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렵게 털어놓은 그들의 아픈 사연들
        2010년 12월 06일 09: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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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법원 판결에 따라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며 11월 15일부터 파업에 돌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이 12월 6일부로 22일차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법원과 고등법원이 잇따라 불법파견 노동자는 정규직이라고 판결하고, 시민들의 88%가 대화와 교섭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도, 회사는 잔인한 탄압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전혀 준비없이 시작된 농성이고, 22일이 지나면서 조합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도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2.

    2002년 입사해 9년차를 맞는 1공장 ㄱ조합원(30)은 지난 11월 30일 가족으로부터 아버지께서 병원 전문가 심사에서 최종적으로 식물인간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을 버리고 농성장을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 2006년 위암으로 쓰러지셨고, 합병증으로 인해 점점 병세가 악화되더니, 최근에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올해 1월 그가 사과를 사들고 병원에 가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으로 무뚝뚝한 아버지는 아들이 묻는 말에 ‘응’, ‘그래’, ‘알았다’라는 짧은 말씀만을 남기셨습니다. 이후 의식을 잃으셨고, 뇌사인지 식물인간이지에 대한 판정이 30일 내려진 것입니다. 이제 그의 아버지는 집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그는 가장으로 200만원 남짓한 월급의 절반을 아버지 병원비로, 나머지는 가족 생활비로 써야 했지만 아버지의 오랜 병환으로 8천만원이 넘는 빚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정규직이었다면 단체협약에 따라 연간 2천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어 빚을 한 푼도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아래 자료 참고) 

    그는 아무에게도 아버님의 식물인간 판정 날짜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가장 가까운 형님이 나가서 아버님 뵙고 하룻밤 자고 들어오라고 했지만,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서 꼭 승리해 아버지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하며 농성장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께서 “너의 인생은 네가 만들어야 한다. 네가 하는 일이 맞다면 그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위로를 받고 눈물을 삼키며 농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울산1공장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변변한 이불도 없이 비닐을 덮고 자고 있다.(사진=참세상)

    3.

    2002년 입사해 4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ㄴ조합원(35)은 아내가 첫 딸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1공장 농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산후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농성장에 들어오는 발걸음이 너무나 괴로웠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고 나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농성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몸에 큰 종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울산대학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부산의 동아대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11월 26일 그는 아내의 수술을 위해 농성장을 나가게 되었고, 12월 4일 수술을 하였습니다.

    양쪽 집안이 모두 어려운 상황이어서 한 달밖에 되지 않은 그의 첫 딸은 친할아버지가 돌보고 계시고, 그는 아내의 병간호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공장 안에 있는 동료와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들어가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도 정규직이었다면 아내의 병원비는 모두 회사에게 지급했을텐데, 그는 병원비가 큰 걱정입니다.

    4.

    2000년 4공장에 입사해 11년째 1톤 트럭인 포터를 만들고 있는 ㄷ조합원(39)은 오늘도 홀로 계신 노모(76)에 대한 걱정을 가슴 깊은 곳에 넣어두고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위한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농성장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니께서 식사도 하지 않으시면서 아들 걱정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어머니가 쓰러지실지도 모른다는 동료들의 등쌀에 밀려 11월 26일 잠시 외출을 했습니다. 그는 아들 걱정에 편찮으신 어머니에게 링거를 맞게 해 드리고, 어머니를 뒤로 하고 농성장으로 돌아왔습니다.

    11년 전 부산에서 배를 타고 있었던 그는 큰 누나가 사업이 망하면서 집안이 어려워져 1억이 넘는 빚을 지고, 단돈 500만원을 들고 어머니와 큰 누나의 아들을 데리고 울산으로 넘어와 현대차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모시고, 조카를 키우느라 연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가난한 사내하청 노동자를 좋아하는 여자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2005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으로 노조에 가입했다가 투쟁이 성과없이 끝난 후 노조를 떠났습니다.

    올해 7월 22일 대법원 판결 이후 다시 용기를 내어 노조에 가입했고, 오늘까지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당장 정규직화가 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단계적으로 정규직화를 한다던지 회사가 성의있는 안을 내서 우리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얘기했습니다.

    5.

