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민중'의 삶과 저항
        2010년 12월 03일 05: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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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현재 뉴욕시에는 34,500여명의 경찰관이 있다. 2000년 40,800여명으로 정점에 오른 뒤 그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경찰관이 보호하고 있는 도시다. 인구 대비로만 따지면 10만 명 당 417명 수준으로 미국의 주요 대도시 가운데 시카고와 필라델피아에 이어 세 번째다. 뉴욕의 공립학교에 배치되어 있는 학교안전요원(school safety agent)은 5,147명이다. 뉴욕경찰국(NYPD) 소속인 이들만 따로 계산하면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경찰기구다.

    홈리스 30% 이상 늘어나

    37,987명. 이는 2010년 10월 말 현재 뉴욕시의 홈리스 쉼터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수로, 1980년대 중반 공식집계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노숙을 하는 홈리스의 수는 3,000명을 넘어섰는데, 이는 1년 전에 비해 30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830만여 명이 거주하는 뉴욕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 수와 집 없는 홈리스의 수는 엇비슷하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인구 100명당 거의 한 명은 총을 차고 도시를 지키는 사람이거나, 거처 없이 도시를 떠도는 사람이다. 뉴욕은 그런 도시다. 

    월스트리트와 타임스퀘어는 자본주의의 찬란한 성취를 보여주고, 모마(MoMA)와 메트로폴리탄뮤지엄(Met)은 문화와 예술의 규모를 표상한다. 뉴욕의 예술가들과 ‘예술가 워너비(wanna-be)’들은 뉴욕을 개성과 취향에 관한 첨단의 도시로 만든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입구에 있는 홈리스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넬 때, 혹은 낡고 냄새나고 물이 새는 지하철역에서 무장한 경찰을 스쳐 지나갈 때 뉴욕은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된다.

    이런 뉴욕에서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한 여성이 교외의 상류층 가구에서 하루에 1달러를 받고 가정부로 일했다는 뉴스를 접할 수도 있고,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버려진 지하철 갱도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온 사람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접할 수도 있다.

    쓰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도시

    뉴욕은 이야기더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뉴욕을 ‘쓰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20세기의 수도‘ 뉴욕을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는 도시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욕망하는 인간들은 뉴욕으로 몰려와 도시라는 텍스트를 뒤지고 탐색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분석한다. 물론, 단순히 양파껍질 벗기듯이 도시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네버엔딩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그 이야기더미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도달하기 시작한, 그리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뉴욕에 관한 이야기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여기엔 자본주의 사회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미국과 한국을 가로지르는 ‘성공’과 ‘쾌락’이라는 우리 시대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이 욕망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 때 ‘위험한 도시’로 인식되었던 뉴욕의 이미지는 ‘안전한 도시’, ‘엔터테인먼트 도시’로 다듬질 되었고, ‘용광로(melting pot)’나 ‘샐러드 보울(salad bowl)’로 대변되는 다양함의 이미지는 ’통제되지 않는 불화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뉴욕은 스테레오타입화될 수 없는 다양다종한 인간군상들이 뒤섞여 있는 도시이며, ‘정복의 역사’와 ‘삶-저항’ 사이의 긴장을 통해 형성되어온 도시다. 그런 의미에서 슬슬 진부해지기 시작한 화려한 ‘뉴욕 스토리’ 대신에 뉴욕 민중의 역사와 그들의 삶과 저항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뉴욕열전(列傳)』(김향수 옮김, 갈무리, 2010)이 우리 앞에 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뉴욕 민중의 삶과 저항

    『뉴욕열전』의 저자 이와사부로 코소가 말하듯 백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선주민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된 뉴욕의 역사는 도시공간의 창조와 위계적 분할, 지배와 저항을 둘러싼 이야기들로 쓰여질 수 있다. 저자가 ‘대지의 영토화’라 부르는 이 양상들은 실로 다양하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지금과 같은 토지 소유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아메리칸 선주민들에게 소량의 물품을 건네고 맨해튼을 구입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정복), 특정한 인구집단을 사회적, 물리적으로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것(게토화), 버려진 대지와 건물을 점유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소유권의 재확인과 살 권리 빼앗기), 그리고 슬럼화된 도심에 대한 재투자와 개발을 통해 고급 주택지와 상업단지로 바꾸는 것(젠트리피케이션) 등등.

    1980년에 뉴욕으로 이주한 저자가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 톰킨스광장공원(Tompkins Square Park) ‘폭동’, 혹은 ‘저항’은 공간을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의 전투 중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다. 톰킨스광장공원이 있는 로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많은 이민자들의 관문이면서 그들이 정착해 사는 장소였다. 또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운동가, 급진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저항의 장소이기도 했다.

    탈투자(deinvestment)로 인해 쇠퇴했던 공간에 화랑이 들어서고 예술가와 여피족들이 조금씩 모여들면서 버려졌던 토지와 건물을 점유해 살던 사람들이나 거리를 떠돌던 홈리스들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다양한 집단들의 모임 장소이면서 수백 명의 홈리스들이 군락지였던 톰킨스광장공원은 반(反)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적인 장소였다(책에서는 1988년 1월에 17만 8백 명의 홈리스가 공원에 모여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연인원으로 계산한 것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1988년 여름, 경찰이 공원에 야간출입금지(curfew)를 발령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대립이 격화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경찰은 시위를 하던 사람들과 근처에 있던 시민들을 공격했고, 공원에 있던 홈리스들을 쫓아내려고 했다.

