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평론자'들의 논리가 위험하다
        2010년 12월 06일 01: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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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와 공평은 대립하는가?

    얼마 전 장하준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의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두고 짧은 논쟁이 오고갔다. <프레시안>과 <시사인>에 실린 이 책의 서평에 대해 “복지 이전에 공평이 중요하다”는 사회디자인연구소의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공평과 공정’을 강조하며 결국 ‘사회적 상벌체계의 합리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 주장(=이하 공평론이라 부름)은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게 되면 사회적 상벌 체계가 무력화되어 사회적 가치(부)의 총량을 늘리지 못한다.”는 우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기계적 평등의 추구는 약자에게조차 불행한 사회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사회주의의 몰락과 1970년대 영국의 복지병은 이를 증명하는 결정적 사례’라는 것이다.

    결국 시급한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 각종 반칙과 특권을 철폐해 ‘사회적 상벌체계를 합리화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공평론의 요지이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이러한 공평론의 이러한 공격에 대해 약간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 ‘복지’와 ‘공평’이 어느 한 가지를 먼저 해결하고, 다른 한 가지는 다음에 해결해야 하는 순차적인 과제인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공평을 중요한 가치이자 원칙으로 다루고 있으며, 복지국가가 실체적 공평의 실현을 위한 해법임에도 불구하고,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마치 공평과 무관하거나 대립적인 것처럼 평가하는 데 대해 다소 불편하고 당혹스럽다.

    공평과 복지는 일의 선후나 중요도를 기계적으로 가릴 차원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공정한 나라, 공평한 세상은 어제 오늘의 꿈이 아니다. 임꺽정이나 로빈훗이나 혹은 그 훨씬 이전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쳐왔던 사회가 공평한 사회가 아닐까?

    문제는 모두가 그토록 소망하는 100% 공정한 세상이 언제쯤 구현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지국가 건설’을 ‘공정한 세상’ 보다 덜 시급한 과제라고 치부해 버린다는 것은 결국 하지말자는 말의 다른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에 대한 ‘공평론’의 공격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물론 최근 공평성의 문제가 새삼스럽게 주요 과제로 떠오른 것은 사실이다. 대중의 분노는 ‘왜 복지가 안 되지?’라는 측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왜 우리는 이렇게 불공평하지?’라는 차원에서 더 극대화되고 있다. 최근 ‘양극화의 심화-청년실업의 확대’라는 구도 속에서 우리사회의 불공정성 문제는 더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임꺽정 시절의 공평문제와 다르지 않다. 신분제 사회야말로 불공평이 사회구조적으로 정착된 사회이고, 당시의 지주야말로 원조 지대를 수탈하는 오리지널 지주이다. 공평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사회를 조직하면서부터 계속되어온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평문제를 복지국가 이전에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복지국가의 그날은 언제 온단 말인가?

    지대를 폐지하기 위해 땅을 없어버려야 하는가?

    ‘복지’보다 ‘공평’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반칙과 특권의 폐지에 더 주력해야 한다는 공평론의 요지는 그래서 결국 ‘현실의 대안이 무엇인가?’라는 차원에 이르면 상당히 불분명한 논리가 된다. 우리사회의 반칙과 특권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은 원론적으로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반칙과 특권은 어떤 경로를 밟아서 혁파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공장에서 같은 노동을 하는데 서로 다른 임금을 받는다면 올바른 상벌체제라고 볼 수 없다. 그럼 이 상황에서 기득권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대기업 노조를 깨버리는 것이 대안일까? 아니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각종 사회안전망을 포함하는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대안일까?

    공평론이 강조하는 ‘면허의 지대화’ 문제도 그렇다. 공평론은 고시나 공무원시험 또는 일부전문직에 대한 합격증이 일종의 지대를 창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적 맥락의 지대는 어떤 근거(주로 소유권)를 통해 그 구역에서 창출되는 생산물을 별 노동 없이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변호사가 단지 사법시험에 한번 합격했다는 이유로 평생 동안 별 노력 없이 엄청난 소득을 올린다면 경제학적인 ‘지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에 대해 동의한다고 해서 사법시험을 없애 버리고 의사나 변호사 등에 대한 면허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대안으로 삼을 수 있을까? 공평론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어떤 ‘신의 직장’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적 공평성을 위해 모든 ‘신의 직장’들을 다 후려쳐서 직원들의 월급을 평균임금 이하로 깎아 버려야 할까? 철밥통 역시 일종의 지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공무원 임금을 대거 하락시켜 모두 저질 일자리로 격하시켜야 하는가? 아마도 이런 사회적 대안을 지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비정규직 등의 다른 부문의 임금과 복지 수준을 높여 일자리의 양질화를 추구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있겠지만 특권의 폐지라는 명분하에 고임금 또는 양질의 일자리 자체를 파괴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영국의 기계파괴운동처럼 대중의 분노만 자극하는 파괴적 대안으로 흐를 수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보편적 복지국가의 건설을 통한 해법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만약 사회보장과 각종 보편적 복지가 제도적으로 확대되어 고시 합격을 하지 않아도 모든 국민의 마음속에서 의사나 변호사들의 경우처럼 의료, 노후, 주거 등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진다면? 고시나 의사면허, 변호사 면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회문화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이러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반면, 역동적 복지국가론에서는 지대를 받아먹으며 불공평을 즐기던 고소득 계층은 세금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 결국 자기가 창출해낸 지대를 국가에게 끊임없이 수탈당하게 된다. 이 상황이 되면 전문직의 고소득은 한 바퀴 돌아서 사회 전체를 위한 구매력으로 활용된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을 많이 내는 고소득자와 대기업은 일종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국가야말로 단지 국가라는 이유로 모든 국토와 국민을 소유하고 그 생산물을 아무 반대급부 없이 가져가는 존재다. 다시 말해 소득세 시스템 하의 국가는 최상층에 존재하는 최대의 지대 착취자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지대는 폐지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대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전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공정사회론자들이 ‘지대’를 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아예 ‘지대의 완전폐지’를 구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히 공상적 기획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지대를 완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대를 압박해서 혁신을 끌어내는 데 있다. 나는 이 전략을 <지대압박-혁신촉구>라 부른다.

