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이력서 품고 처갓집을 나왔다"
        2010년 12월 07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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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면 우리 / 왜 술만 마시며 / 저를 썩히는가 / 저질러 버리는가. // 좋은 계절에도 / 변함없는 사랑에도 / 안으로 문닫는 / 가슴이 되고 말았는가. //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 / 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 / 감싸주어도 좋을 상처, / 더 피흘리게 만드는가. // 쌓인 노여움들 / 요란한 소리들 / 거듭 뭉치어 / 밖으로 밖으로 넘치지도 못한 채 ……” (이성부 시 ‘만날 때마다’ 전문)

    네 엄마의 편지

    “내가 당신에게 충격받은 것은 가정 경제에 대한 당신의 태도였어… 그런데 내가 임신하고 입덧하면서 나자빠졌는 데 속수무책인 당신 보면서 배반감을 많이 느꼈지.” 

    너의 엄마가 처음으로 보낸 편지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다 커서 결혼까지 한 딸이 무일푼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가 가지는 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거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네 엄마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제대로 되었다면 울산을 떠나야 했다.

    나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나 똑똑한 사람들은 울산을 차례로 떠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조직이니까 서로의 처지를 비교해 보고 떠날 순서를 서로 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혁명조직이라 해도 조직이 없어지면 서로를 규정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까지 그동안 노동자들에게 말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이런 시기에 빠져 나간다는 것이 스스로 삶의 지표를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 아주 가끔은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떨까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머리를 스쳐… 현실을 피해나가고 싶지는 않아. 현실이란 피해나가면 언젠가 그 고민에 다시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지…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자신을 위치지워야 하는 건지 갈피를 못잡고 있어. 현실이 주는 압박감에 짓눌리는 기분이지… 

    아주 어렵다고 얘기하는 주변의 사람들도 최소한의 조건를 갖추고 있어.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오래 포기하고 살아왔어. 이전에는 내가 포기하는 만큼 다른 데서 그 보상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포기하는 만큼 더 많이 얻는다고 생각했었어.

    그렇다고 그것이 희생이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 단지 나는 내 인생을 살아왔을 뿐이지. 내가 다르게 살아왔으면 느끼지 못했을 수많은 경험들을 해 왔지. 그것으로 나는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들에 만족해. 언젠가 내가 말했던가? 80년 서울역 투쟁 당시 한참 최루가스 마시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나도 한 때 그랬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는… 항상 문제는 현재겠지.” 

    네 엄마와 싸우다

    당시 내가 너의 엄마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이다. 92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짬짬이 간신히 영등포 당산동에 있는 처갓집에 가서 네 엄마를 보면 결국에는 싸우게 되고 말았다. ‘그러지 말자,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가도 마찬가지였다.

    은지 너는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태어났다. 그나마 병원에서 네 얼굴을 본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선거 막바지였기 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너를 돌보지도 못한 채 외할아버지에게 맡긴 채 다시 울산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처음 아기를 낳은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가정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선거가 끝나자 갈등이 밀려 왔다. 함께 했던 조직들은 모두 각자의 조직으로 돌아갔다. 

    "울산같이 거대한 도시에선 구멍가게로 장사하면 망한다. 적어도 슈퍼마켓 정도는 되어야 진보정당의 꿈을 가질 수 있다. 함께하자. 조직이 문제라면 울산만이라도 진보정당추진위를 탈퇴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갈 방향이 달랐다. 선거의 패배는 결국 이후를 위한 아무런 조직적 토대도 남길 수 없었다. 결국 서로 다른 이름으로 이후 진보정당을 추진하게 된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올라간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삶과 다른 것을 의미했다.

    은지 너를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 했다. 만세대 뒷산에 올라 현대중공업의 불빛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며칠이고 술을 마셨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울산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책임질 테니 다 데리고 내려오라고 했다. 당시 그들은 한달에 5만원 정도를 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세대 뒷산에서 혼자 술은 마셨지만…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자고 꼬시던 사람들이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그렇게 다 올라가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난도 있었다. 모두 다 올라가 버리고 최영민만 남게 되는 셈이었다. 이후 민주노동당의 월간 기관지 <이론과 실천>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이상하게, 쫓겨나듯이 민주노동당을 떠나게 된다.

    암튼 당시 나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그는 남았다. 물론 울산이 고향인 조승수와 당시 현대정공에 다니던 김호규는 그대로 있었다. 지금도 그 당시 만났던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진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선택의 폭은 크지 않았다. 

