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노협, 업종회의 불신 딛고 민주노총으로
        2010년 12월 13일 09: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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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은 사람들은 아직도 눈시울이 뜨겁고 / 눈뜬 사람들만이 죽어서 / 살아있다 죽음으로 내가 증거한 것은 / 나의 사랑과 너희들의 불의와 거짓과 / 상처투성이의 삶.” (김정환 시 ‘세례요한의 말’ 중에서)

    파견 활동가 생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전문노련에서 업종회의로, 민주노총 추진위원회 조직팀으로,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파견나가서 활동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연맹에서 일한 기간보다 다른 곳으로 파견나가서 일한 기간이 더 많다고 할 만큼 그 기간들이 길었다.

    모두 자기 것을, 자기 조직만을 챙기는 데 조합원 수 2만명에 불과했던 전문노련은 유독 ‘연대’에 대한 가치를 높게 가지고 있었다.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다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는 것처럼, 조직도 그렇기 때문이다. 

    94년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을 만들 때도 1달 넘게 대전 유성에서 살았다. 그러고 보면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는 너와 놀아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셈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모두 회사별로 구성되어 있다. 기업마다 구분되어 만들어지므로 ‘기업별 노조’라고 한다. 박정희나 전두환 모두 노동조합이 힘을 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 따라서 기업별로 노동조합을 만들도록 강제했다.

    물론 외국은 그렇지 않다. 업종별, 직업별,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노조의 조합원 수가 평균 200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외국은 수십만, 수백만명이 하나의 노조였다. 그 힘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87년 이래로 민주노조 운동이 ‘산업별 노조 건설’을 목표로 한 이유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였다. 과학기술노조는 바로 그런 산업별노조를 만들기 위해 기업별로 조직되어 있는 노동조합을 합쳐 나가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였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충남대학교 앞에 자취방을 구해 놓고 나는 유성에 있는 화학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표준과학연구원, 자원연구소 등의 노조 등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면서 마침내 과기노조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가 가장 많이 쓴 표현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말이었다.

    각 연구소마다 있는 노조를 없애고 하나의 단일노조로 만드는 방법이었고, 아직까지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한 달 넘게 유성에 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마침내 94년 4월 15일 성공적으로 과학기술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누구나 자기 욕심을 조금씩만 양보하면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듯이 규모의 차이가 있는 개별 노동조합들이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의 노조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노조를 시작으로 많은 노조들이 작은 산업별 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 노동자가 커다란 힘으로 모이는 것을 방해했지만 ‘스스로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각기 다른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활동해 왔던 사람들이 하나로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각자 서 있는 위치가 다른 경우에는 시각이 완전히 차이나는 법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다.

    민주노총을 만들기로 하고 추진위와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하나의 조직으로 되기에는 넘을 산이 많았다. 전노협은 명실상부하게 당시 투쟁의 지도부였다. 반면 업종회의는 사무직 노조의 특성상 투쟁력이 약했고, 조직의 안정을 더 많이 바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전노협과 업종회의의 불신

    예를 들면 이랬다. 94년 11월에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1차 대표자회의에서 집행위원장을 선출하는 일이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조직을 처음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합의’에 의해 사람을 선정하고 추인한다. 그런데 경선을 치러야 했다. 내가 속한 연맹 출신의 허영구 위원장과 금속 출신의 최은석 위원장이 경선을 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사실 아무나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누가 하든 훌륭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았음이 나타난다. 

    “그 때 업종회의 사람들 못 믿겠다는 정서들이 있었죠.. 민주노총이 소위 투쟁 중심이 아니라 타협 중심으로 갈거다하는 우려를 많이 한 거죠. 막연하나마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 것들을 봤을 때 업종회의 중심으로 가면 한국노동운동이 빨리 무너진다. 전투적 중심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이런 우려가 있었죠” (김창우 지음,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161쪽에서 인용) 

    서로 다른 조직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이 한 곳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런 갈등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현재 진보신당의 심상정은 전노협에서,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인 홍영표는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에서, 뉴라이트로 변질된 오종쇄 현대중공업 위원장은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에서 파견나와 같이 일했었다. 15년전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현재는 갈기갈기 찢겨진 채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셈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당시 파견나온 사람들에게는 활동비로 월 10만원인가가 지급되었다. 혜화동 성균관대학교 앞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그런데 나처럼 업종회의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은 해당 조직에서 급여를 주고 있었다. 반면 전노협에서 파겨나온 사람들은 급여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나는 +@를 더 받는 셈이었고, 그들은 과외 등을 하면서 활동을 해야 했다.