    공평론은 역동적 복지국가론과의 논리적 차이를 1차 분배(시장 분배)와 2차 분배(국가 분배)라는 지점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1차 분배는 공정성이 중심이 되고 2차 분배는 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둘 중 어느 지점을 강조하는가?”라는 대목에서 공평론과 복지국가론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도에서 본다면, 불공정이 초래한 1차 분배의 실패를 바로 그 실패의 주체인 시장을 통해 바로잡겠다는 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시장의 실패를 시장을 통해 교정하겠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시장의 실패가 초래한 1차 분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동적 복지국가와 시민사회의 공적 개입이 필요하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과 규제적 개입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역동적 복지국가의 산업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중요한 이유다.

    이렇게 하더라도 1차 분배의 격차는 시장의 원초적 결과물이므로 국가 분배, 즉 2차 분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1차 분배와 2차 분배를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에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역동적 복지국가와 시민사회의 공적 개입이다. 시장이 시장실패를 스스로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사회에서 특권과 반칙의 폐지는 “폐지해야 한다!”는 구호를 앞세우는 임꺽정식 접근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특권과 반칙에 대한 대책 없는 공격은 잘 조직된 기득권의 집요한 반동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반면 광범위한 사회보장과 보편적 복지 체계의 수립은 그 자체가 일정하게 공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평한 사회로 가기 위한 거대한 사회적 조건의 획기적 창출임에는 분명하다. 우리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건설을 통해 공평의 사회적 조건과 토대를 창출해내는 전략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와 청순글래머

    상반되는 방향의 두 가지 개념을 서로 엮어서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조어법이 있다. 얼핏 대립되는 듯 보이는 두개의 가치를 단어 하나에 몰아넣는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도 있겠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의 주변에서 이런 사례를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민주집중제’라는 개념이 그렇다. 이는 ‘민주주의’와 ‘집중제’라는 개념을 한 단어에 다 넣은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토론은 민주적으로 하되, 집행은 집중적으로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스웨덴 사민주의의 상징처럼 된 ‘유연안정성’이라는 개념도 그렇다. 유연안정성은 ‘유연성’이라는 자본가의 요구와 ‘안정성’이라는 노동자의 요구를 한 단어에 모두 담고 있다. 기존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을 것으로 간주되었던 두 개념을 결합한 전략이 유연안정성이다.

    이런 조어법은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연예뉴스에도 도입되었다. 최근 ‘청순글래머’라는 말이 유행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동안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청순’과 ‘글래머’를 결합한 용어다. 이 역시 같은 차원의 조어법이다.

    우리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이런 맥락의 조어법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복지는 ‘탈상품화’와 ‘탈계층화’의 맥락에서 추구하는 것이고, 역동성이란 시장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핵심개념이다. 결국 역동적 복지국가란 한 단어 안에 ‘시장 이전의 가치’와 ‘시장 이후의 가치’를 모두 담고 있는 이상적인 개념이며 우리만의 독특한 전략이다.

    따라서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입장에서는 “복지국가가 결과적으로 공정한 시장의 성립을 방해하게 될지 모른다.”는 공평론의 우려와 공격에 대해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내세우면서 공정한 경제와 혁신적 경제를 동시에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시장’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없다면 ‘복지국가’ 자체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복지 만능주의”라고 비판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오인사격이다.

    어두운 밤에 최전방에서 멧돼지를 적군으로 잘못 알고 무차별 발포하는 오인사격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다. 눈이 나쁘기 때문이거나, 혹은 너무 공포에 질려있기 때문이거나 둘 중하나인 것이다. 만약 눈이 나쁜 것도 아니고 너무 공포에 질려있기 때문도 아니라면, 그것은 ‘특권폐지’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상품화하기 위한 ‘분노의 오퍼상’일 뿐이다.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한다

    ‘공평론은 너무 시장 일변도의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사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상벌체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격기구다. 그런데 가격기구란 곧 ‘시장’이기 때문에, 결국 “복지보다 공평이 우선한다.”는 논조가 추구하게 될 궁극의 대안은 ‘시장’으로 귀결된다.

    물론 시장 시스템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에는 먼저 확보해야 하는 ‘시장 이전의 가치’가 존재한다. 단지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시장 이전의 가치’는 ‘공정한 사회’의 거대한 기반이 되기도 한다.

    공정을 경쟁 절자 상의 반칙과 특권이 없는 것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하지 않고, 경쟁 출발선의 실체적 평등으로 넓게 이해한다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즉, 출발선의 일치가 바로 광의의 공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정경쟁”을 내세우면서 ‘시장 이전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뒤집힌 측면이 있다.

    군사독재와의 오랜 투쟁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에 환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과도한 흥분이 넘쳐나는 바람에 그 열정의 범람이 경제적 자유주의로까지 나아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불공평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불공평을 발생시킨 거대한 배경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불공평 문제가 대두된 것은 신자유주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특히 청년실업이 큰 문제로 떠오르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양극화의 심화-청년실업의 확대’라는 구도 하에서 우리사회의 불공정을 초래한 자들에 대한 대중의 잠재된 분노가 극대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공정한 경쟁’만을 해결책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해법으로의 진격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도박임을 인식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워야 할 상황에서 되레 신자유주의를 숭배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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