    이런 저런 갈등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이혼하고 아예 섬에 들어가 조용히 사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너를 생각하면 정말로 무책임한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엄마와는 80년 학교에서 만난 평생 동지였다. 학림사건도 같이 연루 되었었고, 노동운동도 쭉 같이 해 온 사이였다. 

    누구나 인생에 한번은 커다란 전환점이 온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조직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무책임했다. 적어도 혁명을 꿈꾼 조직을 이런 정도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현실은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993년 초의 일이다. 

    운동만 해 왔으니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처갓집 눈치를 보면서 아침이면 취직을 위해 이력서를 품안에 넣고 나왔다. 그러나 정작 몇 군데를 알아보면 끝이었다. 벼룩시장 등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해보고, 면접도 봤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 대학 중퇴자에 나이도 삼십을 넘은 사람을 써 줄 곳은 없었다.

    오전에 모든 일이 끝나면 갈 곳이 없었다. 처갓집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돈이 있으면 만화가게에서 죽치거나 아니면 한강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야 집으로 향했다. 전형적인 실업자의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실업자 모습

    이런 경험은 이후 98년 국민승리 21에서 실업대책본부 상황실장으로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심하고 처참했다. 결국 다시 용접하는 곳으로 향했다. 김포공항 가는 곳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고 시공하는 곳이었다. 똑같이 공장에 다니는 것이었지만 많이 달랐다.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다니는 것과 먹고 살기 위해 용접하는 것은 달랐다. 마치 너희들이 좋아서 책을 읽는 것과 시험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 다른 것처럼.

       
      ▲용접하는 모습. 

    아무튼 출근할 수 있어서, 처갓집을 벗어날 수 있어서,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았다. 놀이터를 시공하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파는 것은 어려웠다. 꽁꽁 얼어붙은 땅은 30cm를 파기도 힘들었다. 그걸 2~3m나 파고 묻어야 했다. 그나마 아이들이 노는 미끄럼틀이라든가 그네를 만드는 것이어서 좋았다.

    노동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든다. 일에 집중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선배가 노동조합에서 사람을 뽑는다며 한번 가보라고 연락을 주었다. 조진원이라는 그 선배는 학림사건에 연루된 바로 그 사람이었고, 당시 건설연맹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겨레 신문에 광고가 실렸다. 서류는 엄마가 내고, 나는 작업을 끝내고 김포에서 잠실까지 갔다. 그리곤 대여섯명이 앉아 있는 가운데 면접을 보았다.

    “전문노련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아니요, 전노협은 알지만 전문노련은 처음 듣는데요.”

    그렇게 면접을 보았다. 1명을 뽑는 데 5명인가 왔다. 그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셈이었다. 거기다 백기완 선거운동을 했으니 이미 노선이 분명한 사람으로 규정되었을 터였다. 마침 울산에서 같이 노동운동하던 김호규의 부인이 전문노련 산하 노조인 홀트노조의 위원장 출신이었던게 힘이 되었는지, 아니면 전문노련은 정파의 구분을 두지 않았는지 다행히 뽑혔다.

    그 당시 전문노련의 위원장은 허영구 위원장이었고, 인사위원회 위원장은 양경규 위원장이었다. 너희가 ‘빼빼로 아저씨’라고 부르는 양 위원장과의 오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바로 출근을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

    1993년 5월 8일의 일이다. 눈에 안 보이는 어떤 힘이 나에게 행운을 준 셈이다. 사실 처음에는 전문노련을 몰랐다. 그냥 회사에 취직하듯 했다. 사무직 노동운동에 대해 그만큼 몰랐다. 노동운동하면 굴뚝이 생각나고, 공장을 떠올렸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발전은 제조업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들의 각성도 불러왔다. 이미 KBS 등 언론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에도 사무직 노동자들이 ‘넥타이 부대’를 이끌고 나온 경험도 있었다. 정권은 “교사들이 노동자로 전락했다”고 비난했지만 선생님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었다. 

    이 시기를 돌아보면 지금도 가장 마음이 아프다. 특히 갓 태어난 너에게 많이 미안하기도 하다. 나만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운동을 계속 하고 싶으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너희는 이해가 안될 수 있겠지만 정말이지 운동을 하고 싶었다. 모든 꿈이 그렇듯이 세상을 바꾸려는 꿈은 포기될 수 없었다. 그리고 꿈이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그 꿈은 현실의 삶과 화해할 길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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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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