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뜨는 게 사람뿐은 아니지만
        2010년 12월 16일 08: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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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죽음의 시대 / 내 친구는 / 굵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 역사가 부른다 / 멀고 험한 길을 /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 간다 /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 그 눈동자 별빛 속에 빛나네 / 내 맘속에 영혼으로 / 살아 살아 /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 이 방벽을 부수리 부수리" (민중가요 ‘친구2’ 전문)

    한 친구가 또 죽었다. 김공림

       
      

    나와 같이 86년에 반월에서 활동을 하고, 함께 감옥도 간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위 공범(共犯)이다. 제주도 출신으로 유난히 라면을 좋아하고, 밥을 지을 때 콩나물을 함께 넣어 콩나물밥을 해먹길 좋아하던 황소 같은 친구였다.

    같이 감옥을 나와 지역도 같이 서울로 옮기고 나는 공장으로, 그는 성수동에 있는 동부노동상담소에서 일했다. 가끔 보기도 하고, 소주도 한잔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친구였다.

    감옥 이후에도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서 고문도 받았다. 뚝섬 고수부지에서 87년 대통령 선거시 후보 단일화를 위한 집회를 뚝섬 고수부지에서 개최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돈을 벌고, 한편으론 노동자들을 만나 상담하는 바쁜 일정이 결국 그를 잡아 먹었다. 위암이었다. 결혼한 지 겨우 6개월만이었다. 유고집을 보면 아내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김공림 추모집,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187쪽) 

    “우리만은 역사 속에서 삶 속에서 추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게 나라와 민중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나머지 두사람의 삶을 하나 하나씩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제주도에 가서 그를 묻고 왔다. 1991년 2월의 일이었다. 

    한 선배가 또 죽었다. 유구영 

       
      

    “기필코 살아 힘찬 모습을 보여주겠다”라고, “나마저 암으로 죽으면 할머니, 어머니에 이어 3대가 죽는 것인 데 딸자식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던 선배였다. 85년이던가 친형이 목사로 있던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항상 밝은 웃음으로 능구렁이처럼 웃기를 잘 하던 선배였다.

    91년이던가, 전국노동자대회가 고대에서 열렸다. 비밀스레 연락을 받고, 책임자만 장소를 아는 상태에서 전철을 타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내리라는 은밀한 지령(?). 그리고 “뛰어”라는 소리 하나로 기를 쓰고 미아리 고개에서 성신여대 뒤를 넘어 고대 후문으로 진입하는 순간, 거기에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선봉대장으로 웃고 서 있던 형이었다. 

    95년 지방선거 때에는 내가 유성으로 선거 지원차 1달 동안 파견되어 가자 내 대신 민주노총 조직팀으로 와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자 정책실에서 일했었다.

    메이데이를 치르고 새벽 2시 연맹 위원장과 몇사람이 병원에 있다가 답답하여 비가 오는 거리로 나가 문닫은 술집을 두드려 소주 한 잔 걸치고, 자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올라간 5층 병실에서 형은 마지막 숨을 가누고 있었다.

    그 좋던 풍채는 어디로 가고, 배를 문지르며 “인격이다”라고 얘기하던 그 환한 웃음은 어디로 두고, 모든 구멍마다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형수는 계속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침대 주변에 있던 10여명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눈을 감지 못했다. 입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간암이었다. 1996년 5월의 일이었다. 

    한 후배가 또 죽었다. 최명아

       
      

    대학 졸업 후 공장에 들어가 활동하고 해고되고, 구속되었다. 민주노총 결성과 함께 조직국에서 일했던 여자 후배다. 성실하고, 잘 웃고, 그러나 운전면허증도 못딴, 음식솜씨는 좋은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마침 98년도 민주노총이 전교조의 합법화 대신에 정리해고에 동의해 주면서 대의원대회가 난장판이 되고, 서로가 마음이 안 좋을 때였다.

