도자라기보다 차라리 정치경제학을 골방에서 연구하는 ‘백면서생’처럼 보이시는 오세철 교수는, 약 2년 전에 현대판 특고(特高)들에게 시달리시기 시작했습니다. 혐의는 국가 변란 도모,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위협 등등입니다.

    시인 윤동주를 "잠재적 반란자"라고 상상하여 투옥시켜 옥사시킨 ‘그때’의 특고들도 상상력이 아주 풍부했지만, 선건 정치 시대의 안보꾼들도 아무래도 할리우드의 감독 이상의 상상력을 자랑들 하십니다. 폭탄주를 많이들 드셔서 뇌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진화되시는지 어쩐지 저 같은 무식한 중생으로서 알 수도 없지만, 정말 ‘서울우드’ 하나 차리실 만하네요.

    오세철 교수가 국체를 변란시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전복시키실 확률은, 아마도 스위스 학교 다녔다가 역시 폭발적 속도로 대장 칭호를 빨리 받은 김정은 ‘젊은 장군님’이 갑자기 대미 성전을 일으켜 뉴욕을 점령해서 ‘뉴평양’으로 개칭시킬 확률과 대체로 엇비슷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카프카의 <재판>은 문제없이 현실이 되는 법. 지난 12월3일에 공판이 열려 검사가 "국가 변란 음모 주범" 오세철 교수에게 7년형 등을 구형했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031714521&code=940301). 그의 동지들도 거의 5~7년형 정도 구형된 셈입니다.

    노르웨이 같으면 7년형 정도는 정상참작이 가능한 살인범에게 내려지는 형벌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후진적인 사민주의 국가와 질적으로 다른 강성대국 대한민국에서는 형벌들도 좀 강성해야겠지요? 역시 스케일이 크군요.

    폭탄주 마신 ‘구형질’

    폭탄주를 많이 드신 상태에서야 고양이도 호랑이로 보이고, 호랑이도 공룡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구형질’을 하시는 분들이 오세철 교수가 수십 명의 동지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크게 위협하실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믿지 않는 건 분명합니다.

    정말 법조인들에게 오세철 교수가 약간이라도 위협으로 보였다면, 이번처럼 재판을 불구속으로 진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사노련을 와해시키려는 노력들도 훨씬 더 집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국제적인 창피 등을 무릅쓰고 이 재판 코미디를 무대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진보에 대한 협박"이라고 짐작들 하실 것이고 이는 일면 맞을 것입니다. 오세철 교수가 유죄가 되든 무죄가 되든(후자의 가능성도 꽤 큽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공안꾼들에게 시달리시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모든 이들은 선진화되는 조국의 품에 안겨 있는 한 ‘사회주의’ 같은 불온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위험하다는 교훈 정도는 이미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질식사 될까 말까 하는 정도로 조국이 강하게 포옹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를 좋아할 만한 ‘불령 분자’들이라면 대체로 인덕(仁德)스럽기 짝이 없는 우리 조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환상이 없는 것이고, 법정에서 사상투쟁을 당할 각오는 이미 돼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류의 ‘재판질’ 가지고서는 협박이 먹히진 않을 걸요. 자신들의 존재의 필요성을 확인해야 하는 공안꾼들의 ‘일건주의’, 즉 한 건을 더 올리고 싶은 ‘순수한 열정’도 분명히 한 몫을 했겠지만, 그저 그것만 가지고 이 정도의 창피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외의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재판은 일종의 실험?

    제 생각 같으면, 이 재판은 일종의 ‘실험’인 것 같습니다. 약 15년 간 하지 않았던 북한과 무관한 사상범에 대한 사상 재판을 다시 하기 시작한 공안 일꾼들은 일단 이 일을 실험 삼아 해보는 것이고, 사회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영향력이 큰 종교 집단들 안에서 그 진보적인 전위(카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 등)라도 반대 성명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반발을 하고, 시민사회에 힘깨나 쓰는 참여연대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세철 교수와 그 동지들을 방어해준다면 국가는 얼마든지 물러설 수도 있는 것이죠.

    이제 곧 레임덕이 될 대통령은, 안그래도 관계가 아주 나쁜 시민사회로부터 추가적 미움을 받아 고학력, 중간 소득의 젊은 직장인 등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는 중간적 유권자 계층들을 또 떠돌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실험이 성공해 오세철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민사회의 별다른 반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공안꾼들이 새로운 날개를 달아 새로운 ‘불령 분자’들을 찾으러 끝없이 비상할 것입니다. 먼저 영세한 좌파적 단체들부터 표적에 오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회당, 민노당, 진보신당 안에서의 약간이라도 급진적 세력들이 졸지에 ‘국체 변란 음모자’가 될 것입니다.

    밖에서 대북 대치가 첨예화되는 상황에서는, 안에서까지 ‘내부의 적’을 생산해낼 수 있다면 정권으로서는 이중의 효과가 발생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도 아주 큰 반발이 없을 것인지 지금 시민사회의 의향을 ‘떠보는’ 차례인 셈입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죠. 우리가 오늘 오세철 선생님을 방어해드릴 수 있다면 내일은 우리들의 표현 자유부터 강화될 것이고, 우리가 오늘 오세철 선생님이 마녀재판에 의해 ‘이지메’를 당하시는 상황을 방관한다면, 내일은 누구나 (저를 포함해서) 재판 받아야 할 ‘불령선인’의 대열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라고는, 연대의 힘 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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