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이라는 수사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바르게 다스린다(治는 바로잡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뜻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권모술수나 기만과 같은 뜻으로, 때에 따라서는 이것보다 더 야비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치적 공세”, “정치적 의도”, “정치적 거래” 등의 표현은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거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표현으로 자주 활용된다.
한국정치의 본질적 과제는 정치 복원
정치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사회적 갈등의 해결에 있고, 그 결과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정치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과제는 잃어버리고 왜곡된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정치가 없는 정당과 국회, 그리고 청와대가 낯설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국민들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번 국회 예결산 사태는 ‘정치 없는’ 국회가 만들어 낸 매우 슬픈 희극이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산처리를 강행했고 강행 후엔 ‘정의’로 포장했다. 그 법이란 것은 헌법 제54조 2항 “ …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바로 아래 3항을 보면, “ …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한 때에는 정부는 국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될 때까지 다음의 목적을 위한 경비는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예산심사와 의결이 기한을 지키지 못할 때 예산집행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둠으로써, 법치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법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과정과 절차도 중시하는 실질적 법치주의를 헌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날치기 예산안 처리 국회의원 난투전.(사진=민주당) |
그리고 이번 사태는 ‘정치력 없는’ 한나라당과 ‘정치를 무시하는’ 청와대가 주연과 조연을 맡은 합작품이었다. 한나라당은 대화하고 타협해야 할 야당에 대해서는 주먹을 휘두르고, 국회가 견제해야 할 대통령의 ‘지시’에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여당 내에서도 집권당의 ‘독립성’에 대해 자조섞인 탄식이 흘러나올 지경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 무시를 넘어 반정치적인 태도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위헌”을 언급하며 예산안 통과 날짜를 ‘지정’한데 이어, 국회가 아수라장이 되고 야당이 거리로 뛰쳐나간 상황에서도 “새해 예산안이 정기국회 ‘회기 내에 통과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야당을 더욱 자극했다. 각종 민생법안이 줄줄이 새나간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11일 당정간 ‘대책회의’까지 열었다고 하니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무감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4대강 예산과 이른바 ‘형님예산’ 및 ‘실세예산’, 그리고 각종 복지예산의 삭감도 문제지만, 이번 예산안 사태를 통해 드러난 정부와 여당이 행태가 매우 ‘저질’인 것은 예산과는 무관한 ‘UAE파병동의안’, ‘4대강 주변 개발법인 친수구역활용특별법(친수법)’과 ‘서울대 법인화법(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 등의 법률안을 은근슬쩍 집어넣은 것이다. 특히 국방장관이 원전수주에 대한 대가성 파병이라는 점을 인정한 바 있는 UAE파병동의안은 최소한의 형식적인 당위성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오세훈, 노회찬 TV토론 거부할 땐 언제고
한편 의회를 무시하는 반정치적인 한나라당의 행태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의회와의 시정협의 중단사태를 통해서도 진행 중에 있다. 국회는 한나라당이 다수당이고, 서울시의회는 한나라당이 소수당이지만, 정당은 온데간데 없고, 행정부의 수장이 파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데서 ‘닮은 꼴’이다.
“부자급식” 운운하며 무상급식 조례안을 놓고, 부자들에 대해 ‘계급투쟁’이라도 선포할 기세로 달려드는 그의 행태는 앞서 기준에서 보면 매우 반정치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후보와의 TV토론을 회피하던 그가 TV토론을 거부한 서울시 교육감을 “비겁하다”며 비난하는 모습은 부도덕하게까지 보이기도 한다.
오세훈 시장은 이번 무상급식 조례안 사태 와중에 대권 도전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번 예산안 사태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를 끌어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인에게 정치력은 리더십이라는 구체적인 철학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업적경쟁에 골몰하고 있는 그에게서 가뜩이나 정치력 부재에 시달리는 한나라당의 미래 역시 현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감정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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