    과로로 쓰러져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뇌출혈이었다. 밤에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할 때 신생아실 바로 옆에 중환자실이 있는 병실에 나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를 위해 시를 하나 남겼다. (최명아 추모집, ‘사라지는 것은 없다’ 94~95쪽) 1998년 2월의 일이었다. 

    이별이 이리 쉬운 것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 갈 수도 있음을
    미처 우린 몰랐네
    자정이 넘어 비 내리는 광화문
    서울대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기다리며
    그것이 이별의 시작일 줄 몰랐네
    차마 얼굴을 대할 수 없어
    서성이던 중환자실 복도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 속에
    우리의 울음이 묻힐 줄 몰랐네

    한겨울 더욱 선연한 다복솔 자라듯
    우린 사랑했네
    비록 지금은 힘들고 나뉘고 찢길지라도
    꿈을 가졌네
    눈을 들어 미래를 보았네

    그럴 줄 몰랐네
    가끔 속 상하는 소주를 함께 마시며
    백년 천년은 몰라도 이렇듯 이별이 빠를 줄 몰랐네
    삶과 죽음이 이리 가까운 사이인줄 몰랐네
    다시 찾은 마석,
    구영이형 무덤 흙 마르기도 전에
    그대를 눕게 할 줄 몰랐네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이
    이리 많을 줄 진정 몰랐네

    그렇게 봄이 왔네, 개나리 솟아난 혜화동 로터리
    운동은 건강해지지 위해서 하는 것
    그렇게 날선 검으로 서로의 가슴을 후벼파
    동지가 적인 양 물어뜯는 우리가
    이제는 바뀌려나 봄이 오려나, 노란 꽃망울이 피려나

    죽음은 무엇을 남기는가
    꽃은 피고 져 더 많은 꽃으로
    슬픔이 다하면 기쁨으로 오는가
    아픔도 다하면 새 살이 돋는가
    그대 누운 자리 더 많은 꽃이 피는가
    그럴 줄 몰랐네
    도시 같은 우리 안에 그대를 사랑하는
    눈물이 이토록 남아있을 줄은
    나는 정말 몰랐네

    동료 하나가 또 죽었다. 김종배

       
      

    전문노련이 다른 조직들과 통합하여 공공연맹을 만든 직후였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시위하고 감옥가고, 다시 공장으로, 그리고 전노협에서 일했었다.

    전노협이 민주노총으로 발전한 뒤 전노협 백서를 만들었던 후배이자 동료였다. 공공연맹에서는 교육국에서 일했다. 강원도에 사시는 아버님이 아프시자 밤새 간호하고 돌아오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다.

    “쉬운 사람들
    모두가 끝났다고 말한다
    이 무모한 선언에 둔감한
    그들은 누군가?
    미래는 끝났다고?
    쉬운 사람들“

    그가 쓴 ‘쉬운 사람들’이라는 시다. 아들이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는 편지를 쓰셨다. 

    “막내야, 네 얼굴 다시 보게 해 다오. 네 이름 다시 부르게 해 다오. 세상을 다 준다한들 너와 바꾸겠느냐? 편지나마 하여 다오. 이 무정한 녀석아! 편지라도 받으면 마음이 놓이련만. 이 편지 받고도 답장이 없으면 무조건 찾아가겠다.”

    막내의 답장을 받고 또 쓰셨다. “우리 막내 살아있었구나.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얼마 만에 받는 소식이던가? 네 글씨를 보니 너를 본 듯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자꾸만 흐르고 또 흘렀다. 이에 우리 막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하늘을 날 것만 같구나.”(김종배 유고집, [어머니, 겨울엔 먼길 떠나지 마세요] 134~135쪽) 라던 어머니를 남기고 그는 떠났다. 1999년 8월의 일이었다. 

    * 최근 청와대의 민간사찰이 문제가 되고 있다. 피해자인 김종익씨는 바로 이 김종배의 형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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