    ‘경찰 폭동’

    뉴욕타임스 사설은 이를 ‘경찰 폭동(police riot)’로 묘사했다. 뉴욕시 정부, 경찰, 젠트리파이어(gentrifier, 도심의 고급화를 이끄는 중상류계급)와 홈리스, 아나키스트, 反젠트리피케이션 운동가들이 톰킨스광장공원을 둘러싸고 벌인 싸움은 1991년 시정부가 공원개보수 공사를 위해 공원을 전면 봉쇄하면서 막을 내린다. 톰킨스광장공원에서 벌어진 일들은 여전히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상징적인 저항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뉴욕열전』은 ‘성공’과 ‘쾌락’의 원주율 너머에 있는 이야기들, 그래서 우리의 관심 밖이었거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던 뉴욕의 역사를 이야기더미에서 찾아내 재구성한다. 저자는 ‘스톤월 항쟁’으로 알려져 있는 뉴욕 퀴어운동의 긴 역사와 그들이 도시공간에서 남긴 의미를 되짚기도 하고, 노동자의 도시 뉴욕의 노동운동, 생디컬리즘 등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한 때 뉴욕에 급진적 운동의 진지를 구축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 그리고 블랙팬더와 아나키즘의 역사를 통해 혁명적 이미지’의 뉴욕을 다시 써내려 간다. 그리고 ‘뜰 운동’이나 ‘스콰터 운동’처럼 버려진 터나 건물을 가꾸거나 점유하면서 도시공간에 대한 ‘소유의 권리’가 아니라 ‘살 권리’를 요구했던 모습들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뉴욕의 오스망(나폴레옹 3세 때 파리를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라고 불리면서 현대 뉴욕의 모습을 주조한 로버트 모제스의 시대와 도시공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제로 톨레랑스’ 정책을 펼쳤던 루돌프 줄리아니의 시대에도 대형 개발과 억압적인 정치에 저항하며 자율적인 공간을 창조하려고 했던 민중들의 운동을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민중의 자율적인 신체와 운동, 그들이 형성한 교류와 교통의 공간을 묘사하기 위해 ‘노마드’, ‘분자 운동’, ‘분열생성’, ‘비물질 노동’, ‘정동 노동’ 같은 개념이나 치마타(교류와 교통의 공간) 등의 개념과 테제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와 ‘테제’를 통해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역사와 현실의 모습을 좀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현실과 긴장하지 못하는 개념들

    가령, ‘비물질 노동’ 중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 장(3장 정동의 도시)에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처한 현실의 착취구조, 인종적 위계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건너뛴 채 그들로부터 자율적인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그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테제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뉴욕 열전』에서 아쉬운 점은 뉴욕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 혹은 재구성하면서 길어 올린 개념들이 현실과 날카롭게 긴장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지나치게 현실을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틀로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의 말대로 타임스퀘어 근방에서 어슬렁거리는 히스패닉, 흑인 청소년들이 ’치마타‘를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한 한 때 자전거를 타고 집단적으로 뉴욕의 길거리를 주행하며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와 보행자를 위한 도시를 요구했던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를 급진적인 운동으로 볼 수 있을까.

    주로 중간계급과 예술가들이 참여한 이 운동은 현재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보행자 중심’ 도시 건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리고 급진적인 예술과 보헤미안적인 ‘액티비즘(activism)’마저 젠트리피케이션을 강화하며 도시공간에 대한 ‘자본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뉴욕에서 예술과 액티비즘의 가능성을 반복해 말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자본의 힘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만든 조건부터 정확히 분석하고 비판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아쉽게도 『뉴욕 열전』은 이를 다루지는 않는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눈

    『뉴욕 열전』에 “들뢰즈와 가따리의 눈”이 투영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저자가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현재의 맥락에서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표면 아래 뒤얽혀 있는 무수한 시공간의 비밀을 밝혀내 뉴욕의 혁명적 이미지를 복원하겠다고 하지만,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20세기의 수도’ 뉴욕을 보려는 시도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것을 뉴욕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뉴욕에 모여 있다’라는 말로써 뉴욕을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는 것을 정당화한다. 『뉴욕 열전』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한 도시에 대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쓰기 위해서는 뉴욕을 세계의 알레고리로 볼 뿐만 아니라, 거꾸로 세계를 뉴욕의 알레고리로 보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왜 인도와 멕시코와 중국과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대도시에서 슬럼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지, 왜 서울시는 파리와 뉴욕을 욕망하고 따라하려고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1988년 서울의 ‘상계동 올림픽’과 뉴욕의 ‘톰킨스광장공원’은 어떤 관계인지, 2009년 발생한 용산 참사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왜 아프리카에서 온 한 여성이 뉴욕 교외의 상류층에서 하루에 1달러를 받고 가정부로 일하는지, 왜 브루클린이나 퀸즈의 대로에 히스패닉 젊은이들이 일용직 일거리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지, 왜 뉴욕의 네일숍에 일하는 여성들의 대부분은 아시아인들인지, 그리고 왜 ‘원더걸스’의 뮤직비디오와 ‘무한도전’의 한식 홍보영상이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상영되는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물음을 통해서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아있게 될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조금씩이나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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