    한참 일하다가 나가는 후베에게 "어디 가?"라고 물으면 "돈벌러 가요"라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돈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파견자들이 받는 돈을 나누어도 전노협 출신자들에게 돌아갈 돈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밥값을 치르거나 술값을 내는 정도였다. 전노협 출신의 활동가들이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얼마나 치열한 정신으로 활동했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그만큼 취약한 상태로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조합의 대통합이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어디 가?", "돈벌러요"

    혜화동 시절의 기억 한토막을 남기고 싶다. 우리는 민주노총 현판을 만들기도 했다. 돈도 돈이지만 의미있게 만들기로 하고 우리 연맹의 예술의 전당 노동조합에 부탁을 했다. 결국 조합원 한 분이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글을 모아서 ‘민주노총’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주었다. 집자(集子)라고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걸 들고 영등포에 있는 목공소에 가서 나무에 파서 들고 왔었다. 모든 걸 수공업적으로 하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립다. 전국노동자대회를 할 때도 상근자들이 모두 동원되어서 현수막을 걸고, 그 높은 무대를 직접 쌓기도 햇다. 아시바(비계)라고 부르는 건조물을 4단 높이로 쌓을 때면 아찔하기도 했던 그 날들. 

    당시 그 어려웠던 시절을 같이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누구는 10여년 만에 복직을 했고, 누구는 평화박물관 등을 추진하고, 또 누구는 농사를 짓고, 또 다른 이들은 진보정당 운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다. 어디에 있든 그 시절의 기억은 잊지 못할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전국적인 구심인 민주노총을 만드는 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90년 전노협 건설, 95년 민주노총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다. 특히 당시의 노동법은 아주 지독했다. 그 중 하나인 제3자 개입금지 조항만 예를 들면 얼마나 많은 노동악법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두환은 80년 국가보위특별위원회에서 노동관계법을 개악하면서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신설했다. 누구든지 다른 사업장의 문제에 개입하면 그게 바로 제3자가 되어 구속되는 것이었다. 

    내가 부천에서 일하던 당시 한 사업장에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이런 경우 보통 다른 사업장에서 지원방문을 하게 된다. 라면 한 박스를 들고 찾아서 “끝까지 투쟁해서 반드시 승리하길 바란다”라고 지원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그는 1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라면 한 박스, 말 한 마디에 감옥 1년

    민주노총을 만들던 당시인 19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에서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민주노총을 만들던 지도부 중의 한명이자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는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이 당연히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그 이유로 인해 ‘제3자 개입 금지’ 위반이 되어 수배 상태로 민주노총을 결성해야 했다. 한번은 권영길  위원장도 참가한 가운데 우이동에서 사무처 수련회를 하는 데 경찰이 출동하여 산을 넘어 피신해야 했을 정도였다. 한 밤 중에 산을 넘어 도망을 간 셈이다.

    나는 그 즈음해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입학에서부터 15년이 걸린 셈이다. 84년 전두환이 만든 ‘유화국면’에서의 복학은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쑈’였다. 당연히 복학을 거부하고 공장으로 갔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김영삼 정부가 되자 학교에서 복학 여부를 타진해 왔다. 나와 네 엄마는 복학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실업의 고통을 겪은 나는 이후에라도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대신 학교에서 등록금을 전부 부담했다. 군사정권의 압박에 의해 강제로 퇴학 조치를 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학교를 거의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중간고사 등을 치르기 위해 몇 번인가 학교를 간 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내가 교수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깜짝 놀라곤 했다. 졸업이라고 해 보았자 비슷한 시기에 학교에서 제적당한 친구와 후배들과 사진을 찍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뒤늦게나마 네 할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홀로 된 할머니는 네 큰아버지 집에서 조카들을 돌보면서 살아가고 계셨다. 두 번의 감옥생활과 이후의 활동을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부모란 아무리 속이려 해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채는 법이란 걸 그 때 알았다. 

    민주노총은 많은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1995년 11월 11일 연세대학교에서 결성된다. 

       
      ▲민주노총 창립 대의원대회.
       
      ▲민주노총 로고. 공모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통해 만들었다. 각기 다른 노동자의 연대를 의미한다.

    민주노총은 이렇게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창립대의원대회를 서울 연세대학교 강당에 개최. 가맹노조 866개 노조 41만여 명의 조합원을 대표해 566명의 대의원과 국내외 귀빈 500여 명이 참여해 창립대의원회를 열고 공식 출범. 초대 위원장에 권영길, 수석부위원장 양규헌, 사무총장 권용목 준비위 공동대표를 각각 선출.

    민주노총의 선언과 7개항의 강령, 20개의 기본과제, 규약을 519명의 대의원이 투표에 참가하여 506명의 찬성으로 확정. 사업계획안과 예산안을 확정하고 조합원 1인당 의무금 200원 납부와 1만 원의 창립기금 모금을 기립박수로 통과시켰으며 국제자유노련(ICFTU) 가입을 결의하는 한편 가입 시기는 중앙위원회에 위임했다. 정치세력화, 공동교섭 및 공동투쟁, 경영참여 확대 및 사회개혁운동 등을 주요 활동 목적으로 결의."