    2007년 5월 4공장에 입사한 ㄹ조합원(32)은 농성을 시작하기 직전인 11월 12일 아버지(70)께서 대장에 생긴 큰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였고, 14일까지 병간호를 하다가 갑작스레 농성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외동아들인 그는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병원에 그의 신용카드는 남겨놓고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20일간 입원해 계시다가 12월 1일 퇴원을 하시면서 그의 카드로 병원비를 계산하셨고, 그는 핸드폰에 찍힌 사용내역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천식이 심해 일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께서 수술까지 받은 몸으로 혼자서 식사를 하실 걱정으로 속이 많이 상하지만, 동료들도 다 어려운 상황이라 그냥 묵묵히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농성을 하고 있지만 잠자리도 괜찮고, 먹을 것도 잘 먹고 있다”고 안심시켜드렸는데, 아버지께서 텔레비전을 통해 비닐을 덮고 자고, 주먹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신 후 더 큰 걱정을 하고 계셔서 힘들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진짜 잘 먹고 있다고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그는 4년 넘게 사귄 애인하고도 헤어졌습니다. 정규직이었다면 벌써 결혼을 했을 텐데, 집안이 괜찮은 여자 친구의 집에서 홀아비를 모시는 사내하청 노동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몸도 튼튼하고 마음도 따뜻한 그에게 ‘비정규직’이라는 네 글자는 노비문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기 올라올 때 너무 억울해서 절대 빈손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사람대접 받고 싶어서 여기 올라온 거라구요.”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6.

    변속기 공장에서 일하는 ㅁ조합원(30)은 11월 14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결혼식 다음날, 그가 신혼여행중이었던 15일 파업이 시작되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19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친구에게 그 소식을 듣고 공장에 계신 형님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대법원 판결 이후에 형님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혼자 바깥에서 있는게 자책감이 들었고, 이번 투쟁에 함께 해 꼭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 농성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속도위반’(?)으로 임신 7개월인 아내도 그의 생각에 동의해 그를 믿어줬고, 장모님도 그를 이해해주었습니다. 부모님은 “예전에도 이런 일 있었고, 잘 안 된 거 뻔히 아는데, 꼭 들어가야겠냐?”며 반대하셨지만,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로 살 수 없다는 그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그는 11월 22일 공장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내와는 신세대답게 영상통화를 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종이에 편지도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마무리 잘 하고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랑한다고, 믿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아내에게 전했습니다.

    7.

    2002년부터 4공장에서 일하는 ㅂ조합원(33)은 오는 12월 10일이 아들의 첫 번째 생일, 돌잔치날입니다. 10일 저녁 6시 현대차 4공장 문 앞에 있는 문화회관에 돌잔치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11월 15일 농성장에 들어오고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돌잔치가 불투명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직전에 아들 돌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결국 못 찍고 농성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의 등쌀에 떠밀려 지난 11월 20일 외출을 해 돌사진만 찍고 돌아왔습니다. 주변의 동료들은 그와 그의 아내에게 12월 10일 아들의 돌잔치를 공장 정문 앞에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아들이 지난 5~6월 두 달간 폐렴으로 입원했고, 지금까지 통원치료를 다니고 있는데, 찬바람을 쐬는 것이 큰 걱정입니다.

    아이가 아프던 달에 월급이 140만원을 받았는데, 병원비에 생활비까지 많이 힘들었고, 매달 적자여서 카드사에서 전화가 오면 돈 빌려서 대출 갚고, 아껴서 산다고 했는데, 세 식구가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못 먹어도 아이는 먹여야 한다며,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모두 공장 식당에서 해결했고, 야간에도 6시 30분에 출근해 저녁을 먹었습니다.

    정규직처럼 월급도 많고, 병원비도 회사에서 지원해준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아들 첫 생일날 함께 축하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로, 꼭 이겨서 아들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겠다고 다짐합니다. 생일 선물로 아들 가슴에 비정규직 출입증이 아닌 정규직 사원증을 달아주고 싶다며 웃음을 짓습니다.

    8.

    1공장에서 농성중인 조합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많은 조합원들이 가족 얘기를 하기 싫다며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 한이 서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지난 십수년간 당연히 정규직으로 채용했어야 할 노동자들을 불법으로 비정규직으로 착취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노동자들의 절규와 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 빨리 교섭에 나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에 대한 염원에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 *

    현대차지부 단체협약(2009)

    제 110조(진료비 지원)

    회사는 조합원 및 건강보험증에 등재된 가족이 질병으로 병원 진료시 다음과 같이 의료보험급여 본인 부담금의 일부를 지원한다.

    1. 입원진료시

    1) 본인 : 의료보험급여 본인부담금 정산 후 본인부담금 전액을 지원한다.

    2) 가족 : 의료보험급여 본인부담금 정산후 본인부담금이 월 1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 100만원까지는 초과분의 반액을 지원하고, 100만원 초과분은 전액지원 한다.

    단, 조합원(가족 포함)에 대한 지원규모는 년 2,000만원을 한도로 하며, 1개월 이상 입원의 경우 첫월 1회에 한해 10만원 공제한다.

    2. 외래진료시

    의료보험급여 본인 부담금 정산후 본인은 전액, 가족은 반액을 지원한다.

    3. 노사합의에 의한 지정병원, 정산기준 등에 관하여는 별도로 정하는 규정에 따른다.

    * 이 글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점거 중인 울산 1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박점규 금속노조 교섭국장이 언론사로 보낸 글입니다. <레디앙>에서는 그 전문을 옮겨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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