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용불안, 고혈압 정신질환 유발"
        2010년 12월 08일 07: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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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학교 세미나에서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발표를 할 때였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이 우울증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참 전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미국인 동료가 손을 들고서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50%가 넘는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묻는다. 진짜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머리에 남은 미국 동료의 질문

    발표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질문이 머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OECD에 가입했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나라인 ‘선진국’ 한국에서 그처럼 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한다는 게 믿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비정규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국과 달리 노동시장 경직성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30% 가량인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미국과 유럽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10% 내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0년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인자는 다른아닌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더 위험한 작업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면서도 다쳐도 산재보상을 받기는 더 힘들고, 해고당해도 실업급여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선 지 벌써 10년이 지났으니까요. 한국 사람들에게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건강을 해친다’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답답한 ‘상식’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습니다. 일터를 자주 옮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특성상 안정적인 데이터 수집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노동조합을 포함해서 정부를 비롯한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관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과 관련된 연구들이 그나마 가장 활발히 진행된 곳은 북유럽 복지국가들인데요. 핀란드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출판되는 연구들은 실업급여를 비롯한 사회안전망의 수준이나 자본-노동 관계가 워낙 한국의 상황과 달라, 그 연구 결과를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놀랍고 엽기적인 일

    또한 무엇보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세계적으로 볼 때, 유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50대 이상 여성 노동자의 75%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도, 현대자동차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의 공장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달리 노동조합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면서, 같은 공장에서저임금으로 일해야 하는 수만명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외국에서 보면 놀랍고 엽기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훨씬 안정적인 사회보장제도를 갖춘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연구들에서도 비정규직 고용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울 점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이트홀II(Whitehall II) 연구입니다. 영국 공무원들의 건강을 주기적으로 관찰하던 이 연구는 독설로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마가릿 대처 (Margaret Thatcher)가 영국의 수상이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회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개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천명하고, 공기업과 노동조합의 ‘독점’을 비판하며 1979년 집권에 성공한 대처 수상은 1982년 국영화물회사를 시작으로 통신, 가스, 항공, 석유 등의 순서로 공기업들을 차례로 민간기업에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민영화로 인해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던 정규직 공무원 들이 어느 순간부터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공무원들의 건강을 꾸준히 추적, 관찰해온 화이트홀II 연구는 의도치 않게 학력, 인종, 성별 그리고 여타 사회경제적 요소를 통제한 상태에서 고용불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일종의 잔인한 실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논문들은 고용불안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 노동자들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보여주었습니다(1-3). 일단 민영화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는 유의미하게 악화되었구요. 만성적인 고용불안은 자가측정 건강을 악화시키고 고혈압과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용불안, 고혈압 정신질화 유발

    이 결과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같은 개인을 추적 관찰했기 때문에 유전적인 면을 포함한 여러 요소들을 통제하고도 고용불안 자체가 사람의 몸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십자가 마냥 등에 지고 살아가는 고용불안 하나만으로도 이처럼 건강이 악화된다는 게 분명하다면, 임금, 노동시간, 산재보험, 실업급여 등등에서 막대한 차별을 감수하고 일하고 있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은 어떠할까요.

    만약에 세계보건기구가 말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헌법 35조가 명시한 것처럼 모든 국민이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면, 2년 이상 사내하청 업체에서 일한 노동자를 정규직화 하라는 법원의 판결은 실은 너무 늦은 것 아닐까요.

    그리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아무리 자본이 국가를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대법원 판결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조와 협상조차 시도하지 않고 대형 포크레인으로 응답하는 현대자동차는 진정 너무한 것 아닐까요.

    1. J Epidemiol Community Health. 2002 Jun;56(6):450-4.
    2. Am J Public Health. 1998 Jul;88(7):1030-6.
    3. BMJ. 1995 Nov 11;311(7015):1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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