    역사에 공짜는 없다, 죽어간 사람들…

    이로서 멀게는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부터 25년만에, 87년 노동자 대투쟁 8년만에 어용적인 한국노총에 맞서는 전국적 노동자의 조직 중심이 만들어졌다.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역사에 공짜는 없다.

    민주노총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구속되고, 수배되었다. 기회가 되면 몇 사람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기로 하고, 이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만 남겨두자. 참고로 그동안 죽어간 노동열사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권 구분 

    박정의 정권
    (70~79년)
    전태일 김진수 김경숙
    전두환정권
    (80-87년)
    안종필 김종태 박종만 홍기일 박영진 변형진 신호수 이순덕 표정두 황보영국
    정경식 김현욱 이대용 박용선 유인식 이석규 이석구 김수배 김성애 박응수 심재환
    노태우정권
    (88-92년)
    이대건 김장수 오범근 최윤범 장용훈 문용섭 문송면 성완희 송철순 이문철 배중손 김윤기 최완용 김종수 이상남 조정식 이상모 박진석 이종대 최성조 강현중 김종하 이재호 임태남 배주영 강민호 이영일 최태욱 최 동 박성호 원태조 오원석 김봉환 신용길 박창수 윤용하 이진희 석광수 유재관 김처칠 권미경 박복실 박태순 임희진 최성근 이광웅
    김영삼정권
    (93-97년)
    정운갑 채희돈 정영상 정영부 조경천 고정자 박미경 서영호 김주리 임혜란 길옥화 최 웅 김성윤 김상옥 최성묵 김낙성 임종호 양봉수 박삼훈 이민호 서전근 조수원 김시자 김왕찬 유구영 오용철 박문곤 홍장길
    신자유주의
    정권
    (98-2003년)
    최대림 최명아 신길수 조현식 정성범 김윤수 배동복 이상관 최경철 박용순 김종배 김명환 최진욱 이옥순 김순조 안동근 이동현 유순조 김기욱 한경석 천덕명 배달호 임영덕 이성경 이성도 박상준 최복남 김병진 송석창 이현중 김주익 곽재규 이용석 이해남 성기득 박동진 박일수 정상국 김춘봉 박상윤 정종태
    합계
    139명

    나는 실무에 치이고, 수배중인 권영길 위원장의 보호 문제 때문에 사실 커다란 감격을 못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전노협이나 업종회의 초기 활동부터 결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87년 이래 전국적으로 단일한 노동운동의 구심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에게는 가슴 벅찬 일이었다. 

    "앞줄에서 세 번째 자리엔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문노련 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원이 확인되고 노동열사에 대한 묵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될 때, 자리 곳곳의 대의원들과 이 역사적인 자리에 참가하기 위해 수많은 형극의 세월을 견뎌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민주노조의 깃발을 부여잡고 달려온 지난 세월의 고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차디찬 쇠창살 아래 몸을 누이던 그 아픔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어느 양지바른 언덕에 묻었던 맑은 영혼의 옛 동지를 떠올리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떠난 동지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어느 작업장 후미진 곳에서 피로 쓴 유서 한 장 남기고 목을 맨 동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코 투쟁을 멈출 수 없다면서 웃으며 들어갔던 감옥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 온 동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최루탄에 맞아 피흘리며 자신의 가슴에서 숨져간 동지, 자신의 몸을 노동해방의 제단에 한 점의 불꽃으로 던진 동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두들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로 그들을 위한 애달픈 헌사임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의 새로운 출범, 새로운 행진이 바로 이들 ‘임’을 위한 행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하던 뜨거움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이내 시야가 흐릿해졌습니다. 무어 얼마나 대단한 운동을 했다고 할 수도 없는 저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민주노총이 창립되던 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울었습니다. 

    민주노총 창립, 그렇게 그날 동지는 간 데 없지만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나부끼는 깃발 들고 달려 왔던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가슴에 고인 피눈물을 닦아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날 전태일을 생각했습니다. 김경숙(YH무역), 이석규(대우조선), 문송면(협성계공), 박진석(대우조선), 이상모(대우조선), 김봉환(원진레이온), 박창수(한진중공업), 권미경(대봉), 양봉수(현대자동차)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날 올렸던 깃발, 민주노총은 그들이 그토록 살고 싶고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이었던 것입니다" (양경규 – "오늘 마흔다섯번째, 민주노총 창립기념일에 기억해야 할 죽음"에서 재인용)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한 강의안을 발견했다. 그걸로 대신한다.

    “긴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역사는 제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으며 앞으로도 가야할 곳으로 갈 것이다. 역사는 정체와 후퇴의 시기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현재 현실도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 과정의 일부이며, 앞으로도 변화 발전할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역사를 통하여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실천해도 안된다면 지금 여기 투쟁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금속노조 교안 ‘한국노동운동사-열사를 중심으로’ 중에서 인용함)

    얘기가 나온 김에 먼저 죽어간 이들의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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